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1 - 80년전 월남사를 찾은 사람들 - 1938년 사진을 통한 역사현장 읽기

향토학인 2016. 4. 23. 22:28

인지의 즐거움 021

 

80년전 강진 월남사터를 찾은 사람들

-1938년 사진을 통한 역사현장 읽기-

 

김희태

 

1938년 4월에 찍은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

 

강진 월남사지, 한가지 기록을 더 소개한다. 1930년대 사진자료이다. 아마도 월남사터 유적 사진으로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에 들 것이다. 이 사진은 2012년 11월 15일 성균관대박물관에서 전시(기간 2012.09.24~12.24)할 때 관람하고 스마트폰으로 전시물을 찍은 것이다. 일제기의 유리원판 필름자료를 성균관대박물관에서 디지털 복원하여 전시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성균관대박물관에서 전시하게 되었을까?

 

성균관대박물관에는 1,876매의 일제강점기 촬영 사진 유리원판필름(1,609매)과 셀룰로이드필름(267매)을 소장하고 있다. 이 필름원판은 후지타 료사쿠(藤田良策, 1892∼1960)가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까지 촬영된 사진을 수집한 자료이다. 후지타는 1922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의 촉탁으로 근무했고 1923년부터 1941년까지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장, 1926년부터 일본 패망까지는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직에 있었다. 이들 유리원판필름은 후지타의 개인자료도 있지만 70% 이상이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조선고적연구회의 조사자료라 한다. 그러므로 조선고적연구회가 있던 총독부박물관이나 재직했던 경성제대 박물관에 있어야 할 공식 조사 자료이다.

 

그럼에도 정확한 연유는 전하지 않은체 후지타의 소장물이라 하여 성균관대박물관에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조선 문화재를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던 후지타가 그의 특권을 이용하여 절취한 자료로 보고 있다. 자료의 전래와 디지털 복원에 대해서는 성균관대박물관 김대식 학예실장의 글(「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사진의 디지털 복원」, 『유리원판에 비친 한국의 문화유산』 : 식민지 조선의 고적 조사-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복원완료 특별전-,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2012, 158~169쪽)에 자세하다.

 

성균관대박물관 소장 유리원판필름 가운데 월남사지 사진은 3종이 전한다. 삼층석탑 2매, 진각국사비 1매이다. 1938년 4월에 촬영된 것이고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공식 조사 자료이다. 디지털 복원 사진전시회의 도록(『유리원판에 비친 한국의 문화유산』, 144~147쪽)에는 삼층석탑 1매, 진각국사비 1매 등 1938년 사진 2매와 현 위치에서 찍은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 사진 각 1매가 실려 있다.

 

 

1938년 4월의 월남사 삼층석탑과 마을 사람들

 

 

<성균관대박물관 전시 자료 디지털 촬영, 2012.11.25>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사자료로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중인 유리건판 필름을 디지털 복원하여 전시한 것을 찍은 것이다. 열한명의 마을사람들이 구경나와 사진을 함께 찍었다. 까까머리 아이도 있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보인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아낙도 한분 있고 아들을 보듬고 있는 어른의 모습도 보인다. 마을 사람들 옆에 탑쪽으로 양복차림의 신사는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데 아마도 출장 관원이거나 감독관쯤으로 보인다. 사실은 석탑과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찍은 것. 

 

삼층석탑은 기단부부터 잘 보이며 탑구도 일부 보인다. 일층 탑신의 가운데 부분은 면석이 없이 안에 채워진 돌들이 드러나 보인다. 그 앞에 상당한 수령의 나무가 한그루 있다. 이 탑은 남쪽에서 북쪽을 보고 찍은 것으로 돌담으로 경계지워 진 민가가 바로 잇대어 있다. 상당히 큰 규모의 초가집이다. 멀리 월출산의 동쪽 줄기가 보인다. 이 사진은 전시도록(『유리원판에 비친 한국의 문화유산』)에는 실리지 않았다.

 

이 탑은 1958.1.23일 “월남사지 모전(模塼)석탑”이란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형탑으로 여러개의 석재를 활용했는데 이를 '전돌을 모방'한 것으로 본 것. 당시는 문화재보호법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때이다. 일본시기에 만들어진 조선보물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시행 1933.12.11. 조선총독부제령 제6호, 1933.8.9. 제정]이 제헌헌법에 의해 승계되었는데 이 보존령에 따라 우리의 문화재가 지정된다. 다행인지 1955년에 기존에 지정된 ‘보물’을 일괄적으로 ‘국보’로 용어를 바꾼다. '국보'이긴 하지만 지금의 '국보'와는 다른 '보물' 등급인 셈이다.


월남사지 석탑은 국보 제453호로 지정(당시 월남리 854번지 임야 소재)된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됨에 따라 북한 소재 문화재나 소실된 문화재를 제외하고 재지정을 하게 된다. 월남사지 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98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2002년 3월 12일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模塼'을 떼어내고 늦게야 제 이름을 찾은 셈이다. 처음 지정한지 43년만이다.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청에 문화재명칭변경 신청을 한게 계기가 되었다.

