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15
광양 망덕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영화 동주”
김희태
영화 “동주”가 회자되고 있다. 저예산 흑백영화. 시인 윤동주(1917∼1945). 덜 알려졌던 송몽규(1917∼1945). 항일독립운동. 제작사실이 알려질 때부터 영화관람은 물론 전남과 연관된 사실도 알려야겠다는 생각. 12월에 선보인 티저 예고편도 봐 두었다. 1분 30초. 개봉날인 2월 17일부터 여러 가지 기사가 뜬다. 예상밖 흥행이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윤동주와 송몽규, 그이들을 분한 강하늘과 박정민, 감독 이준익. 어느 하나, 전남과는 관련없어 보인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1917.12.30~1945.02.16)의 오늘-한국 현대문학사의 큰별-이 있게 한데는 전남과의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의 땅 전남이 있었기에, 윤동주시인의 문학생명도 있을 수 있었다면 믿어질까? 사연인즉 이렇다. 광양 망덕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에 얽힌 이야기다.
2005년 3월 2일 수요일 점심 무렵. 한 통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그 내용을 간추리자면 “광양 망덕의 정병욱가옥은 지금은 소유주가 바뀌었지만 윤동주 시인의 친필유고가 전해 질 수 있었던 역사성이 있으니 함께 보존해보자는 것.” 보내온 사람은 성균관대 건축과 윤인석교수. 윤동주선생의 동생 윤일주교수(1927∼1985)의 아들. 1,900자 쯤의 글이었는데, 한편으로 감명이었고, 한편으로는 충격이었다. 충격이란 꽤나 지역을 훑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처음 들었다는 것. 전자우편으로 온 글도 습관적으로 다운받아 파일로 관리하곤 했었는데, 다행히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다.
윤교수와는 “2004년 8월” 인연이 되었는데,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주관의 동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 평가회의 때 만난 것. 여기서부터 풀어야겠다. 그 회의란 2004년 8월 9일, 정부대전청사 207호 회의실. “전남지역 근대문화유산 조사결과 평가회의”. 전남도에서 지역 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조사 완료 뒤 조사위원들의 자문을 거쳐 등록문화재 검토 1차 대상으로 41개소를 문화재청에 추천했다. 이들에 대하여 문화재청에서는 관계 전문가에게 조사 의뢰를 하였다. 조사는 3인 이상이 하게 되어 있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직원이 함께 조사 하였다. 2004년 5월~7월이었다. 당시 조사한 전문가와 중앙문화재위원 등이 참여한 평가회의를 개최했는데 전문가로서 윤교수가 참여한 것.
모두 39개소를 대상으로 평가하고 몇 개소는 정밀조사를 나에게 의뢰해 뒤에 보고서를 냈는데, 윤교수에게도 보냈다. 그해 말에 모두 18개소의 등록문화재가 지정되었다. 2004년 초에 소록도 건조물 10개소가 되었으니 이 해가 전남에 등록문화재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게 된 기념비적인 해였던가 보다. 그 몇 년 뒤 서울 소재 근대 유물들에 대해 지정을 하면서 수치상 1위는 물려 줬지만, 건조물로서의 등록문화재 지정 순위는 전남이 1위, 단연코 앞선다.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경과를 따로 적을 것이다.
다시 “망덕”으로 돌아가 보자. 2004년 8월 회의를 마치고 12월에 18개소가 지정되었다. 그동안 윤교수와 몇차례 전자우편이 오갔다. 근대유산 정밀조사 내용 등. 그러기를 몇 달. 해가 바뀌어 2005년 3월 짧지만 강한 뜻을 담고 있는 글이 온 것이다. 마지막 문장이 아니더라도 내가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글이었다.
“꼭 문화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보다 없어진 후에 후회하느니 미리 점검해 보자는 뜻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바로 광양으로 내달렸다. 망덕 포구. 허스름한 일본식 가옥. 저곳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 주변에는 도로를 손 보려는 듯 어수선. 이곳 저곳 다니면서 살펴보고 묻고, 당시 소유주도 만나고, 서류도 발급 받았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제적등본은 받을 수 있었다. 토지대장, 건축물대장, 등기부 등본, 관련자들의 제적등본, 호적등본 따위. 관련 인사들과 통화도 했다. 정병욱교수의 동생 정병완님(수원) 등. 물론 윤동주, 이양하, 정병욱 관련 인물의 행적도 살폈다. 윤동주의 판결문이나 시집, 시비 건립 등에 대해서도.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윤동주 평전을 집필한 송우혜작가는 송몽규선생의 조카.
요약하자면 이렇다. 윤동주시인은 1941년께 시집을 발간하고자 했으나 간행하지 못하고 3부의 친필 초고를 작성한다. 본인과 은사인 이양하선생(1904∼1963), 연희전문 후배이자 하숙을 함께하면 생활하던 정병욱(1922∼1982) 소장본 등. 정병욱은 1944년께 징병가면서 광양 망덕의 어머님께 보관을 의뢰한다. ‘좋은날(광복)이 와도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교수들께 전해달라’는 말과 함께. 정교수의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마루 밑에 고이 숨겼고, 정병욱은 학병에서 돌아오고, 광복이 되고, 광양 망덕에서 보존되었던 유고로 윤동주시인 시집은 출판이 되기에 이른 것. 초판. 1948년 정음사간행.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시인은 일본에서 순국하고 이양하본은 흩어지고 만다. 유일본이 된 정병욱 소장본이 있었기에 윤동주문학의 생명력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1920년대 지어진 일본식 점포 주택. 1927년께부터 운영한 것으로 전하는 양조장 주인집. 남해에서 살던 정씨일가가 광양으로 이주해 살았던 것. 양조장 시설들은 다 헐리고 이 주택만 남았다. 외부에서는 점포형, 안으로 들어서면 살림집. 그 안방으로 통하는 마루 밑에 보관했던 것.
