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07 -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 - 화순 도장리

향토학인 2014. 11. 30. 01:34

인지의 즐거움007

현대 마을문서의 보고, 화순 도장마을

 

김희태

 

전국 최초의 “새마을시대 마을자료전”

                                             

이태전인 2011년 8월 21일.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를 찾은 천여명의 사람들.

아홉번째로 열리는 ‘도장골 밭노래 한마당 축제’를 보기 위함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여 펼쳐지는 순수한 마을축제.

 

그 가운데 유독, 찾는 이들의 눈에 띠었던 것 하나,

“새마을시대의 도장마을 자료전”

외지에서 왔건, 고향 떠나 출타를 했건, 고향을 지킨 도장 사람이건, 주변의 화순 사람이건 간에 보는 이들 모두가

‘아! 그거였구만! 그랬었제! 우리집에도 째까 있었는디..”

 

바로 우리들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 관한, 40여년전의 현장 기록이기 때문이었다. 이른 바 “새마을 기록문서”

그날 내건 현수막의 글귀에 그간의 내력에 바램까지 오롯이 담고 있다. 인용해 보자.

 

「새마을시대의 도장마을 자료전」여는 이야기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마을 앰프에서 울려 나오는 새마을 노래로

일과가 시작되고 끝나던 시절.

“유신만이 살길이다.”

나랏님의 지엄하신 분부를 받들어

통일벼를 심어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초가집을 헐어내고 마을길을 넓히면서

“잘살아 보세”의 일념으로

우리는 지상낙원을 꿈꾸었던가?

 

하지만 넓은 길따라 밝은 전기불 쫓아

모두 떠나고 이제 우리만 남았네.

7~80년대 암울하고 힘들었지만

마을에서 지역에서 함께 부대끼며

한 시대를 거뜬히 살아 나온

흔적들을 모아 보았다.

그것들이 엄연한 우리 마을과 나라의

역사였음을 알리고

살아온 지난날은 모두가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통해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자 다짐을 하며!!

 

그냥 흘려버렸을 법한 그저 그런 기록들. 그런데 그것이 몇십년치를 모아 놓고, 또 몇십년이 세월이 흐르니 그것이 바로 개인의 생활이요, 마을의 유래요, 고을의 문화요, 나라의 역사가 된 것이다.

 

물론 마을축제의 장승깍기, 물놀이, 물총만들기, 떡메치기, 마을 음식점, 무농약 농산물 판매, 그리고 '시루바우', '조개바우', '백파정', '충혼탑' 등 마을 10대 상징물 선포 등 고을단위의 어느 축제 못지 않게 볼거리도, 먹거리도, 할거리도 많았다.

    

마을 방앗간을 활용해 동네에서 모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름 하여 방아실미술관. 그저 집에 있는 흔한 것 같은 기념사진. 졸업식, 야유회, 혼인 등등. 한 장씩 모으고 모아 ‘스캔’ 작업해 보관하다 보니 이제 2천장에 이른다.

 

 

1972~1977년사이 주고 받은 모든 마을문서 620건 5천3백여쪽 보존

 

이때 알려진 도장마을의 새마을문서는 말 그대로 “현대 마을문서의 보고”라 할만하다. 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타에서 목록정리와 기록촬영, 그리고 해제작업을 하였다. 모두 620건 5,317쪽에 이른다.

 

도장마을의 유형별로 분류하면, 도장리 내에서 작성한 문서와 외부에서 하달한 문서로 분류된다. 도장마을 내에서 작성한 문서로는 마을 조직체 문서, 마을사람들의 일상생활 문서, 새마을 사업 문서 등이 있다. 작성인은 이장, 새마을 지도자, 개발위원, 새마을금고, 부녀회, 주민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하달한 문서로는 전남도청, 전남농촌진흥원, 화순군청, 화순경찰서, 화순농촌지도소, 화순전매서, 도암면사무소, 도암지소, 도암농협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새마을운동의 지침서, 계획수립, 사업실천, 실적보고, 금고운영, 환경개선(도로확장, 지붕개량, 하천정비 등), 소득증대(과실수 재배, 뽕나무 식수, 통일벼 재배 등), 마을회의(대동회, 개발위원회, 부녀회), 기타 영농사업이나 대공업무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도장마을에서 받고 보낸 문서를 거의 빠짐없이 소장하고 있다. 이 기록물은 최일선 현장의 새마을 운동 계획, 방향, 추진내역 등을 소상하게 전해주고, 상부의 전략과 의도 등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생산연도는 1972년~1978년 사이 문서가 주를 이룬다. 1960대부터 작성된 문서도 보이기는 한다. 1965년의 기본통계대장(면적및행정구역, 가구인구, 인구동태조사, 산업별인구, 농가인구 및 경지면적, 경작규모별농가호수 및 면적 등)(54쪽), 1968년부터 연도별로 기록한 농가별 등급표(성명, 전답, 등급)와 개발위원 및 반장명단(175쪽), 1968~1969년의 출경작면적확인증(지번, 지목, 지적, 주소, 성명)(54쪽) 등. 그리고 1980년대 문서(1980년 전주 답주 산주 명단장부, 1981년 새마을사업 현지지도일지, 1982년 마을창고 수입지출회의록)도 일부 있다.

