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13 -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장흥 방촌마을

향토학인 2014. 12. 6. 10:49

인지의 즐거움 013

 

‘기록의 寶庫, 전통마을’ - 장흥 방촌

 

김희태

 

 

 

서남해안 역사의 축소현장, 장흥 방촌

 

남해안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천관산(天冠山, 723m)의 동쪽 산자락, 해발고도 40미터, 사방 2킬로미터쯤 되는 옴팍지(盆地). 빗돌과 기와집이 여느 동네보다 많이 눈에 띄는 곳.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370기나 넘게 널려있는 마을. 오백여년 전부터 씨내림하여 생긴 장흥위(長興魏)씨 집성촌. 마을 입구 큰 길가에 마주한 장승이 길손을 맞이하고, 마을박물관이 있는 곳.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천관산 뒷등허리(背山)를 기대고 마주보고 있어 '곁모실(傍村)'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으뜸 동네인 계동(桂春)을 비롯하여 안골(內洞), 윗골(上洞), 새터(新基), 아래샛터(하신기), 등전 등 여섯 뜸이 23번 국도 동쪽에 있고 장천재 어귀마을인 생골(쇵골, 壺洞)을 비롯 탑골, 범매(虎山), 매밑등(山底), 응달 등 다섯 뜸이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천관산 계곡물을 젖줄삼아 160가구 5백여명이 옹기종기 살면서 문전옥답 2천1백 두락을 벌면서 대대로 살아온다.

 

흔한 마을이려니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역사의 한 현장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서남해안 역사의 축소현장으로서 각 시대 유적과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현장 곳곳이 말 그대로 바로 박물관이다. 물론 기록도 잘 남아 있고, 전국적으로 유례가 드물게 마을박물관이 건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장흥 방촌마을은 남해안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보성만을 끼고 있으며 서편에는 호남의 명산이라 할 천관산을 배경으로 하는 지역이다. 이같은 입지 배경은 선사시대부터 남겨진 다양한 문화유적 유물을 통여 외진 지역이 결코 아니었음을 반증해 준다.

 

 

 

 

장흥 방촌마을과 천관산 전경(사진 엄길섭). 아래건물이 방촌유물전시관, 고문서와 유물 1천여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 고인돌이 370여기가 널려 있어 마을 단위로는 전국적에서 가장 밀집 분포된 곳이다. 특히 한곳에 100기 가량이 있으니 청동기시대에 이 지역에 강력한 토착집단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지 배경과 지역 전통은 백제시대 이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 말기까지 ‘오차현(백제)→오아현(통일신라)→정안현→장흥부→회주목(이상 고려)으로 이어지는 고을의 치소가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 말기에는 바닷길이라는 요충지라는 탓에 왜구의 침략으로 본터를 떠난 뒤 고을은 폐허된다. 땅이름만 고읍(古邑)으로 남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장흥위씨가 입촌하면서 동족마을로서 왜란과 호란을 극복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 했다. 그리고 이들의 인문활동은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 1727~1798)선생이라는 호남실학의 거봉을 낳았으며 현재까지도 상부상조하는 자치규약을 만들어 향촌자율의 전통을 세웠다. 이처럼 장흥 방촌마을 외진 지역이 아니라 서남해안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향촌 자치 조직과 운영문서

 

전통적인 명촌에는 고문서 등 역사 기록자료가 많이 소장되어 온다. 그 가운데에서도 고문서는 바로 생활사 자료이면서, 국가, 왕실, 관부, 향촌(촌락), 개인간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말단의 촌락사회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장흥 방촌마을은 장흥위씨 집성촌으로 17세기 초엽에 동족적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현재 판서공파로 지칭되는 위덕화(1551~1598, 호조판서공)선생의 후손가(위성렬, 판서공파 종택), 안항공파로 지칭되는 위덕후(德厚, 1556~1606, 濟用監 判官, 안항공)선생 세계로 조선후기 실학자로 잘 알려진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의 후손가(존재 고택), 안항공파 세계의 오헌 위계룡(啓龍, 1870~1948)선생 후손가(위성탁, 오헌고택)에 다수의 기록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건조물 공간 자체도 기록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방촌유물전시관을 만들면서 30여 집안과 개인으로부터 1천여점의 유물과 문서자료를 기탁 또는 기증받아 전시․보존하고 있다. 방촌마을 기록자료로서 눈여겨 볼 것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향촌사회 조직과 운영에 관한 문서를 들 수 있다.