조사 내용을 몇 차례 깁고 보태 작성하고 이를 광양시청에 보냈다. 마침 문화재청에서 근대인물 관련 근대문화유산 목록자료를 제출하도록 시달한 바 있어 이에 포함시키도록 하여 광양시에 제출받아 문화재청으로 보냈다. 명칭은 광양 망덕리 윤동주시인 친필유고본 전래가옥-고전문학자 정병욱교수 거주지-.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1210(2006.5.2)/전라남도 문화예술과-6193(2006.6.7)] 방송보도도 이어 졌다.[ 2006.08.15(KBS[순천] 21시 뉴스)]
다시 등록문화재 지정신청서를 광양시에서 제출하도록하여 전남도를 거쳐 문화재청에 보냈다. 전문가 조사와 중앙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등록되기에 이른다.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41호. 명칭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1동 1층 연면적 110.4㎡. 근현대 역사인물 두명의 인명이 들어간 문화재는 처음이리라.
다만, 광양이라는 소재지 행정지명이 안들어 간 것은 좀 서운하다. 최근 들어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명칭부여기준을 정했는데 소재지 시군 행정지명이 들어가도록 규정하고 있으니 “광양”이 들어가도록 명칭 변경을 추진해야겠다. 그때 못한 아쉬운 것 또 하나. 친필유고본과 전래가옥을 함께 묶어 지정했더라면... 그런 논의도 있었지만, 소재지, 소유자가 다른 점도 있고....
2011년 12월 23일 오전 7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 교정에 들어 섰다. 윤동주시인이 수학한 곳. 동행한 박맹수교수(원광대, 당시 교토대 교환교수)의 안내로 쉬이 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선생 시비.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7일 건립. ‘서시(序詩)’가 적혀 있다.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에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의 생애와 시의 전모를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자 최후의 걸작. 광복 뒤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 광양 망덕에서 보존된 친필 유고본에 실려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 교토에 갔던 것은 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1929년생) 명예교수가 새로 개관할 전라남도립도서관에 소장 도서를 기증키로 하여 협의차 방문. 박맹수교수의 주선으로 한중일 삼국의 근대역사 서적 1만 5천권 기증. 사흘간의 짧은 일정(12.21~23)에도 나카츠카 교수의 자택은 물론 나라여자대학 도서관과 도다이지(東大寺) 등 문화유산도 들렀다.
마지막날 저녁 정리하던차, 교토 시내에서 집어 든 관광안내지도에서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안 것. 숙소와 3키로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고민이다. 내일 아침 8시면 공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래도 안 볼 수는 없지. 아침일찍 택시로 다녀와야지. 박교수에게 윤동주시집과 광양 망덕의 사연을 말했더니, 아침에 일찍 올테니 함께 가자는 것이다. 고향 전남과의 사연은 이제사 들었노라고. 그 때 도서 기증협의차 함께 간 동료(박순임, 오정환)에게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아침 출발 시간에 좀 늦었던 사연을...
도시샤 대학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함께 있다. 또 하나, 윤동주선생이 살았던 교토의 아파트 부지, 현 교토 조형예술대학의 캠퍼스 안에 2006년 6월 23일 세워졌다는 시비, “윤동주 유혼의 비(尹東柱 留魂之碑)”는 다음을 기약하였다.
2016년 2월 17일. ‘영화 동주’가 첫 상영되었다. 윤동주시인이 순국한 16일 특별시사회에 이어 다음 날 개봉. 72주년. 말하자면 파잣날(罷祭日)이다. 일제강점기 고종사촌간 윤동주와 송몽규의 독립운동 영화. 광양 망덕의 사연과 함께 홍보할 필요도 있을 터. 또 서너줄 적으면서 몇마디 말을 보태 보았다. 작은영화관 2호관 개관날이다. 2월 24일. 역사를 공부하는 학인으로서 다른 내심(內心)도 있다.
○ 작은영화관 1호(장흥, 2015.10.19), 2호(고흥, 2016. 2.24) 개관 계기, 영화산업 저변확대
○ 역사인물(윤동주)과 연고자원(윤동주유고 보존 정병옥가옥) 연계로 지역문화 홍보
○ 삼일절 계기로 항일 독립 정신 고양과 계승을 위한 독립 운동 영화 ‘동주’ 관람
전국 250여개 개봉관이라는데 전남에서는 목포, 여수, 순천과 함께 구례 자연드림과 장흥 정남진시네마(작은영화관 1호)가 개봉관에 들었다. 구례나 장흥으로 “동주” 나들이를 하면 어떨까?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2016.2.24)
광양 윤동주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 전경(2005)
집안 마루밑에 윤동주친필본을 고이 보관했다.
일본 도시샤(同志社)대 윤동주시비(20111223)
윤동주시비와 정지용시비(일본 교토 도시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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