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014
‘모년 모월에 향을 묻었다[埋香]’고 새겨진 선돌
-1656년 미수 허목의 월악기(月嶽記) ; 刻曰某年某月埋香-
김희태
구림(鳩林)에도 입석이 있고 서호(西湖)의 석포(石浦)에도 입석이 있는데, ‘모년 모월에 향(香)을 묻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입석의 연월 글자는 마멸되어 볼 수 없었다.(鳩林 又有立石 西湖石浦 又有立石 刻曰某年某月埋香 其年月字 漫滅不可見)[허목, 〈월악기(月嶽記)〉]
한 줄 글에, 한마디 표기에 늘 꽂히곤 한다. 이번에도 또한 그렇다. 향을 묻었다는 글씨가 새겨진 선돌. 매향(埋香) 암각문. 문장상으로 보면 구림과 석포에 각각 ‘매향운운’의 글이 새겨진 선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에도 보았던 듯 한데 그때는 지나쳤었나?
1656년(조선 효종 7) 9월, 월출산에 올랐던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 월출산 산행기인 〈월악기(月嶽記)〉를 남긴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화보(和甫)·문보(文父), 호는 미수·대령노인(臺嶺老人)이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냈다. 아버지는 현감 허교(喬)이며, 어머니는 백호 임제(林悌)의 딸이다. 남인으로 17세기 후반 2차례의 예송(禮訟)을 이끌었으며 군주권 강화를 통한 정치·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학자로서도 거질의 문집을 남겼다. 글씨로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전서 작품이 보물로 지정(제592호)될 정도이니, 유독 비석글씨는 눈여겨 봤으리라.
허미수는 도갑사 입구에서 국장생, 황장생 명문 석표를 본다. 그리고 구림과 석포에 입석이 있고 매향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다 읽을 수 없다고 했다. 〈월악기〉의 끝에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저서인 《기언(記言)》 제28권에 실렸다. 한국고전번역원 간행 한국문집총간 98집. 360여년 전에, 환갑에 이른 그 유명한 학자 미수선생도 못 읽어 냈으니, 지금인들 읽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찾아야 한다.
매향(埋香)이란 향을 오랫동안 묻어 침향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불교에서는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침향을 으뜸가는 향으로 삼고 있는데, 고려 후기~조선 전기 당대인들은 보통 향을 오랫동안 땅에 묻어 두면 더욱 단단해지고 굳어져서 물에 가라앉는 침향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 매향의 내용을 적어 놓는데 비석형태이거나 자연석 암반을 활용한다.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염원하면서 향을 묻고 세운 기록인 셈이다.
이와 같이 매향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근거한 신앙형태로, 향을 묻는 것을 매개체로 하여 발원자가 미륵불과 연결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즉, 미륵불이 용화세계(龍華世界)에서 성불하여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그 나라에 태어나서 미륵불의 교화를 받아 미륵의 정토에서 살겠다는 소원을 담고 있으며, 이와 같은 소원을 기록한 것이 매향비이다.
지금까지 15곳쯤이 발견되었는데 그 절반이상이 전남지역에 있다. 발견된 매향비는 모두 바닷물이 유입하는 내만(內灣)이나 첨입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불가(佛家)에 전하고 있는 매향의 최적지가 산곡수(山谷水)와 해수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암 지역에서 확인된 매향 관련 암각문(비석)은 4건이다.
○ 영암 정원명(貞元銘) 석비는 입석형으로 전남 최고(最古) 석비이다. 정확한 판독과 성격규명은 안되었지만, 매향 또는 불교 관련 기록으로 보고 있다. 국가에 올리는 공물(貢物, 調)에 관계된 해석을 하는 전혀 다른 견해도 발표된 바 있다.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 정원2), 42자, 전남 문화재자료 제181호(1990.12.05)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 458 소재.
○ 영암 엄길리(奄吉里) 암각 매향명(岩刻 埋香銘) 은 철암산 자연 암반에 새긴 글이다. 고려 충혜왕 5년(1344), 18행 129자, 연대를 1404년(조선 태종 4)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보물 제1308호[2001.04.17]이다.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 산85 소재.
○ 영암 채지리(採芝里) 매향비는 입석형이다. 조선 세종 12년(1430, 선덕5)에 4행 37자를 새겼다. 전남문화재자료 제189호[ 1992.11.30]이다. 영암군 미암면 비래길 17-5 (채지리) 소재. 내용은 ‘宣德五年十二月十九日/[圮]施主[仍]所 香結兄弟/等伊珎浦午地六里間/沈香埋置非 石’
○ 영암 남산리 마봉고분 정상에 있는 석비 또한 입석형이다. 성격 규명은 안되었지만, 매향기록으로 보고 있다. 고분군은 전남 문화재자료 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암군 미암면 남산리 산 5-39 소재.
먼저, 허미수가 보았다는 서호 석포(西湖 石浦)는 어디일까.
