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10 - 南道, 그 땅이 어디메뇨, 1996

향토학인 2014. 11. 30. 02:50

인지의 즐거움 010

     (19960601)

 

 

南道, 그 땅이 어디메뇨

-역사와 예술의 향내내며 숨쉬는 남도-

 

  김희태

 

 애정어린 눈으로 고향을 보자

 

누군들 자기가 사는 지역이 잘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찾아들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알리고 어느 곳을 찾아보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왠지 망설여진다. 그러나 조그만 관심을 가져 본다면 발길가는 곳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숨겨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볼수 있느냐가 아닐까?

 

그런데 지금의 우리사회는 ‘애정’으로 고향을 바라볼만한 여유가 없다. 산업화 도시화라는 틈새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살기도 바쁜 세상 탓도 있으려니와 ‘지역불균형’이라는 우리세대 가장 큰 구조적 모순속에서 어쩌면 고향을 장농속에 감춰버렸으면 하는 심정도 없지는 않을 게다.

 

그러면 우리 고향 남도는 어떤곳인가?

‘남도’라는 단어는 전근대사회에서는 하삼도, 즉 충청 전라 경상 지역을 말하는 의미도 있었고, 그저 남녘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글에서는 전남지방을 대상으로 정리코자 한다.

 

 

듣고만 있어도 어깨춤이 절로난다

 

몇 년전 전국민의 가슴을 울렸던 영화가 있었다. ‘서편제’였다. 맨날 보는 시골의 한적한 풍경과 흔히 듣는 소리가락을 배경으로 한 소리꾼가족의 애환을 담은 것이다. 너무 평범한 주제요, 내용인 듯 싶었다. 그런데 국산영화사상 여러 가지 기록을 수립한 이 영화의 산실 자체가 바로 남도였다.

원작자인 이청준선생은 장흥, 제작자인 임권택감독은 장성, 주인공인 오정해는 목포, 김명곤은 전주, 촬영장소는 해남 대흥사와 고창 선운사 보성 강진 완도 등지.

 

자연환경이 문화예술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기후가 다사롭고 토질이 기름져 생산물이 넉넉한 환경에 사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양성적이어서 명랑하고 낙천적인 경향이 짙다. 이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은 신바람나는 신명으로 이어져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남도 풍물은 어깨춤이 절로 난다. 고싸움놀이 역시 역동적이다. 신명과 흥겨움 그대로이다. 그속에서 자란 남도 사람들은 자연 예술적 기질을 타고 날 수밖에 없었고 그 “끼”들이 자연스레 종합된 것이 ‘서편제’가 아닐까?

 

수려한 산천 풍부한 문화유산

 

이처럼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문화유산은 전남 제1의 자원이다.

남도의 온 산야를 멧부리 아래 둔 남녘의 지붕,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공원, 백두대간이 멈춘 곳, 지리산! 끝없이 일렁거리는 구름바다를 보았는가?

 

내장산(백양사지구)과 월출산 국립공원, 추월산과 무등산, 천관산과 팔영산, 조계산과 대둔산, 홍도와 백도의 절경, 다도해와 한려해상공원, 완도의 백사장, 회진의 바다낚시터, 섬진강과 영산강, 그리고 탐진강, 주암호와 담양호.

 

서남해의 바닷길과 내륙의 연안수로는 전남지역의 고대문화가 성장하는 배경이자 문화전파 루트였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지석묘)과 영산강유역의 옹관묘는 우리나라의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뗄 수 없는 유적이다. 동양3국의 바다를 제패한 장보고와 완도의 청해진유적, 강진의 고려청자도요지, 진도의 삼별초 항쟁, 임진왜란기의 수군의 승첩과 군사 시설,

 

줄다리기와 강강술래, 판소리와 육자배기와 신명나는 쇠가락

개다리소반과 참빗과 궁구름옥성기, 그리고 돌실나이,

굴비와 홍탁과 애저, 진석화젓과 고들빼기

낙안성 민속마을과 전통적인 촌락의 모습

4사자석탑과 천불 천탑, 수선사와 백련사

시가문학과 남도화, 그리고 호남 실학과 다도

의병과 동학, 항일민족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이처럼 얼른 나열해도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 고장임을 알 수 있다. 민족문화의 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치진 않을 게다. 이제 몇가지 간추려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자.