 

초창기 자료인 1972년 문서 가운데 일부만 보자.(연월/문서명/생산/주요내용/분량)

 

1972.1.15 회의록(도장리 생산/하수구 보수, 배수로 보수/1쪽)

1972.1.15 주지사항(화순군 생산/새마을의날 행사, 농촌환경개선사업, 겨울철 100일 일하기, 보리재배관리/10쪽)

1972.4.00 회의서류(화순군/호박심기, 보비배관리, 곡수촌 묘표관리/11쪽)

1972.5.31 반상회 주지사항(화순군/식량증산1단계 90일작전 전개, 통일쌀재배에 대하여/10쪽)

1972. 곡수촌조성(밤나무)개인별 서약철(도장리/서약철/26쪽)

1972. 새마을사업출역명부(도장리/농촌건설단출력규제사항, 새마을사업양회수불부, 철근수불부/23쪽, 3권합철)

1972. 새마을사업(도장리/새마을규약, 일반현황, 새마을지도자, 새마을지도자행동강령, 새마을어린이단규약, 새마을

         필승목표, 새마을노래, 새마을농촌건설단원명부(남자부, 부녀부)/33쪽)

1972. 수입내역(도장리/새마을사업자금확보내용및농가별할당, 수입내역부/6쪽)

1972. 사역부(도장리/출역보수, 계, 단가, 금액, 출역자주소, 성명/4쪽)

1972. 지붕개량계(도장리/지붕개량계안, 연차별 지붕개량내역/4쪽)

 

기록에 따르면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제창되어 1971년 전국 33,267개 행정리동에 시멘트 335포대씩 균일적으로 무상지원한다. 사업성과를 평가하여 다시 반쯤되는 16,600개 마을에 또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 1t씩을 무상공급하는 등 경쟁적·선별적 방식으로 시행한다. 당근과 채찍일까? 도장마을문서에서 보듯, 양회와 철근은 마을민들에게 수불부에 올리고 보급된다.

 

도장마을에는 문서와 함께 당시대 물품도 남아 있다. 도장, 지적도(35매), 리민카드, 명찰, 녹음테이프(산불방지 등)... 이젠 유물이 되가고 있다. 심지어 생산증대를 위해 전국적으로 시행하면서 배포했던 쥐잡기용 쥐약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주)전우방제의 쥐-독스입제 6봉, 국보제약의 야옹펠리트 3봉.

 

조선대학교 연구팀은 “이 시대 이 지역의 역사문화와 시대적 상황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부한 사실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도 높고, 전국적으로도 흔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문화재청에서는 「새마을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키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공모를 거쳐 2011년 11월에 열린 중앙문화재위원회(세계유산분과)에서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UN에서 빈곤퇴치를 위한 모범적 사례로 인정받아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에서 배우고 있는 ‘새마을운동’의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2013년 등재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2012년 4월에 문화재청에서는 기록유산 등재를 결정짓는 제11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개최지로 광주광역시로 결정하여 유네스코에서 확정되었다. 2013년 6월 18일 광주에서 「새마을운동 기록물」은 「난중일기」와 함께 등재된다. 이미 「5·18 민주화운동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2011)된 ‘민주 인권도시 광주’에서 그 대척점에 있는 ‘대표적 관변운동 기록물’이 논의다는 것. 그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아니 ‘상생’으로 이해해야 할까?

 

어떻든 이 시점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평가는 제쳐 두고라도 그 현장과 실행의 원 ‘기록물’인 ‘화순 도장마을 새마을문서 일괄’은 ‘1970년대의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라는 ‘새마을운동’의 귀중한 자산이요 현대 생활사의 기록문화유산이다.

 

보편적인 기록보존의 전승, 조선시대 고문서

 

이같은 현대문서가 보존되게 된 것은 한 두사람의 열의만으로는 어려울게다. 전문 연구자나 마을 어르신 입장에서 보면 시시콜콜한 문서일뿐만 아니라, 누추하고 비좁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보관한다는 것도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폐기처분하자는 말도 있었을법 하지만, 일일이 주워 모아 마을회관에 온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도장사람들의 전통문화와 마을전통에 대한 높은 자부심도 엿볼 수 있다.

 

그 답은 현장에서도 또 나왔다. 마을을 뒤적이고 묻고 물어 알아보니 집집마다 고문서와 전적이 보존되어 오고 있었던 것. 그런데 놀랍다, 조선시대 초기, 1440년대의 백패와 홍패도 남아 있다. 일부 글자 판독이 어렵긴 하지만,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문서이다.