 

이들 문서는 문중문서와 향촌문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문중 문서도 장흥위씨를 아우르는 대문회(大門會) 조직 문서와 각 마을별로 정착하면서 갈라진 소계파(小係派) 조직문서로 구분된다. 대문회 조직 문서로는 1605년의 안항공유서첩(顔巷遺書帖, 桂巖家訓)(1753 위백규 후서), 1734년~1774년의 명단이 기록된 회성구회(懷城九會, 聽禽翁煎花約), 18세기 중엽의 수령위씨문안(遂寧魏氏門案), 1746년의 사약(社約), 1796년의 무기계(無忮契, 위백규 서문), 1936년의 장흥위씨문계규약(門契規約)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소문회조직문서는 게춘동종계안(桂春洞宗契案, 1768년, 위문덕 서문), 장흥위씨계동파종안(桂洞派宗案, 1838년, 위익조 서문), 반계공파종계안(磻溪公派宗契案, 18세기 중엽, 치부책)이 전한다.

 

 

향촌문서는 마을단위 동계, 동약 자료로 방촌상하계(傍村上下契, 1768년, 위문덕 서문), 동약(洞約, 1803년, 위도제 서문), 강계(講契 名帖, 1831년, 위도응 서문)가 있다. 면단 위 조직문서로는 古邑面講帖(1803년), 冠山耆老會帖(1790년, 위백규 서문), 고읍방약선적안(古邑坊約善籍案, 17세기 중엽), 관산속기로회시집(冠山續耆老會詩集)(1935년)을 들 수 있다.

 

 

 

 

 

 

고읍방약선적(古邑坊約善籍, 33.5㎝×23.7㎝, 1797년) 1797년 고읍면의 효자 등 선적(善籍)한 사실을 기록하여 장흥부사(府使)에게 보고한 것이다. 

 

 

조선중기~말기 9세 문집, 「위씨세고」

 

오헌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70호)은 오헌 위계룡(1870~1948)선생이 중건한 전통가옥이다. 원래 원취당 위도순(願醉堂 魏道純, 1748~1816)성생이 자리를 잡았는데, 사랑채에는 마루의 당호인 ‘挹翠軒’과 함께 세거 인물의 아호이자 건물의 이름으로 불렸을 법한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람과 공간의 변천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록자료이다. 挹翠軒, 願醉(위도순선생), 素庵(위영우), 壺亭(위하조), 春坡(위관식), 梧軒․一梧軒․梧軒精舍(위계룡), 後溪(위질량), 壺谷(위일환), 觴山(위성탁, 현 소유자) 등이다. 또한 현재 건물의 중건 기록이 걸려 있다. 《願醉堂重建記》에 “…祠堂立柱戊午二月…寢室立柱戊午五月…外廊立柱癸亥二月…”의 기록이 있어 현 건물의 건립 내력과 족보를 알 수 있다.

 

오헌고택 소장 문적 가운데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이 「위씨세고」이다. 장흥위씨 시조 위경(魏鏡)선생으로부터 21세손인 위덕후(1556~1605) 선생 이하 위정명(廷鳴, 1589~1640), 위동현(東晛, 1628~1677), 위세호(世瑚, 1656~1688), 위명득(命得, 1685~1746), 위백양(伯陽, 1718~1752), 위도순(道純, 1748~1816), 위영우(榮禹, 1786~1857), 위하조(河祚, 1809~1881)선생에 이르는 9세의 문집이다. 9권 3책으로 위하조의 아들인 춘파 위관식(春坡 魏瓘植, 1843~1910)선생이 주도하여 유문을 모아 1902년 기우만선생의 서문, 1905년 정의림선생의 발문을 붙였다. 그 뒤 1933년에 위관식의 아들인 오헌 위계룡선생이 원취당 중건 기사 등을 부록으로 하여 간행하였다.

