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0 - 1611년, 월남사 다다르니 법당엔 불화, 마당엔 우뚝한 탑

향토학인 2016. 4. 23. 20:30

  인지의 즐거움 020

 

1611년, 월남사 법당엔 불화 마당엔 우뚝한 탑  

   

김희태  

    

 

고려 청자 요지 학술대회와 월남사 답사, 그리고 기록찾기

 

 

"월남사 법등(법등)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 일찍 폐사되었다고 하지만 불당마저 없지는 않았을텐데. ...."

 

2012년 2월 17일. 세계유산 현장에서 항상 자상한 가르침을 주시면서 지켜봐 주시는 이상해 교수님 말씀. 

 

"아! 제가 언젠가 본 기록에 1700년대 이곳을 들렸던 문인학자의 글에서 불당과 불화가 있었다 한 것 같습니다만,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그날 답사는, 강진 고려청자 요지 세계유산 등재추진 국제학술대회와 연관된 것이다. 1994년 잠정목록 등재된 이후 세계유산 차원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준비해 성사된 것이다. 전라남도와 강진군 공동 주최.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주관. 그 사유나 과정이야 어쨌든, 18년이 되도록 '그 처음'을 못하고 있었다는 자괴감도 들었던게 사실이다.

 

무위사를 들려 월남사 유적과 발굴현장을 본 일행은 고려청자 요지로 들어섰다. 월남사는 고려시대 '청자' 전성기 시절 왕권과 불교계가 깊숙히 연관된 사찰이고, 그것이 보물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로 남아있고,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많은 건물터, 왕실규모의 건물에 걸렸을법한 커다란 풍탁, 비색의 청자조각과 백제식이 짙게 풍기는 와당 따위를 실견하고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조사단으로부터 들은 설명을 되새기면서…

 

고려청자 가마 유적 일원, 발굴 현장, 청자박물관, 그리고 청자 제작처와 그 집단의 원당이나 수호사찰이었을 법한 정수사. 곳곳의 답사 탐방은 늘 그랬듯이 새로웠다. 30여년 만의 발굴현장도 그랬거니와…

 

하루일정을 마무리할 즈음, 아무리 생각해도 '판'이 서질 않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일찍 출발한 발표, 토론, 주관하실 분들은 쉬어야 하고 '프리젠테이션' 등 다음날의 본 행사 준비도 해야 하고. 더군다나 숙소도 읍내와 백련사 템플스테이로 나뉘었고. 특히나 '월남사의 그 기록, 불당(佛堂) 불화(佛畵)'를 빨리 찾아보고 싶고.

 

누가 보아도 저 사람은 차분할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스스로 보아도 답답할 지경인 적이 있다. 나의 성격. 그런데 한 가지. 어떤 기록이나 자료, 현장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참지 못한다. 불 보듯 급해진다. 어쩌면 그 같은 타고난 성격을 잘 제어하라고 조부님께서 이름 지으실 때 불화(火)변을 넣으셨던 것(熹)같다.

 

그래도 하나씩 찾아 가는 것. 켜켜히 쌓여 가는 것. 기록과 현장, 유산과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인지(仁智)의 즐거움이다.

 

'판'이 서지 못한 것도 '내 탓이려니' 하며 장흥으로 향했다. 생각 같아서는 광주 집이나 도청 사무실로 한걸음에 달려가 파일을 뒤지고 자료를 들 쑤셔 언젠가 한번 모아 두었던 조선시대의 월남사 기록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강진으로 오려니 하다가, 강진 바로 옆 삼십리 거리의 장흥. 어머님을 뵈러 갔다.

 

이태전 뜻하지 않은 가고(家故)로 씻지 못할 불효를 저지른지라, 하루 한 번의 전화만으로도 그저 "고맙다. 또 전화했냐? 얘들 잘 있지. 니들이라도 건강해라." 하시지만, 그것만으로 다 위안은 되지 못하시리라.