도장리(道莊里)는 65호 160여명이 산다. 도장골[道臟洞]이라고 했고 대밑애(1반), 독무지기(2반), 뒤대미(3반), 아내미(4, 5반)의 ‘[자연마을]’이 있다. 해망산과 고당산을 뒤로하고 앞에는 정천(淨川)이 감도는 배산임수 입지. 생활터로서 좋은 지역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이 널려 있기도 하여 오랜 터자리임이 눈에 보인다. 지금사는 사람들은 조선시대 초기 진주형씨가 먼저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 뒤로 진주김씨, 신평송씨, 남평문씨, 능성구씨, 동복오씨, 행주은씨가 자리를 했다. 지금은 진주형씨, 진주김씨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능주목 서이상면(西二上面) 도장동(道臟洞), 뒤에 서이상면은 도장면이라 하다가 1914년에 호암면과 합해 도암면이 된다.

 

도장마을 여러 곳에 고문서와 전적이 남아 있다. 고서의 경우 85종 162책이 마을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형광호씨 소장본 28종 46책, 김성인씨 소장본 40종 46책도 마을회관에 보관중이다. 마을회관은 말 그대로 “기록보존소”인 셈이다.

 

경서류(논어집주, 맹자집주, 서전, 시전대전, 대학혹문, 소학제가집주, 사자소학, 명심보감, 고문진보)나 시문류(염락, 규장운, 증보삼운통고, 학칙자경록, 추구, 전남시집), 사서류(십구사략, 통감절요, 족보, 문집, 읍지, 서원지)들이다. 경서류나 시문류는 필사본이 많다. 학업을 위해서였다. 백파정(白波亭)도 한 공간이었으리라.

 

김기화씨 소장

27점이 있다. 1774년에서 1907년에 이르기까지 능주목사에게 제출(호구단자)했거나 발급(준호구)받은 호적문서가 17점으로 가장 많다.

형씨부인이 세자녀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분재기(1683년), 도장면에 있는 위토전 1두락을 값 6냥을 받고 김지록(金之祿)에게 판다는 김응복(金應福) 명문(明文, 1794년)들이다. 투장(偸葬)에 관련되어 김영순 등이 능주목사에게 제출한 소지(계사년)도 있다. 내용은 투장한 사실로 정소를 당하여 독굴(督掘)하라는 제김을 받고, 이에 독굴하였으니, 감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라는 청원이다.

 

김성인씨 소장

36점이 있다. 30점의 호적문서와 6점이 간찰이다. 호적문서는 1771년(영조 47)에서 1876년(光緖二年) 사이에 능주목사에게 제출했거나 발급받은 것이다. 1771년(영조47) 김응수(金應壽) 준호구(準戶口)는 능주목에서 전라도 능주목 서이상면 도장동리(현재 도장리)에 사는 유학(幼學) 김응수에게 발급해준 준호구이다. 어머니 정씨(鄭氏)와 처 문씨(文氏), 아들 달영(達英), 딸 총 4명이 가족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노비 총 6구(口)가 있다.

 

형광호씨 소장

18점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 1444년(세종 26) 3월에 유학(幼學) 형군철(邢君哲)이 진사시(進士試)에 제 84인으로 합격하여 발급받은 백패를 비롯하여 16점의 백패, 홍패, 고신교지와 2점의 유서(諭書)가 전한다. 형군철 홍패(紅牌), 형군철 고신(告身) 2점, 1459년 형경(邢慶) 고신, 형용인(邢用仁) 백패, 형자관(邢自寬) 백패, 형자관 고신 3점, 1573년 형자홍(邢自弘) 고신, 1575년 형자홍 고신, 1745년 형수화(邢壽華) 고신, 1746년 형수화 고신, 1902년 형학문(邢學文) 고신, 1902년 형학문 고신들이다.

그리고 유서 2점이 함께 있는데, 1533년(중종28)에 중종(中宗)이 하양현감(河陽縣監 ; 현재의 경북 경산시 하양읍 일원에 있던 조선시대의 현) 형자관에게 표리일습(表裏一襲: 속과 겉의 옷감 한 벌)을 하사하며 내린 유서이다. 고을을 잘 다스리자 특별히 상을 내린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 백패, 홍패, 고신교지와 임진왜란 전의 유서가 함께 전하고 있어 당시 제도사 이해에 중요함은 물론 사료로서도 가치가 크다.