 

「위씨세고」는 조선 중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9대에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유례가 드문 사례이며 문중활동과 향촌운영은 물론 지역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그 후손(춘파 위관식선생, 오헌 위계룡, 후계 위질량, 호곡 위일환)들도 문집을 냈으니 13세가 이어지면서 문장이 난 것이다. 이 또한 어느 지역 못지 않게 중요한 기록의 보고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위씨세고는 조선중기~말기의 9세 문집으로 뒤로 이어지는 후손들의 문집까지 치면 13세 문집이 나온다. 1902년 11월에 송사 기우만이 쓴 『위씨세고』서문과 내용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 존재집과 존재전서

 

존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61호)에는 조선후기 실학자 존재 위백규선생(1727~1798) 당시의 서재(書齋)가 그대로 보존되어 온다. 존재의 저술과 소장 문적은 방촌유물전시관에 보존 전시되어 있고, 일부는 종손 어르신(위계환공)이 세상을 떠난 뒤 후손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존재 위백규선생의 저술이 모아진 것은 「존재집(존재유고)」과 「존재전서」이다. 존재집은 부록을 포함해 총 24권 12책이다. 권2~3의 상소와 만언봉사, 권 19의 정현신보(政絃新譜)는 당시 사회의 폐단과 이에 대한 개선책이다. 만언봉사는 1794년(정조 18년)에 올린 것이다. 위무사(慰撫使) 서영보(徐榮輔)의 천거로 정조대왕이 수령으로서 목민(牧民)의 뜻을 펴도록 위백규선생을 옥과현감에 제수하였는데 그는 경세(經世)의 뜻을 펴기에는 너무 노약한 70세의 몸이어서 자신의 경세사상을 만언봉사에 담아 정조대왕에게 올리고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정조대왕은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제수하였다. 만언봉사의 주된 내용은 학문증진, 인재등용, 향촌교화, 선비자세, 사치금지, 폐단혁파 등이다. 존재 위백규선생이 1794년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대한 정조대왕의 비답서 원본도 전래되고 있다.

 

 

 

존재 위백규가 1794년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대한 정조대왕의 비답서 원본(방촌유물전시관)

 

 

정현신보는 〈학교〉, 〈용인(用人)〉, 〈군현〉, 〈조운〉, 〈전결〉, 〈관직〉, 〈노비〉, 〈공물(貢物)〉 등 30여 가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각 제도의 본래의 취지와 연혁, 폐단이 생긴 배경과 갖가지 부작용의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으며 그 대책을 논하고 있어 저자의 실학사상과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존재집은 1875년(고종 12) 발간되었는데, 다암 위영복이 쓴 ‘존재집간행시말’은 조선시대 후기의 개인 문집 편찬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자료이다. 존재전서는 존재집에 들지 않은 글까지 포함하여 후대에 간행 하였다.

 

 

존재 위백규 문집은 1875년에 후손 위병석(魏炳錫), 위영복(魏榮馥) 등이 임헌회의 서문을 받아 24권 12책으로 간행였다. 만언봉사, 정현신보 등 실학저술과 함께 문학, 역사, 지리 등이 집대성되어 있다. 2013년 한국고전번역원과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공동으로 국역본이 발간되었다.

 

   

「지제지(支提誌)」는 천관산의 백과사전이라 할 향토지로 1780년(정조 3) 저술하였고 세계지리서인 환영지도 저술하였다. 「지제지」는 「지제산사적기」(1659년 천관사 開刊)가 발간 된 뒤 140년이 지나 위백규가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기존의 여러 자료와 구전을 두루 섭렵하고, 현지 답사를 통해 확인한 바를 기록한 것으로 천관산 및 천관사의 여러 불적을 조사하여 종합한 보고서라 하겠다. 특히 「지제지」는 존재가 평생을 살면서 보아오고 돌아 보았던 천관산을 중심으로 한 향토기록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끝에는 아들인 위도급(魏道及)이 쓴 서문과 96수의 시가 첨부되어 있다.