 

 

"전라도도 경상도도 우리 땅이요"

 

남도는 유독 충절정신이 강한 곳이다. ‘죽어야만 의병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군인들처럼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집집마다 골골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속에 온존된 것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그 가르침의 요체는 충효와 인의예지신이었지만, 한마디로 옳지 않은 일(不義)에는 굽히지마라는 것이었다. 왜적이 나라를 침범했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다. 붓을 꺽어두고 무기를 들고 진충보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초개같이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붓과 정신에서 나온 것이지 칼과 건장한 몸매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이었다는 임진왜란을 맞아서 남도에서는 김천일, 최경회, 고경명, 김덕령 등 많은 문인들이 의병을 일으켜 가동과 노비와 주민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삼도수군을 통제하던 이순신장군 같은 이는 ‘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표현했다. 호남 곡창과 충절정신을 말함이었으리라.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의공 최경회란 분이 있다. 화순출신이다. 여러 곳에서 활약하다 진주성의 급박함을 알고 진주로 출진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곳에서 방어해도 충분한데 멀리 진주까지 구원을 가야만하는 것이냐며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최경회의병장은 “경상도도 우리 땅이요. 전라도도 우리땅인데 급박함을 알고서도 죽음이 두려워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하며 진주성전투에 나아갔고, 관군마져 성을 버린 위급상황에서도 끝까지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지금부터 403년전인 1593년 6월 29일의 일이다.이같은 정신은 그의 보살핌을 받던 장수출신 의암 주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물에 뛰어들었던 그 정신과 다를바 없다.

 

옳지 않은 것에 굽히지마라는 그 가르침은 동학농민혁명때나 대한제국기 의병전쟁때,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이나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으로 이어졌고 광주민주항쟁으로도 계승된다.

 

 

다도해의 황금 뱃길과 물목

 

신라시대에 동방무역의 패권기지를 건설했던 장보고가 경주로 오갈때는 어느 길을 이용했을까? 바로 바닷길이었다. 섬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금호도에는 광양제철이 들어섰다. 동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노량해협이고 서쪽으로 가면 광양만이다. 그런데 이곳은 해룡창이라는 고려시대 이래 전라도 동북부 물산 보관소가 있던 곳이다. 그만큼 중요한 물목이라는 뜻이다. 그 지리적 이점이 임진정유란시에 왜교성전투의 공방을 치루었고, 이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임진 7년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여수 만성리해수욕장 곁의 백도해역에서 임란 때의 총통이 무더기로 출토된 것이나, 전라좌수영의 본부로서 여수와 진남관, 의승수군의 주둔지 흥국사 등도 결국은 해로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준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거문도와 완도 일원의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고흥 벌교 낙안의 길목은 “태백산맥”의 현장이기도 하다.

‘닐니리 닐니리’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이순신의 백의 종군과 회령진성, “서편제”와 소설 “동학제”의 현장, 도암만의 강진청자와 완도 청해진, 해남 땅끝, 진도 회동의 신비의 바닷길, 울돌목과 명량대첩, 고하도와 유달산....

바닷길을 통해서 보아도 빼어난 경관과 문화자원은 셀 수 없다.

 

 

정겨운 고향으로 오세요

 

사회가 발전할수록 정겨움과 넉넉함이 사라져가는 것은 사실이다.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의 황폐함을 보상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발에 밀려 고향의 옛모습들도 이제는 볼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 남도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고향이 예전 모습과 생활방식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 있다. 바로 순천의 ‘낙안읍성 역사마을’이다. 이태전부터 음식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 낙안은 백제시대 이래 한말까지 독립된 행정구역이 있던 곳이다. 본터 자리는 읍성 건너편의 벌교 ‘고읍리’이다. 조선초기에 현위치로 자리 잡는데 원래의 터는 옛날 읍터라는 뜻으로 ‘고읍리’라 이름했다. 이 고읍리는 소설 태백산맥의 현장이기도 하다. 백제 이래 1천 3백여년동안 한개의 고을이 자리할만큼 입지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이곳을 배경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척추역할을 하는 백두대간의 한줄기인 호남정맥을 타고 자연스레 지리산과 연결되기 때문에 이 소설, 아니 우리의 현대사는 ‘고읍’에서 시작해 ‘지리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낙안(樂安)은 조선시대에 자리잡은 이래 당시 방어와 권위의 상징이었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안의 관청건물이나 민중들이 살았던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오기 때문에 100억이 넘는 예산을 투자해 완벽한 옛고향으로 되돌려 놓았다. 콩밭메는 어머니, 군불 지피는 외할머니도 계신다. 다사로움과 정겨움이 넘친다.

 

이곳의 특산인 더덕술(沙蔘酒)이나 동동주 한잔을 마시면서, 육자배기를 흥거리면서, 동구밖에서 손을 흔드시던 어머니를 그리는 정취를 맛보는 것이 어떨까? 

   

*南道, 그 땅이 어듸메뇨-역사와 예술의 향내내며 숨쉬는 남도-, <계간 호남평야> 1996년 여름호(통권 2호), 1996.6.1. 78~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