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19 - 조선후기(1892~1894) 전라병영의 줄당기기, 삭전(索戰)

향토학인 2016. 4. 22. 09:30

인지의 즐거움 019

 

조선후기(182~1894) 전라병영의 줄당기기, 삭전(索戰)

-줄당기기 역사자료2-

 

김희태  

 

강진과 바로 이웃한 장흥의 보름 줄다리기(고싸움 줄당기기)는 예전부터 잘 알려 져 있었다. 장흥군과 문화원에서 학술조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에 관련 연구자들과 연결을 해주면서 기록을 찾아 보게 되었다. 1917년 목포신보사에 간행한 <전남사진지>에 실린 장흥 줄다리기(“綱引き”) 사진은 줄다리기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1910~1920년대에 줄다리기 현장을 보고 지은 한시도 2수를 확인해 연구진에게 제공하였다.

 

하나는 1918년으로 연대가 확인되는데 소천 이인근(小川 李寅根, 1883~1949)의 문집에 있는 “무오년 정월에 백형의 삭전운에 차운하다[戊午正月次白兄索戰韻]”라는 시이다. 다른 하나는 김옥섭(金玉燮, 1878~1930)이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보면서 감흥을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신헌유고(愼軒遺稿)>에 실려 있는데 “정월 보름에 줄당기기를 보다[上元日 觀索戱]”는 시이다.

 

여기에 더하여 장흥 인근지역의 줄당기기 기록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어 뒤져 보았다. 조선 말기인 1892년부터 1894년 사이 3년에 걸쳐 현재의 강진군 병영면 지역에 있던 전라병영성에서 ‘삭전(索戰)’을 관람한 기록을 확인하였다. 전라병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 본부 겸 훈련소라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강진 작천의 유생 강재 박기현(剛齋 朴冀鉉, 1864.4.22~1913.6. 1)이 남긴 『일기(日記)』(2권 2책)에 있는데, 1892년(壬辰) 1월 15일, 1893년(癸巳)가 1월 15일, 1894년(甲午) 1월 11일, 1월 13일, 1월 15일 등 3년 사이 5회의 기록이 확인된다.

 

1892년과 1893년의 일기 기록[사료 ①, ②]에는 정월 15일에 ‘병영 장대 앞에서 삭전을 구경했다.’는 내용이다. 삭전을 정월 보름에 했고, 장소는 전라병영의 장대 앞이라는 점, 그리고 1892년의 일기에서는 ‘아침을 먹은 뒤’라 하여 ‘삭전’을 했던 때를 알 수 있다.[②]

 

1894년의 일기 기록에서는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읽을 수 있다. 1월 10일부터 삭전을 구경을 했고[ ③],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민인이 병영성내로 들어와 삭전을 구경하도록 했고[④], 가족들도 함께 관광을 했음을 알 수 있다.[⑤]

 

이상의 기록을 정리해 보면, 매년 정월 대보름 오전에 전라병영 장대 앞에서 삭전을 했는데, 3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1월 11일경 즉 보름 몇일전부터 밤에도 했으며,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민인이 성안으로 들어와 관람하도록 했고, 가족들까지 참여하여 관광했음을 알 수 있다.

 

『일사(日史)』는 1891년부터 1903년에 이르기까지 장흥 강진 일대 향촌 사회의 동향과 함께 박기현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유생들과의 교유관계, 사회 민속 생활사 자료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특히, 갑오년(1894년)을 전후한 시기 장흥·강진 일대의 동학농민군측과 관군측의 동향, 당시 전투상황 등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이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이다. “강진 강재 일사(康津 剛齋 日史)”라는 명칭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로 지정(1999.02.26)되어 있다. 강진군 작천면 용상리 박씨가에 소장되어 있고 국역본(박기현 저, 박맹수·백준흠·김방룡 국역, 『강재일사』, 강진군, 2002)도 발간된 바 있다.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삭전을 관람하도록 하다

 

① 1892년 1월 15일 을해. 맑음. 아침을 먹은 뒤 병영 장대 앞에서 색전(索戰)을 구경하였다. 밤에는 보름달이 구름이 낀 까닭으로 달빛이 드러나지 않았다. 달무리가 노적봉 오른쪽 봉우리에 감춰져서 빛났다.[『日史』 壬辰正月 十五日 乙亥 晴 朝後 賞索戰於將臺前 夜望月而雲陰 故光則不察而輪則隱暎於露積峰之右峯]

 

② 1893년 1월 15일 기해. 가랑비가 종일 내림. 나는 (전라병영) 장대(將坮=將臺) 앞에서 색전을 구경했다.[『日史』 癸巳元月 十五日 己亥 踈雨竟日 余翫索戰于將坮前]

 

③ 1894년 1월 11일 기축. 맑다가 오후에 흐려짐. 밤에 달무리가 떴는데 동쪽으로는 달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제 밤부터 밤에 색전을 구경했다.[『日史』 甲午正月 十一日 己丑 晴 午後陰 夜月暈而東邊則暈不成 自日昨夜 夜觀索戰]

 