 

이밖에도 과거시험 답안지인 시권, 위백규 생원급제교지(백패), 위정렬의 무과급제 교지(홍패), 위백규 당대의 관리들의 근무성적 고과 평정서라 할 수 있는 포폄문서 등 다양하다.

 

교지와 공신녹권, 분재기- 국가제도와 향촌 사회경제자료

 

판서공파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는 판서공 위덕후의 장남 위정철(1583~1657)선생이 방촌으로 옮겨오면서 자리를 마련한 가옥을 중심으로 관련 된 인물의 고신 교지류, 분재기, 공신녹권 등이다.

 

위덕화선생의 교지는 11장으로 1588년 효력부위, 1593년 충무위 좌부장, 과의 교위, 언양현감, 수 군자감정 언양현감 등에 임명하는 교지가 주목된다. 이들 교지는 임진왜란기에 발급된 고문서로 국가 전란기의 제도사와 관직 운용의 실태, 조선 중기 무관의 출자를 알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위덕화 사후 추증된 교지가 4장이 있다. 위덕화선생의 아들인 위정철선생의 고신 교지류는 37장으로 1610년 분순부위 임명에서부터 1644년까지 발급된 교지이다. 그리고 위덕화의 손자인 위동전(1649~1713)선생의 교지는 9장(1689~1703 년간), 증손자인 위세황선생과 위세기선생의 교지 각 1장 등이다.

 

공신녹권은 3책으로 위덕화와 위정철의 선무원종공신, 호성원종공신, 진무원종공신녹권 등이다.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선무원종공신에게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공신 증서이다. 1604년의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1605년(선조 38) 4월 9,060인을 녹훈하였다. 선무원종공신녹권은 임진왜란 후 민심과 국정을 수습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담겨 있는 문서이다. 또한 공신들의 신분이나 직역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은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에 대한 포상 내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진무원종공신녹권에는 283개 직함에 총 6,205명(1등급은 642명, 2등급 1,088명, 3등급 4475명)이 수록되어 있다. 위씨가의 공신녹권은 향촌사회 세력의 입향과 성장과정에서 국가 충절 무훈이 그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분재기는 8장으로 1616년에서 1732년 사이 위덕화의 아들과 손자대에 작성된 것이다. 유력 성씨의 향촌 입향과 정착, 분가 등에 대한 향촌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중후기의 재산 상속제도와 향촌의 재산 소유 실태 등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1657년(효종 8년) 7월 21일에 위정철선생이 재산을 분배한 내용을 보면 제사에 관한 승중위(承重位)에 이어 승중자(承重子) 동전(東峑, 1602~1667), 장녀, 차녀, 차자(東星), 차자(東두), 말자(東倫) 등의 순으로 분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승중자인 위동전선생에게 전해진 가옥의 규모는 사당 3칸, 기와집 20칸, 대청 5칸(대지 1석 50부 1속)의 규모가 기록되고 있다. 이 가옥은 17세기 초반(1620년경)에 마련되지만, 뒤에 건물의 배치가 바뀌게 되고 사당(판서공파의 종택인 위성렬가옥의 사당) 만이 원형대로 전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의 가옥 건축사를 알 수 있는 기록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토지는 방촌리, 죽청리 등 현재의 장흥군 관산 지역을 비롯해 대흥(현 대덕읍), 건산(현 장흥읍) 등에도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분재기는 위정철공이 75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앞서 작성된 것이다. 재산의 주인이 살아있을 때 작성하여 재산을 자녀에게 넘겨주어 잘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전계유서(傳係遺書)라 쓰고 있다. 보통 한 장의 문서로 작성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최근에 전남대박물관에 같은 시기에 작성된 위정철분재기가 소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 바 있다. 2015년 6월 8일부터 9월 25일까지 박물관 소장 명품 특별전을 하면서 발간한 도록(<명품도록>)에 실렸다. 왜 같은 시기 분재 문서가 2장이 작성되면서 내용이 약간씩 다를까? 또 글씨를 쓴 사람도 다르다. 그러니 한 줄에 쓴 글자 수 등 양식도 좀 다르다. 앞으로도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소이이다.