 

과일이며 음료수 가져다주시고 "빨리 자거라" 하신다. 어디서든 밤이면 잠을 못이루고 뒤적거리는 것을 지켜 보신터라, 내일 아침 차 몰고 갈 일을 걱정하신게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하면서도 왼통 월남사 불당 불화 생각뿐이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연결이 안 되는지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오랜 기억을 되살려 월남사로 검색을 하니 전에 보았던 시와 탐사기록이 확인된다. ‘스마트한 세상’이라더니, 역시 ‘스마트’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다운하여 편집 할 수도 없고… 가장 기본적인 방법, 손으로 쓰는 수밖에. 참으로 모처럼이다. 몇 번의 깜박거림, 찾고 또 띄우고 넘기고를 반복하다가 새벽녘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어머님은 건너방에서 몇 번이고, “아직 안자냐”

 

서투르지만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서술형 기록사료는 많이 보았지만, 고전 한시는 거의 손대지 않고 있다.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 그만큼 문학적 감수성도 필요하리라. 그러나 부족하니 멀어질 수밖에. 그래도 가끔은 뚜덕 뚜덕 풀이해 보고 '고수'들의 자문을 받기도 한다. 인지의 즐거움 연작이 그렇다.

 

백호 임제선생의 제영, “월남사 옛터를 지나며”

 

10월 18일 강진 고려청자 요지 국제학술 심포지움 현장에서 틈나는 대로 풀이해 보았다. '자전' 대신 스마트폰을 뒤적여 '다음사전'의 '한자사전'을 찾아가면서… 스마트폰, 인터넷 이라는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고전 한글화'와 이어 본 것이다. '스마트폰'! 정보화 시대의 이기(利器)를 잘 활용함도 필요한 일일터이지만, 신문물 적응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짠한 자화상'이려니 돌이켜 보기도 한다.

 

이런 사연을 담아 옮겨 본 것이 백호 임제(1549~1587)선생의 '過月南寺遺址'이다.

 

월남사 옛터를 지나며 過月南寺遺址

이곳이 예전의 그 월남사련가            此昔月南寺(차석월남사)

이제는 자욱한 연하속에 적막감만      煙霞今寂寥(연하금적요)

산은 예전에 단청에 비쳤는데            山曾映金碧(산증영금벽)

물은 절로 아침 저녁 흐르누나           水自送昏朝(수자송혼조)

옛탑은 촌락의 담장을 의지하고         古塔依村塢(고탑의촌오)

비석 조각은 들다리가 되었구려         殘碑作野橋(잔비작야교)

원래있던 귀중 보결 하나도 없으니     一無元寶訣(일무원보결)

흥폐를 물어 봄이 얼마나 수고로운가   興廢問何勞(흥폐문하로)

    

 

 

다섯 번째 구절은 ‘오래된 탑 사이에 새들이 놀고’로 옮겼다. 다시 고전적인 방법으로 자전을 뒤져 찾아보니 '塢'는 담장이나 둑을 뜻했다. '烏'만 보고 찾아보지도 않고 폐허된 절터, 마을주변 탑 주위를 맴 도는 ‘새’들로 쉽게 생각한 것이다. 한 글자씩 번역 한 뒤 윤문과 의역 주석해야 한다는 기본을 놓아 버린 셈이 된 거다. ‘한 글자씩’은 관두고라도 조금만 더 현장을 생각했더라면… 절터의 탑재가 민가의 돌담에 섞여있는 걸 오래동안 몇 번을 보아 왔던가! 글이던 현장이던 이어 지지 않을 수가 없음을 누누이 듣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시상(詩想)으로 들어가 보자.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조선중기 시인 겸 문신. 임백호. 나주 회진 출신이다. 문과에 급제하지만, 당파싸움을 개탄해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또한 유명하다. 그가 월출산 아래 월남사를 찾았다. 때는 저녁 노을이 질 무렵

.