④ 1894년 1월 13일 신묘. 맑음. 밤에 병공(兵公; 全羅兵使)이 영을 전달하기를 성내(城內;전라병영성 성안)로 들어 와 색전을 구경하라고 했다. 나도 또한 구경하러 갔다.[『日史』 十三日 辛卯 晴 夜兵公傳令 入索於城內 而玩戰焉 余亦觀光]

 

⑤ 1894년 1월 15일 계사. 서풍이 하루 종일 불고 먼지가 일어났다. 햇빛은 헌청했다. 아버님을 모시고 성묘를 하고 돌아 와 색전을 구경했다. 달이 노적봉에서 나오는 것을 봤는데 담백색의 둥그런 달무리가 이루어졌다.[『日史』 十五日 癸巳 西風盡日揚塵埃 日光則軒晴 侍父主省墓歸 玩索戰 望月出露積峯輪圓色淡白]

 

줄다리기는 전통시대에 삭전(索戰)·삭희(索戱)·조리지희(照里之戱)·조리희(照里戱)·갈전(葛戰)·도삭(綯索)으로 표기 하였다. 중국에서는 ‘시구(施鉤)’·‘타구(拖鉤)’·‘발하(拔河)’로 불리고, 일본과 오끼나와에서는 ‘츠나히끼(綱引き)’로 불리운다고 한다.

 

줄다리기의 함의(含意)는 생산, 풍요[풍년, 만선], 동질감, 향토애, 공동체, 단합, 고을축제, 향전(鄕戰), 민심위무, 오락, 즐거움, 여유, 생존, 욕구충족, 신앙성, 주술성, 놀이성 등 다양하다. 우리의 민속놀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집단놀이이다.

 

전라병영의 ‘삭전(索戰)’은 병영 소속 장졸의 동질감과 공동체 단합의 집단놀이로 행해졌을 것이다.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민인이 보도록 한 것을 보면 관의 입장에서 보면 민심 위무와 민정 안정을 통한 주민 통치의 편의성을 따르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주민의 입장에서는 가족까지 참여하여 관광을 한 것을 보면 축제적 욕구의 충족과 오락을 추구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월 보름에 몇 일간에 걸쳐 한 것을 보면 정초의 신앙성과 주술성, 생산의 풍요 등은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듯 싶다.

 

전라병영 인근, 장흥 보름줄당기기는 보름이 되기 훨씬 전 고샅줄(애기줄, 골목줄)놀이부터 시작되고, 승패와 생산 풍년을 연계시켰던 점 등 참여하는 민인의 입장에서는 생산성, 신앙성, 주술성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리고 줄패는 동부와 서부로 패가 나뉜다.

 

조선시대의 장흥은 도호부로서의 읍격(邑格)을 유지하면서 읍치(邑治)를 예양강(탐진강) 서쪽, 지금의 장흥읍 동동리 남동리 일원에 두었다. 줄당기기 패로 치자면 서부인 셈이다. 예양강의 동쪽에는 또 다른 국가기구인 벽사도 찰방역(碧沙道 察訪驛)이 있었다. 벽사도 찰방역은 벽사, 가신, 파청, 양강, 낙승, 진원, 통로, 녹산, 별진, 남리역 등 10개역을 거느린다. 장흥, 보성, 낙안, 강진, 해남 5개 고을의 교통 통신을 관장하던 남부의 국가 중추 기관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줄당기기 패는 동부에 해당한다. 장흥부사와 벽사역 찰방, 그들의 관품(官品)은 달랐을지라도 왕권을 대행하는 지방 수령과 국가 기구 수장으로서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 역학과 지역 여건이 자연스레 줄당기기라는 집단놀이에도 이입되지는 않았을까?

 

이 기록은 장흥 줄당기기 학술조사가 끝날 무렵 확인하여 연구진에 제공하였더니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이경엽·양기수·이옥희, 장흥문화원, 민속원, 2013. 341~344쪽)에 부록 형식으로 실리게 되었다. <강진 일사>는 동학농민혁명 등 근대사 기록으로 가치가 있지만 세세히 살펴 보면 향촌생활사와 민속문화사에서도 중요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좀더 많은 연구와 해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전라병영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눈여겨 볼 것이 있다. 지금의 강진 병영 자리로 옮긴 것이 1417년이다. 광주에 있던 전라병마절도사영이 도강(道康)의 옛터로 옮긴 것이다. 1417년. 앞으로 2년 뒤 2017년이면 전라 병영 강진 이영(移營) 6주갑(周甲), 600년이 된다. 환갑이 열 번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1417년은 강진(康津) 정명(定名) 600년이 되는 때이기도 하다. 북부의 도강(道康), 남부의 탐진(耽津)이 합해지면서 두 고을 이름에서 각각 한자 따서 1417년(태종 17)에 강진(康津)이 된 것이다. 멋들어지게 강진 미래 천년의 한바탕이 이루어졌으면 싶다. 그리고 고증과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전라병영의 삭전, 줄당기기를 이영(移營) 600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재현해 보면 어쩔까?

    

 

 

 

박기현(1864~1913) 『日史』1894년(갑오) 정월 11일(9행), 13일(11행), 15일조(13행)

 

* 이경엽, 양기수, 이옥희, <장흥고싸움 줄당기기>, 장흥문화원, 민속원,  2013,  341~344쪽 초고를 손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