 

 

1938년 4월과 2012년의 월남사 삼층석탑 

 

 

<성균관대박물관 전시 자료 디지털 촬영, 2012.11.25>

 

성균관대박물관소장 유리원판 필름은 월남사지 삼층석탑 사진이 2종이다. 오른쪽(향우) 사진은 월출산 본 줄기가 뒤로 보이도록 찍었다. 사진의 각도가 약간 다르기는 하다. 1938년과 2012년, 75년이라는 간극도 있지만, 촬영방법도 그렇고 기계적인 차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1938년 사진에는 바로 곁에서 마을 사람들을 찍었는데, 이 사진에서는 민가안에서 10여명의 주민들이 돌담 건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사진기도 신기할 것이고 그걸 찍는 사람들도 무얼하고 있는 걸까 그저 궁금해 기웃거린다.

 

2012년 전시 때에는 이 사진과 동일한 위치에서 배경까지 비슷하게 잡아 찍었다. 돌담은 예전의 모습이 변한 듯 하지만, 위치는 그대로 일 것이다. 민가의 초가 자리에는 기와집이 들어 서 있는데, 지금은 월남정사 법당이다. 왼쪽에는 동쪽을 향하여 초가집이 있었는데, 지금 자리에는 창고형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38년의 석탑은 탑구도 드러나 있고 기단부는 뚜렷하다. 주변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삼층의 우뚝한 탑신은 예나 지금이나 당당하다.

 

2012년의 모습은 기단도 밑 부분은 묻혀 있고 탑구도 흔적이 없다. 낮은 철책으로 둘러 있고 내려다 보면서 읽도록 낮은 안내판을 설치했다. 철책 주변 집으로 드나드는 곳은 돌을 깔아 길을 냈다. 길 건너는 경작지인 듯 하다. 돌담 위로는 넝쿨 줄기가 감싸고 풀빛은 초록, 초여름이다. 1938년 사진에는 탑 상륜부 어간으로 잎사귀가 보인다. 부근에 노거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과 2012년. 75년의 역사 현장과 그 변화를 알 수 있고 문화재 주변과 보존관리 현황을 알 수 있다.

 


1938년 4월의 월남사 진각국사비

 

<성균관대박물관 전시 도록 스캔>

 

성균관대박물관소장 유리원판 필름 디지털 복원사진이다. 전시도록인 『유리원판에 비친 한국의 문화유산』에 실린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사진을 스캔한 것이다. 도록에는 2012년 당시의 석비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1938년 사진은 오른발 쪽에서 찍은 것인데 2012년 사진은 왼발 쪽에서 찍었다. 정연한 발톱을 딛고 목을 치켜든 이수는 금방이라도 뛰쳐 나갈듯하다.

사진은 멀리 월출산 줄기가 뒤로 보이도록 찍었다. 지금처럼 보호각은 없을 때다. 석비 가까이 왼쪽(향좌)과 오른쪽에 초가집이 보인다. 왼쪽 초가집은 사각기둥이 보이고 그 옆에 장작더미가 있다. 그리고 몇 종의 나무가 보인다. 오른쪽 집은 지붕이 보이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 그 집 바로 앞 석비와의 사이에 마을사람 네명이 앉아 있다. 가운데 중년 남자는 어린이를 앞에 두고 있다. 석비의 기단석은 하부까지 드러나 있고, 정면 에는 원형이 돌이 놓여 있다. 주변에 대나무 밑 부분이 여러 곳 보인다. 아마도 사진촬영을 위해서 베어 낸 것으로 보인다.

 

이 석비는 1959.2.7일 “월남사지 석비”란 명칭으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국보 제469호로 지정(당시 월남리 813번지 畓 소재)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이후 재지정하면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13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2002년 3월 12일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비로소 주인공 “진각국사”가 표기되었다.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은 수선사 2세이며, 비문은 고려시대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가 지은 것으로 내용은 『동문선』에 전해진다. 1938년 사진에서도 비몸이 훼손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기는 다 전해지지 않고 현재 남아 있는 비문 가운데 일부가 민현구교수에 의해 판독되어 소개(「월남사지 진각국사비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고려 무신정권과 조계종-, 『진단학보』 36, 1973.)된 바 있다.

 

 

* <강진문화>31호(강진문화원, 2016.4. 86~106쪽)에 '강진의 기록을 찾아서1 - 월남사 옛터 시문과 전라병영 삭전(索戰)'이란 주제로 손보아 보냈다. 다음 글을 모두었다.(본 블로그의 글이 수정된 내용임)

   '인지의 즐거움 51'(1611년, 월남사 법당엔 불화 마당엔 우뚝한 탑),

   '인지의 즐거움 5'(쌍용이 머리를 맞대고 치솟는구나 - 장흥 줄다리기 역사자료1),

   '인지의 즐거움 6'(조선후기(182~1894) 강진 전라병영의 삭전(索戰)과 장흥 줄당기기)

*석탑 기록 일부는 <전남의 석탑>(천득염 교수 외,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에도 제공하였다.

 

* 2012년 전시 관람 겸 자문차 들렀을 때 자세한 설명과 함께 자료를 제공해 주신 성균관대박물관 김대식 실장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