이미 고려시대에 진각국사가 주석하고 중앙정부의 유력 인물과도 관련이 있었다는 역사 기록은 익히 알고 있었던 터. 길을 물어 찾아 왔건만, 그 성세는 다한 듯 탑은 민가의 담벼락에, 빗돌은 들판의 다리로 쓰이고 있으니. 절로 한탄이 나올 수 밖에. 그래서 이곳이 그 유명한 예전의 월남사련가로 시작한다. 찾은 시간 또한 저녁 무렵. 안개와 놀마저 적막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산을 보니 아름다움만은 간직하고 있다. 황혼녘이기도 하지만, 월출산의 산경(山景)은 그야말로 깨끗하면서도 적막감이 돌 정도로 고요한 경치. 그 산 빛이 예전에는 사찰 전각의 금빛 푸른 단청에 비쳤는데. 계곡의 물은 하루 하루 매일 끊임없이 절로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고려의 성세에서부터 지금까지 현장은 그대로 있는 듯 하지만, 절이 허물어지듯 국가 대사도 뒤엉켜 혼조가 되었으니 이 또한 적막감 이상가는 참담함이다.

    

현장을 보니 더 그렇다. 예전 그 위용을 자랑하던 돌탑 곁에는 집들이 들어서고 담장이 둘러져 오히려 민가의 담장에 절집의 탑이 의지한 듯 보이고. 고려시대 불교 지도자로 국사의 반열에 오른 진각국사의 탑비 조각은 들판 개울을 건너는 농로의 다리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 흥망성쇠를 어쩔거나.

 

아무리 돌아 보아도 오랜 풍상에 시달려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뿐, 원래부터 전해 오던 귀중한 보물은 찾을 수가 없으니 가슴 깊숙이 차오르는 흥망성쇠의 인간사와 시대사에 대한 회의와 무상함. 그 흥폐를 굳이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월남사 기록 찾기 시발이 된 노트>

 

10월 18일 점심시간 무렵, 앞날 찾은 자료의 풀이가 거의 끝날 무렵. 또 하나의 고민. 나주에서 뜻 깊은 자리가 있는데 가야하나? 오전 발표 마치자마자 주저없이 나주목의 내아 금학헌(琴鶴軒)으로 향했다.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나카츠마 아키라(中塚明)님이 신설한 전남도립도서관(2012.1.12 개관, 무안군 삼향읍 남악로 210 소재)에 평생 모으고 연구해 오신 도서를 기증하기로 결정되어 협약식을 하게 된 것. 그 기증의 물꼬를 원광대 박맹수교수와 합작으로 추진했던 터라 그 자리에 함께 하고자. 지한파(知韓派) 1세대 지성으로서 한중일 동양 삼국 근대사연구 권위자. 그 동양 근현대사 자료 2만여 권을 조건 없이 기증키로 한 것.

강진 고려청자 요지 세계유산 국제학술대회(2012.10.17~18), 전남도립도서관 도서기증 협약식(10.18.)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뒤적여 묵혀 둔 자료를 찾았다. 강진 월남사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 년전에 월남사 발굴조사팀(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게도 제공했던 터. 임백호의 제영도 다시 살펴보면서

 

1611년, 새벽녘 월남사에 다다르니 법당엔 불화, 마당엔 우뚝한 탑  

 

그 하나는 1611년(신해, 광해군 3) 기록.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이 스물 다섯 청년시절에 서울에서 해남으로 오가면서 지은 <남귀기행(南歸記行>이라는 시에 보면 단편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월남사를 들린 기록이 나온다. 이 시는 122구의 7언시인데, 1-2행이 ‘만력 기원으로 삼십구년 두병은 자방에 꽂혀 있고 널은 칠일인데(萬曆紀年三十九 斗柄揷子日有七)로 시작되어 1611년 11월에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용인, 양성, 차현(車峴), 익산, 삼례역, 금구, 정읍, 노령, 장성, 무등산, 금성(나주), 월출산을 거치거나 지난 다음 모산(茅山, 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당시는 나주목에 속함)의 처사 집에서 묵은 뒤 월남사를 들린다. 2행의 짧은 내용이지만, 불당, 화불(畵佛), 탑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에는 불화(또는 벽화)가 있는 법당 건물이 있었고 마당에 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맑은 아침 월남사에 말을 매니            淸晨繫馬月南寺(청신계마월남사)

불당에는 화불 있고 마당에는 탑있네   堂有畵佛庭有塔(당유화불정유탑)

 

