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06 - 1754년의 전통의서, 한방열(韓昉烈)의 <매정보감(梅亭寶鑑)>

향토학인 2014. 3. 5. 13:25

인지의 즐거움006

 

 

 

1754년의 전통의서, 한방열(韓昉烈)의 <매정보감(梅亭寶鑑)>

-서문을 쓴 노익원, 1798년 광주목 과거시험에 들다-

 

 

 

김희태

 

 

 

조선시대 인물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남원 유학 서하(西河) 노익원(盧翼遠)이 서문을 쓴 <매정보감(梅亭寶鑑)>[국립중앙도서관 BA7671-91-26]을 찾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두진(痘疹)에 관한 전통의학 문헌으로 경험방까지 곁들인 필사본이다. 책의 내용을 넘겨 보니 실제 저자는 한방열(韓昉烈)로 확인된다. 발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익원을 찾게 된 것은 1798년 광주목에서 실시된 과거 시험에 참여해 합격하거나 일정 점수를 받은 인물 69인 개개인 자료를 수집하던 터였다. 당시 과거 시험은 시(詩)·부(賦)·의(義)·전(箋)·책(策) 다섯 분야 가운데 세 분야를 응시토록 하였는데, 노익원은 유학의 직역으로 참여해 부(次上), 의(草三中)와 책(草三下)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특히 의와 책은 초서로 제출한다.

 

 

그리고 노익원은 1798년(정조 22) 11월의 구언 전지에 따라 농서를 올린 40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정조실록>에 나온다. 이듬해 5월에 노익원이 올린 농서를 내각 농서에 편입(<일성록>)토록 한다. 의서(醫書)의 서문을 쓴 이(노익원)가 지은 농서(農書). 전통시대의 농서는 나라경영의 기본이 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의서는 사람 경영의 한 단면일 것이다. 국가의 근본이 인간이기에 결국 통한다 하겠다.

 

 

이 책이 유독 눈에 띤 것은 전남의 선대 인물 가운데 전통의학에 관한 기록과 구전 자료를 찾는 것과 관련 깊다. 이미 「장흥 한방 특구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주제로 강의[2010.10.16. 장흥한방해설사특강/2012.2.6. 장흥 문화관광 해설사 특강)와 발표자료[2010.11.6. 장흥향토사회 정례 발표]를 준비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이 인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라남도 한방산업진흥원과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연구를 한 <전남 전통의학 명의발굴 사업> 최종 보고회(2012.8.12. 전남도청)의 자문위원 참여 요청을 받고 관련자료를 검토한 것도 한 계기라 할 수 있다.

 

 

노익원이 1754년[영조 30, 崇禎三甲戌) 2월에 쓴 서문에 따르면 친구인 한여관(韓汝寬)이 두진(痘疹)을 다스리는 처방과 경험방을 적은 책자를 보여 주어 “한씨일매정보감(韓氏一梅亭所寶鑑也)”이라 하면서 널리 유포되어 유문(儒門)에서 말하는 수민상책(壽民上策)의 인의(仁義)가 펼쳐지기를 바라지만 힘이 부족해 출판을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음을 적고 있다.

 

 

그리고 책의 중간 뒷 부분에 서문보다는 약간 앞서 1월에 쓴 발문이 있다. 끝에 “崇禎三甲戌孟春淸城 韓昉烈跋”이라 되어 있어, 발문 쓴 이의 인적 정보를 알 수 있다. 청주(청성)한씨 한방열. 서문과 연결시켜 보면 자는 여관(汝寬). 그런데 아쉽게도 한방열에 대한 정보는 더 찾아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더 있다. ‘海南尹殷宗錄’. ‘해남인 윤은종이 기록하다.’라는 내용. 서문의 끝에 ‘西河 盧翼遠書’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이 또한 정보가 자세하지 않다. 다만, 1930년대에 ‘잡화상 직업을 지닌 윤은종’이 한명 확인되기는 한다. [時局關係の犯罪に關する調査, <사상휘보> 제18호, 1939.03.01] 동일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유추해 보자면, 1750년대 필사본이 어렵게 전래되다가 1930년대에 윤은종이 서문을 다시 써서 보전해 온 것은 아닐까? 본문과 서문은 글씨체가 다른 것도 눈여겨 볼 점이다.

 

 

표지에 ‘癸未五月’, 안표지에 ‘黑羊午月 謄書’의 연기가 보인다. 서문을 쓴 연기와 비교해 보면 계미년은 1763년으로 볼 수 있다. ‘黑羊’은 계미년의 또 다른 표기, 그리고 ‘午月’은 지지(地支)가 오(午)로 된 달이니 음력 오월이다.