지금의 영암군 학산면(鶴山面) 은곡리(隱谷里) 석포(石浦, 돌캐)마을이 있다. ‘석포’는 돌아가는 곳에 있는 나루를 말하는 것으로 ‘돌+개>돌개>돌캐’로 되면서 ‘돌石, 개浦’를 취하여 ‘石浦’라 한 것이다. 《호구총수》(1789)에 ‘昆二始面 石浦’가 나오며, 《조선지지자료》에 ‘石浦’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에 昆二始面 隱谷里(銀谷)·尼丘山·石浦里가 은곡리로 통폐합되었다. 이 곤이시면은 1932년에 학산면으로 개칭된다.
한편, 매향비가 확인된 미암면의 채지리와 남산리는 조선시대 후기에는 곤일시면(昆一始面)에 속했고, 1914년에 곤일시면 남산리(昆一始面 永善里 夫巖里 南山里 春洞里 일부가 합해짐), 채지리(昆一始面 望月亭 飛來山 花岩里 竹洞 新基里 地宗里가 합해짐)로 합해졌다. 1928년에 곤일시면(昆一始面)은 미암면(美岩面)으로 개칭된다. 행정지명이나 땅이름의 변천에 대해서는 김정호선생의 《지방연혁연구-전남을 중심으로-》(광주일보출판국, 1988), 윤여정의 《한국의 행정지명1-전남·광주편-》(향지사, 2009), 김경수의 《영산강의 나루터》(광주민속박물관, 2012)가 참고가 된다.
기존에 확인된 2종의 매향비가 학산면 은곡리 석포와 이웃한 미암면이라는 점에서 미수 허목이 보았다는 ‘서호 석포 매향명 입석’이 현재의 미암면 소재 2종 가운데 하나인지, 아니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 인근, 매곡이나 통샘이 있다는 매월리 등도 눈여겨 볼만하다. 매곡(梅谷)의 ‘梅’는 매향(埋香)과 관련된 ‘埋’가 전와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순천 해룡면 신대리 향매(香梅)마을이 있는데 《호구총수》(1789)에 ‘龍頭面 香埋地閭’가 있고, 《조선왕조실록》에 ‘順天府 海農倉近地 有沈香相似木(듣자니 순천부 해농창 부근에 침향과 비슷한 나무가 있는데)’ 운운의 기록(《세조실록》 제44권, 세조 13년[1467] 정해 12월 임인일)이 있다. 용두면은 1914년에 해촌면과 합해져 해룡면이 된다. 1995년~1996년 사이에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한바 있다. 석재로 결구된 신대리 봉서마을 우물 하단의 석벽에서 명문글씨를 보았다는 주민들의 전언을 듣고 동네 샘 두 곳의 물을 퍼내고 한곳에서는 탁본(1996.10.20, 명문 : 乾隆/五十/九年/正月/二十/四日/上樑, 탁본 조원래교수 최인선교수 김희태 외)까지 한바 있으나, ‘매향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구전 자료는 매향과 관련된 내용도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시 순천 향매(香梅)마을을 주민들은 마을을 ‘상무지’ 또는 ‘산모지’라고 부르는데, 마을 아주머니 한분은 ‘상무지는 상놈들이 살았던 곳’, 마을 유지 한분은 ‘상무지는 常茂地로 항상 무성하게 마을 번성하라’는 의미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향(香)‘을 ‘상’으로 발음하는 지역 특성이 있어, ‘상무지’는 ‘향무지’, 즉 ‘향나무를 묻은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호구총수》의 ‘향매지(香埋地閭)’와도 연결된다. 영암과 함께 순천의 매향자료도 찾기 위해 지혜가 모아져야 한다.
허미수의 글에 언급된, 그가 보았다는 “구림의 매향” 현장도 찾아야 한다. 정원명 석비가 매향 관련으로 보기도 하나, 앞 부분 “정원이년(貞元二年, 786년)”은 지금도 뚜렷이 보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현장을 본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전에 보았던 기록이라 했다. 언제인가. 광주민학회에서 월출산 바위문화 조사를 하여 학술보고서를 간행 한바 있다. 1988년. 《월출산-바위문화조사-》. 광주민학회 조사보고서 제1책. 395쪽. 전라남도와 영암문화원 지원. 그때 주말이면 월출산 곳곳을 무던히도 다녔다. 그리고 역사편의 초고를 정리하면서 월출산에 관한 문헌 기록을 뒤지고 또 뒤졌다. 그때는 ‘막고 품던’ 시절이라 일일이 하나씩 확인해야 해서, 이곳 저곳의 도서관과 자료실, 서가를 뒤지고 또 뒤져서. 편집 교열까지 맡게 되었고. 그때 함께 하면서 가르침을 주셨던 향토학계의 어른들. 혜운 박선홍님, 학고 김정호님, 우정 이강재님(1931~2011), 지허 성춘경님, 그리고 바로 웃세대 해산 강현구형님(1952~2013).