또 다른 하나. 1722년의 기록.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인화가, 평론가인 담헌 이하곤(澹軒 李夏坤, 1677~1724)선생의 <남유록(南遊錄)>에는 1722년(임인, 경종 2) 11월 27일에 월남촌 월남사를 지나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때는 폐허가 되고 민간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722년 11월 27일

정지석(鄭之錫), 김득삼(金得三), 이민욱(李敏郁)이 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식사 후 신보(信甫)와 함께 출발하려 하니, 떠나고 머무는 정리 때문에 자못 슬픔이 저며 왔다. 진남루(鎭南樓)에 이르러 조금 쉬었다. 말 위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니 기이하고 수려하며 험준하고 뛰어나, 자못 누원(樓院) 가는 길에 올려다 보니 도봉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15리를 지나 월남촌에 이르렀는데, 월출산 남쪽에 있다고 해서 '월남(月南)'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옛날에 월남사가 있어 제법 승경이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민간인이 살고 있다. 또 서쪽으로 5리에 백운동이 있는데 승정원 정자 이언렬(李彦烈)의 별장이 있다. (二十七日. 鄭之碩 金得三 李敏郁來別. 飯已偕信甫發行. 去留之際. 殊覺黯然. 至鎭南樓少憇. 馬上見月出山. 奇秀巉絶. 頗似樓院途上望道峰也. 行十五里至月南村. 在月出之南. 故曰月南. 舊有月南寺頗勝. 今廢民人居之. 又西五里爲白雲洞. 承文院正字李彦烈別業也)

 

어떤 연유로 이하곤선생은 월남사를 찾았을까?

이하곤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재대(載大), 호는 담헌(澹軒)계림(鷄林)소금산초(小金山樵)무우자(無憂子)이다. 좌의정 이경억(李慶億, 1620~1673)의 손자이며, 대제학을 지낸 이인엽(李寅燁, 1656~1710)선생의 맏아들이다. 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이조판서를 지낸 옥오재 송상기(玉吾齋 宋相琦, 1657~1723(선생의 딸이다. 김창협(1651~1708)선생의 문인으로 충청도 진천(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 마을)에서 학문과 서화에 힘썼고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여행하였고,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각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녔다.

 

문집인 <두타초(頭陀草)>(국립중앙도서관 한46-가 484/민족문화추진회,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제191집)에 실린 <남유록(南遊錄)>과 <남행집(南行集)>은 1722년(경종 2) 10월 13일 청주를 거쳐 12월 18일 진천으로 귀향하기까지의 일록과 지은 시(210수)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호남지방을 유람하면서 견문한 지방의 특징적인 내용을 사실적(寫實的)으로 묘사하여 18세기 초 호남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일정을 보면, 청주-회천-연산-여산-전주-금구-태인-장성-나주-강진-장흥-해남-영암-나주-화순-담양-남원-전주-연산-청주-진천의 여정이다.

  

여행의 동기는 1713년(숙종 39)에 금강산에 갔을 때 호남의 승려 재총(載聰)으로부터 “천풍산(天風山, 天冠山)의 승경이 금강산과 백중지세”라는 말을 듣고 호남 유람의 뜻을 갖고 있던 차, 1722년 봄에 장인 송상기선생이 당화를 입어 강진으로 유배되자 이 해 가을 장인에게 문안을 올릴 겸 호남여행을 하게 된다. 장흥, 강진, 해남 등의 여행을 하고 진천으로 돌아가던 길에 수인사(11.26 숙박)에 들렸다가 전라병영, 월남사, 백운동, 안정동, 무위사(11.27.숙박), 도갑사, 구정봉, 용암사(11.28 숙박), 상견성암, 국장생, 황장생, 구림리, 회사정, 모정촌(11.29 숙박)을 지난다. 가는 곳마다 시를 남기는데, 월남사에서는 시를 짓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1722년 11월 27일의 기록에는 진남루에서 쉬고 월남촌 월남사로 간 여정이 나온다. 진남루는 전라병영성의 남문 누각이다.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 지로리. 수인사에서 출발하여 병영성을 거쳐 월남촌으로 갔음을 알 수 있다. 월남촌 다다르기 전 월출산 경관을 보고 ‘누원(樓院) 가는 길에 올려다 보니 도봉산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하고 있다. 누원은 서울에서 의정부로 갈 때 장수원 못 미쳐 국도 옆의 다락원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암과 강진 월남사로 이어지는 옛 길이 ‘누루치(누랫재)’이다. 기록에는 ‘누리령(樓犁嶺)’으로 표기 된다. ‘도봉산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 후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유배 때 지은 ‘탐진촌요(耽津村謠)’ 15수 가운데 첫 수, 다음 시이다.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樓犁嶺上石漸漸(누리령상석점점)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長得行人淚灑沾(장득행인루쇄첨)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莫向月南瞻月出(막향월남첨월출)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峯峯都似道峯尖(봉봉도사도봉첨)