 

 

 

분재기(1616년) - 위덕화선생의 처 안씨할머니가 자녀들에게 분재한 문서. 조선중기 임란 직후 이거 정착한 사족가문의 재산 사항과 상속, 분재 내용을 알 수 있다.

 

 

별신제 문서, 관혼상제 문서, 암각문 등 다양한 생활사 기록

 

장흥 방촌마을에는 이밖에도 다양한 민속생활사와 개인사자료가 남아 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 별신제와 장승(중요민속문화재 제 275호)앞에서 모시는 장승제 관련 참여인명과 제수 물품을 기록한 치부책, 문인들의 교류활동 결과물인 시회(詩會)기록, 관혼상제 의례절차를 기록한 문서, 그리고 개개인간 또는 문중활동을 알 수있 는 서찰(간독), 선조의 추숭활동과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도비와 행적비 등의 금석문 자료 등등. 방촌 사람이 남긴 문집도 20책이 넘는다.

 

아마도 한 마을에서 이처럼 많은 문집이 난 것도 드물 것이다. 서당에서 학습용으로 썼음직한 경서도 다수가 있다. 천자문 목판은 1665년(현종 6) 7월의 간기까지 있다. 그리고 신기마을 ‘삼괴정’ 명문 같은 암각문(三槐亭 淵齋宋先生命名 戊戌三月二十一日)’도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인데 고려시대 ‘여기정’이라 불렀다가 조선시대 말기에 연재 송병선생을 위시한 선비들이 천관산을 유람(1898년 3월 20일)하고 그 이튿날 방촌에 들려 명명하면서 새긴 것이다. 이 고인돌군은 노거수가 함께 있어 별신제의 신체로도 기능한다. 선사시대의 유적이 현재에까지 이어지면서 마을과 주민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서사(敍事, 스토리)로도 풀어 볼만하다.

 

그렇다면 기록물로 남겨진 자료만이 중요할까? 그렇지는 않다. 눈에 보이는 고문서나 전적, 금석문 등의 기록물 외에도 시간과 공간을 타고 내리면서 그것들이 있기까지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 구전자료도 아주 중요하다. 이젠 구전자료까지도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때이다.

 

 

 

춘파거사만사집(春坡居士輓詞集, 1910년) - 1910년 12월에 별세한 춘파 위관식(1843-1910)선생을 애도하며 지은 만사(輓詞)와 제문(祭文) 등을 모은 책

 

맹자강설(孟子講說, 1887년) - 위계룡선생이 1887년 4월에 등출(謄出)한『맹자석의(孟

 

子釋疑)』,『 맹자석의(孟子釋義)』등 맹자 주석서 

 

천관산이 내다 보이는 효열부비. 곳곳의 비석도 중요한 기록유산이다 

 

호남 실학 4대가 존재 위백규선생 서재(존재고택)(사진 정명철)

 

 

 

편액 기문 주련 등 현판도 중요기록이다. 연구자가 끊이지 않는다.(오헌고택)

 

방촌리 별신제 축문

 

오헌고택 사랑채 오헌정사 편액, 방안의 액자 너머로 안채의 문이 보인다. 구분된 공간이지만 소통하고 있다.

 

 

 

방촌리 장승제

 

 

* 출전 : 국가기록원, <기록인(IN)< 22/2013년 3월호,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 - 장흥 방촌마을

 

 

 

 

기고201303기록인22기록보고장흥방촌[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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