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22 - 해남 이진성 우물과 정조대왕 정화수

향토학인 2016. 4. 24. 09:43

인지의 즐거움022

 

해남 이진성 우물과 정조대왕 정화수

  

김희태

 

○ 역사기록

 

해남 북평면 이진리 이진성(梨津城) 안에 있는 우물. 옛 부터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정조임금과 관련이 있는 우물이라는 것. 찾아 보니 정조대왕 왕명으로 편찬(1795년, 정조 19) 한 이순신장군의 문집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난중일기>에 이진(梨津)에 머문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으로 인해 “이진성”, “이진성 우물”, “정조대왕 우물”로 연결되면서 전해 왔던 것 같다. 이진에 머문 것은 1597년 8월 20일 도착해 24일 출발하니 3박 4일간. 계속 배에 머물다가 8월 23일 하루만 뭍으로 내려와 유숙한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그 며칠동안 이순신 장군은 곽란(癨亂, 일종의 급성 위장병)이 일어나 기동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중증에 시달린다. 새벽까지 앉아 있기도 했고, 술을 마셔 통증을 달래려고도 했다. 그러나 곽란 증상은 잡히지 않아 결국은 배에서 내려와 육지로 나와 하루를 보낸다. 그날이 8월 23일, 이진에 정박한지 사흘만에 배에서,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명량쪽으로 출발한다. 그 이후에는 곽란 증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분명 8월 23일 뭍에서 하루를 유숙하면서 몸을 다스린 것이다. 이상은 사료 기록상의 내용을 풀어 본 것이고, 지금부터는 “정조대왕과 이진성 우물”을 서사(敍事, 스토리텔링)로 역사 현장을 더듬어 본다.

 

○ 서사(敍事) 1 - 이전성, 이진성 우물, 이순신장군 토사곽란 치유

 

이순신 장군의 곽란 증상이 다스려진 것, 그것은 아마도 “이진”의 “음식”과 “물”과 “인정(인심)”일 것이다. 특히 “물”은 사람의 몸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조선 수군 재건의 길에 지치고 아픈 몸을 다스리는데는 더 없는 “활명수”였을 것이다. 이진의 우물물은 옛부터 물 맛 좋기로 근동에서는 알려진 곳. 이순신장군이 몸이 아파 이진성에 내려와 유숙한다는 말을 들은 이진의 주민들과 병사들은 최고의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하고 신성 묘약으로 알려진 우물물과 함께 상을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성에, 그 인심에 감복한 듯 이순신장군의 몸은 쾌차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 날 어란을 거치고, 계속 나아가 물자를 준비하고 인력을 마련하고 전략을 살펴 명량대첩이라는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전첩을 완성 했으리라.

 

○ 서사(敍事) 2 - 前史 ; 이진의 유래와 생활사

 

이진 마을의 유래를 살펴 보면서 이진진의 설치와 운영, 주민들의 생활사, 지형 지리적인 특징, 지명 유래 등을 찾아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환경과 남도의 깨끗한 자연환경(물)과 약으로도 쓰이는 음식, 남의 아픔을 내 일같이 여기는 인심을 풀어 넣고, 결국에는 이순신장군과의 스토리(1597년 8월 23일 유숙, 곽란 치유, 그 힘을 받아 명량대첩 승전 등)로 이어지는 배경(前史)을 풀어 나간다.

 

○ 서사(敍事) 3 - 後史1 ; 정조대왕과 우물, 난중일기

 

임진 정유왜란도 지나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났어도 이진에서는 전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이진에 왔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정성을 드렸고, 저 우물물로 인해 아픈 몸이 좋아졌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 뒤로도 계속 우물물은 마르지 않고 주민들이 사용했는데, 언젠가부터 물의 양이 줄어 들고 보기도 흐릿해져 간다. 뭔가 정성이 부족 한 것 아닌가. 우리가 정성을 들여 제사라도 모셔야 할 것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의 꿈에 우물물 정화수를 떠 이순신장군 제사를 지냈는데, 그 우물이 어딘지를 모르고 찾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792년(정조 16년) 8월 19일에 정조대왕은 강진 탄보묘(현재의 완도 고금도 소재)에 중국 명나라 구원군 등자룡을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을 내린다. 이 때가 8월 19일이다. 이순신장군이 이진에 온지 196년이 지난 때이다. 이순신장군이 이진에 온 것은 8월 20일이다. 그로부터 196년 뒤 8월 19일, 그러니까 이순신장군이 이진에 온 날짜로 치자면 하루 전날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순절한 등자룡을 탄보묘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내자, 이순신장군도 곽란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가장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게 해준 “이진 우물물”과 연계되어 정조대왕의 꿈에 나타났으리라. 이런 인연인지 정조대왕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되고 그 속에 실린 <난중일기>에 이진에 정박하고 하루는 배에서 나와 이진에서 유숙하는 기록이 있다.

 

○ 서사(敍事) 4 - 後史2 ; 고향 찾은 “억만”이의 마을 내력 탐문

 

“억만”(가명)이는 이진에서 태어나 그 우물물을 먹고 자란다. 주변에서 놀이도 많이 했고 누구 보다 잘했다. 그리고 머리도 잘 돌아가 꼬마들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도시로 나가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나와 교직에 몸 담는다. 그래도 항상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 특히 우물과 정조대왕 꿈 이야기는 시간일 갈수록 새록 새록 생각난다. 결국 그걸 찾기로 한다. 객지 생활을 접고 마을로 돌아 와 동네 일을 보면서 탐문을 시작한다. 어른 들을 만나고 자료를 모은다. 진척은 없었지만 한마디를 듣고, 한줄 글 자료를 보면서 재미가 더해진다.

 

결국, 이진성-이진성 우물-임진왜란-이순신장군-토사곽란-이진 유숙-우물 정화수ㅡ음식, 인심-명량대첩-정조대왕-이충무공전서-난중일기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풀어 낸다.

 

 

1872년 이진진지도 이진성(당시 영암 소속)

 

1872년 영암군지도 이진성과 달마산

 

이진성 원경

 

1872년 이진성(영암군지도)

 

이진성 입구 공적비군

 

이진성 우물(매년 우물제, 도제, 당제, 산신제를 한다. 이곳 우물제가 첫번째.)

 

이진성 우물 기원문(2016.02.04 방문한 날 아침 마을 원로가 작성해 이장이 붙임

 

이진성 우물 상부 판석 축조기록(嘉慶十一年 丙寅 月 日 首刱 / 道光十九年 己亥 十一月 日 重修)

[1806년(순조 6) 병인년에 처음 만들고 1839년(헌종 5) 기해년 11월에 손보다.] 가경(1796~1820)과 도광(1821~1850)은 조선 후기에 사용하던 중국 청나라 연호이다. 이진성 우물의 판석으로 짜 맞춘 형식은 보통 조선 후기에 성행하던 우물 제작 기법이다. 이진진이 설치될 때 아니면 그 전부터 샘은 있었을 터이고 임진란 때도 유지되었겠지만, 상부 판석 구조는 1806년 만들고 1839년 수리.

 

* 2015.08.01. 이진 역사와 이진성 현장을 서사(스토리텔링)로 풀어보기 위한 머릿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