 

이 시 끝의 주석에 ‘월출산의 강진에 있고 도봉산은 양주에 있다[月出山在康津 道峰在楊州]’는 기록이 있다. 월남사로 통하는 길, ‘누릿재’. 백호 임제선생, 고산 윤선도선생, 담헌 이하곤선생, 다산 정약용선생. 그들이 이 곳을 넘나 들면서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혔으리라.

 

월남사를 포함하여 월출산 기록을 찾아 본 것이 1987년이다. 당시 광주민학회 주관으로 월출산 바위문화 조사를 했던 것. 영암문화원, 전라남도, 영암군이 힘을 보태 책은 이듬해에 간행되었다. 역사, 마을, 불교, 건축, 민속 등. 그때 몇몇 기록을 찾아 월출산 역사 편에 소개했고, 그 뒤로 짬짬히 기록을 모았던 것. 월남사로 한정해 살펴 본 것이 앞의 기록이다. 조금 더 공간을 넓히고 시간을 확장하면 많을 것이다. 불교나 절로 한정해도 무궁하다. 하여 우리의 기록 찾기와 현장 탐사는 계속 이어져야 하리라.

    

 

* 2012년 10월 18일 초고('새벽녘 월남사 다다르니 법당엔 불화, 마당엔 우뚝한 탑')를  손보아 남도불교문화연구회에서 2014년 12월에 발간한 연구학술지 <남도불교문화연구> 제12집의 ‘사찰 기록 단상(寺刹記錄斷想, 김희태 글, 23~254쪽)의 한 장으로 실었다.  강진 고려 청자요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회의(2012.10.17~18) 전후의 경과, 월남사 답사와 관련 기록 찾기와 해설, 개인사 등에 대한 내용이다. 광주에서 전남도청(무안 남악신도시)가는 시외버스를 탈 때 마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정리 한 것이다. 앞에 든 시문은 이미 국역본도 나와 있긴 하지만, 스마트폰을 통하여 검색하고 수기하고 해설하는 과정을 써 보았다. 

 

* '인지의 즐거움 51은 '인지의 즐거움5', '인지의 즐거움6(조선후기(182~1894) 강진 전라병영의 삭전(索戰)과 장흥 줄당기기)를)'과 합해 <강진문화>(강진 기록을 찾아서1 '월남사 옛터 시문과 전라병영 삭전(索戰)')(2016 4월 발간예정)에도 보냈다.

 

* 잠은 언제 자냐고 걱정 하시던 어머님(해남윤씨 윤순字, 1935~2015.10.23)께서는 연전 청명한 가을날 이승의 끈을 홀연히 놓으셨다. 늘 하시던 것처럼 목욕을 다녀 오신 뒤 여행을 떠나시듯.....  아직도 꿈이려니 하지만, 아버님(영광김씨 삼우당三友堂 김숙, 1930~1998.10.10)과 함께 더 좋은 시간을 가지시리라. 마음에 품고 또 품으셨던 '녀석'도 얼싸 안으시고서....

 

* 이와는 따로 고려~조선 시기 '月南寺' 관련 기록을 정리중이다. 단편적일지라도 그같은 자료를 통해 시대상과 문화상을 더듬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에.  20여개가 넘는 기록을 찾았다. 1차로 남도불교문화연구 월례발표(2016.01.12.토, 전남대역사관)에서 동학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고견을 구했다. 발표 주제는 <고려~조선초기 ‘月南寺’ 관련 기록의 검토>. 도움말을 해 주신 제현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