다시 보게 된 사연. 해산형과의 인연이었는지 그 뒤로 나무와 숲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얼마전에는 ‘남도 역사속의 나무’라는 글(《대동문화》 83호. 2014년 7∙8월호)을 쓰게 되었다. 개설로 쓸까, 각론으로 쓸까 하다가, 고려시대 천관산 척촉(躑躅, 철쭉)의 주장(拄杖) 이야기를 실마리로 하였다. 그러고 나서 더 자료를 찾다가 허미수가 월출산에 올랐을 때 어떤 스님이 척촉의 주장을 선사하니 사례로 시를 지어 준다는 기록을 보게 되었다. 정명국사 천인의 천관산 척촉 주장이 1240년, 미수 허목의 월출산 철쭉 지팡이는 1656년의 일이니 420여년을 넘나든다. 다만 한가지, ‘구정봉’이 ‘월출산 구정봉’인지는 확인이 필요할듯하다. 남해를 유람한 뒤 남긴 미수의 글(泛海錄)에도 ‘구정봉’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찾아 본 것들 가운데 이 보다 더 눈에 띠는 두가지 기록. 〈월악기〉의 끝에 있는. 그 하나는 구림과 석포의 매향명문 입석. 다른 하나는 국장생(國長生)과 황장생(皇長生) 명문 기록과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이 호남 지역을 순찰할 적의 사연. 해산형이 ‘국장생’ 명문 판독을 하여 남도불교문화연구회 학술지 창간호(1991)에 실었던지라 그 인연인 듯 싶다.
기록은 기록이지만 ‘미완의 기록이랄까? 허미수가 구림과 석포에 매향 입석이 보았다는 것을 문집에 남겼으니 분명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 현장은 아직 모르고, 찾아 나서야 하니 ‘미완’이다.
영암 곤이시면(현 학산면) 석포일대 1918년 지형도(《영산강의 나루터》에서 인용)
[추기]
* 2014년 7월 16일 초고를 작성하고 12월에 올린 뒤 2015년 4월 3일(금) 영암 석포 일원을 답사하면서 입지, 경관을 살폈다. 김경옥(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송태갑(영암군청 학예사)이 함께 했다. ‘務安 南村 埋香碑’의 판독과 해석(정동락, <藏書閣> 29, 2013) 논문을 제공하였다. 매월리 매곡마을은 혼자 돌아 보았다.
* 2015년 4월 19(일) 윤여정(나주, 전라남도 지명위원)선생 이 땅이름[지명] 관련 의견을 보내왔다. "석포"란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 하나는 물이 돌아나가는 곳 즉 조수가 밀려왔다 끝이 나서 돌아가는 곳에 있는 나루, 다른 하나는 물이 회전하여 돌아가는 곳에 있는 나루로 볼 수 있다는 것.
조선후기 관찬 기록으로 전국 군현의 면별로 마을 이름과 호구수를 정리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관찬)(영암)에는 세 개의 석포 지명이 보인다.
- 곤일시면 석포 : 현 미암면 남산리 석포마을이다. 영암호 상류에 있는 마을로 채지리와도 가깝고 인근에 선황산이 있다.
- 곤일시면 신기석포 : 현 미암면 채지리 신기마을이다. 채지리 산 203번지에 매향비가 있는데 연월 글자가 뚜렷하니 미수선생이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 곤이시면 석포 : 현 학산면 은곡리 석포마을이다. 영산강 지류인 망월천 입구에 형성된 마을로 물길이 도는 곳이다.
영산강변에 바로 위치한 매월리도 눈여겨 볼 만하다. 20세기 초반이 자연 지명를 조사 정리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국립중앙도서관 古2703-1-116, 1911년추정) 영암군 곤이시면 편에 포구명으로 "석포"가 있는데, 위치를 "美橋里 下"라 되어 있다. 이 "미교"는 "미다리"라고도 불리는데 밑+들>밑들>미들>미덜>미달>미달이>미다리로 되었고 한자는 음대로 미교라 한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묻+들>묻들>믿들>믿덜>미덜>미교로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본다. 묻는다[埋]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조선지지자료』에 미교점과 주룡점이라는 주막이 나오는데, 모두 미교 下 라 되어 있다. 영산강 포구라는 점에서 주목하며 모두 매월리 권역에 속한다. 현재 영산강을 횡단하는 무영대교가 놓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2016.3.28 수정)
* 2020년 8월 7일, 여러 자료를 다시 보다가, 서호 석포(西湖 石浦)가 아닌 서호 우포(西湖 右浦) 기록을 보았다. 산수유기 기록인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의 월출산조. 연경재 성해응(硏經齋 成海應, 1760∼1839)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51 산수기(山水記)에 실렸다. 미수 허목의 월악기(월출산기)와 유사한 내용인데 이 기록에서는 "우포(右浦)"로 표기가 나온다. 1656년 허미수의 <월악>보다 150여년 뒤의 기록이다. "서호 석포"던 "서호 우포"던 또 다시 길을 나서야 겠다.
"구림과 서호 우포에 입석이 있는데 모두 모년 모월에 향(香)을 묻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입석의 연월 글자는 마멸되어 볼 수 없었다.( 其他鳩林西湖右浦。皆立石刻某年某月埋香。其年月字漫滅不可見。"
서호 우포(西湖右浦) 기록(동국명산기, 성해응, <연경재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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