 

 

여기까지 하여 정리해 보자면, 청성[청주]인 여관 한방열은 두진관련 전문의서를 집필하고 경험방을 붙여 한 벌을 정서 한 다음 친구인 남원 유학 노익원에게 찾아가 책의 이름을 지어주고 서문을 써 줄 것을 청한다. 1763년 5월부터 집필과 필사를 하여 이듬해 1월 본인의 발문을 쓰니 일곱달여이다. 2월에는 서하 노익원이 서문을 쓰게 되지만, 간행되지는 못한 듯 하다. 서문의 내용에도 있거니와 다른 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뒤 어렵게 전래되다가 현재의 필사본으로 전한듯 싶다.

 

 

세부적인 내용은 자세히 살펴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개된 서지사항으로 대신한다. 다만, 한의고전명저총서(http://jisik.kiom.re.kr)에 소개된 두과휘편(痘科彙編), 두역대방(痘疫大方), 두질경험방(痘疾經驗方), 홍진별방(紅疹別方), 홍진신방(紅疹神方), 홍진치료합편(紅疹治療合編), 경험두방(經驗痘方),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1608), 인부수지(人夫須知), 동초단방(東艸單方), 양두(兩痘) 등과 비교한다면 출처와 연원, 시대사정 등을 더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향촌 사정까지도.

 

 

이제 또 한가지 밝혀 나가야 할 걸림돌. 한방열은 어디서 태어 났으며 주 활동공간은 어디였을까?

 

장흥 벽사역 인근에서 양성재(養性齋)라는 이름의 약방을 운영했던 김 경우(金慶瑀)처럼, 약방을 운영하지는 않았을까? 그 약방은 어디에 있었을까? 김 경우 관련 시(‘碧沙防築內藥局’, ‘碧沙藥房主翁金慶瑀’)를 문집에 기록으로 남긴 은암 김몽룡(1708~1788)의 활동연대와 비겨 보면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을 법한 김경우와 한방열, 혹시 서로 교류 하지는 않았을까?

 

농서를 지어 국가기록에 보관이 될 정도의 실학적 지식을 가진 남원 유학 노익원과의 교류는? 특히 노익원은 1798년 광주목 과거시험 발표 명단인 '어고방'*에 실렸다. 둘만이 아니라 서로의 연망(緣網)에 따라 교류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한방열이 남긴 다른 문적이나 유품은 없을까? 후손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하여 기록찾기는 이어진다.

 

 

* <어고방(御考榜)>은 1798년 6월 광주목 도과 과거시험 발표 명단이다. 전라도의 각 고을을 망라하여 공부 좀 한다는 선비들이 다 모여들었으니 1798년 당시 전라도의 인재명단이라 할 것이다. 길이만도 28.5미터에 이르며 광주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광주 대촌의 수촌 고정봉가에 전래된 것이라 한다.

 

제일 상위 점수(給分 14푼[分]) 2인(高廷鳳, 任興源)에게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권을 준다. 2차시험 없이 임금 앞에서 치루는 3차 시험인 전시(殿試)를 바로 치루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 2인(12분, 朴宗民, 鄭冑煥)에게는 관직을 내려준다. 경기전과 조경묘의 참봉, 전주에 있는 왕실 발원의 성지 유적관리 책임자, 그 다음 1인(10분+2분, 柳東煥)에게도 또 혜택(문과 2차 회시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참여하여 상위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 일정 급분을 인정하고 그 다음 '차상'에게는 붓, 먹, 종이 책을 내려준다. 점수에 따라 차등 있게. 성명, 점수, 본관, 부친, 현조를 개별로 기록한다. 상위점수 6인(金在博, 吳相淳, 朴定源, 林煥遠, 朴宗學, 李大圭)에게는 급분 8분을 인정하고 그 다음 5명(柳翔之, 奇學敬, 鄭潤吉, 盧翼遠, 楊宗楷)에게는 6푼을 인정한다. 6푼을 인정받는다. 합격자 5명 외 두번째 가는 높은 점수이다. 유학 노익원은  53살, 본관은 풍천, 거주는 남원, 아버지은 노환(爟)이다.

 

 

<매정보감> 표지(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인용, 이하 같음)

 

 

 

<매정보감> 서문(노익원 지음)

 

 

 

 

 

<매정보감> 발문(한방열 지음)

 

1798년 광주목 과거시시험 발표 명부(御考榜)(광주민속박물관 소장, 길이 28.5미터, 69명의 전라도 인재명단이다.)

 

어고방 부 차상 노익원(2행, 뒤에 위백순도 보인다. 존재 위백규의 동생이다.)

 

어고방 의 초 삼중 노익원

 

어고방 책 초 삼중 노익원(2행, 끝에 위백순도 보인다.)

 

 

 

- 2014.03.05일 '1754년의 전통의서, 한방열(韓昉烈)의 <매정보감(梅亭寶鑑)>'으로 처음 올리다.

- 2016.04.23일 사진 올리면서 손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