 

 

기록자료, 모으고 또 모은다 - 무형 민속 유산과 사진자료

 

도장리는 민요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산골 속에 밭이 많은 자연환경, 의당 여성들이 밭일 하면서 고단함을 달래고 능률을 높이기 위해 흥걸거리기 마련이다. 그 노동요, 들노래와 밭노래가 발달한 연유이다. 삶의 애환, 투박한 토속어, 신명의 음률. 그러나 전래되어 오던 민요는 기계화, 탈농화 되면서 점점 잊혀져 갔다. 25년전 마을의 청년들이 <도장리농우회>를 만들고 뒤 이어 <도장리부녀회>가 결성되면서 민요, 무형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수집했다. 정리 기록하고 교육했다.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재현했다. 성과는 나타났다. 1992년 전남도 주최 제20회 남도문화제에서 민요부문 우수상을 탔던 것. 2013년 ‘도장리 밭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무형 민속의 기록화와 함께 또 하나의 기록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진자료. 누군들, 어느집이건 기념사진이 있다. 70대 어른의 소학교 졸업식, 80대 어머님의 수줍은 혼인잔치, 70년대의 마을 계원 나들이길, 40대 젊은이의 돌잔치 사진, 타향갔던 친구 왔다고 헐어버린 옛집을 배경으로 찍은 30년전 사진....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만, 우리 식구만의 기념사진으로만 장롱에, 먼지낀 앨범에 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네 삶의 모습이요 생활사 현장이다. 하여 동네를 뒤져가 만나는 이마다 설명하여 한 장... 두 장... 모으고 또 모으고. 지금까지 2천여장에 이른다. 마을 축제 때 사진전도 했다. 이젠 그 기록들을 종합해가려고 힘을 모으고 있다.

 

“우리들의 모습, 생활, 교류 하나하나가 모두 자료요, 기록이요, 역사지이요. 그것들을 우리 서로가 중히 여기고 잘 보존해서 활용을 하고, 후세에도 물려 주어야지요.”

 

마을회관 2층에 4월 11일 개관한 ‘해망마을도서관’에서 목록을 정리하던 도장마을 토박이 김성인씨. ‘마을문화운동가’. 이 글을 쓰고자 마을을 방문 한 날(2013.5.3). 몇 번째 만났지만 여전히 바쁘다.

                                      

01. 1972년 2월 작성한 새마을사업출역명부. 집안에 있던 자녀들의 공책을 이용하여 기록을 정리했다. 관제 구호이기는 하지만 ‘준법정신, 범죄운운’의 고무인. 시대를 뛰어넘는 용어인듯하다.  

                                   

   

02. 1972년~1978년 새마을운동기의 문서가 주를 이루는 도장마을 기록물. 문서는 물론 도장, 영수증, 리민카드, 수첩, 산불방지 방송용 녹음테이프, 심지어 쥐잡기용으로 배포한 쥐약도 원형봉지가 10여개나 있다.

      

03. 2011.8.11 「새마을시대의 도장마을 자료전」

전국적으로 드물게 마을문서 전시회를 마을축제 행사에 곁들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기록 620건 5천3백여쪽이 거의 원형대로 있다.

   

04. 1972년 양회수불부

1971년 전국 33,267 마을당 335포 씩 시멘트 무상보급. 평가를 거쳐 다음해에 절반정도인 16,600마을에 500포씩 경쟁적, 선별적 배포. 첫줄에 500포대인걸보면 배달사고(?)는 없었던 모양이다.

   

05. 새마을 어린이단규약까지 만들었고, 현지 마을에서는 임원까지 구성했다. 지금은 50대, 60대가 되었을 그 어린이들, 고향을 지키고 있을까?

      

06. 새마을사업회의록(1974.11.5, 1974.2.28)

다음해에는 3개보를 보수하여 식략증산노력한다는 연말회의와 3월1일부터 착수한다는 연초회의. ‘유신체제를 다시한번 깨웃처 정부의모든 지원을 뒷받침운운’의 기록이 보인다. 관변운동임 드러나는 대목이다.

        

07. 조선초기에 진주형씨가 처음 입향했다는 도장골. 여느마을과 다름없는 한적한 시골이다. 그런데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말해 주듯 오랜 역사가 있고, 마을의 기록들을 잘 보존해 오고 있다. 

08.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마을입구. 선조들의 빗돌이 즐비하고 마을회관 앞에는 고인돌이 있다. 인근 지역 개발을 할 때 마을민들이 옮겨 왔다. 이것도 또 하나의 기록보존이리라.

 

09. 2013.5.3 도장마을 풍경.

동네의 모든 자료는 마을회관으로. 그림천재로 알려진 동네출신 젊은 작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작품이 버려져 있다는 제보를 받고 달려간 현장.

10. 1444년 형군철 백패(진사). 15세기의 교지류는 흔하지 않다. 장말손 백패(1453)가 다른 문서와 함께 보물 501호(경북 영주), 능성 쌍봉사 감역교지(1457)도 보물 1246호(동국대도서관)이다.   

11. 1530년대 형자관 하양현감 고신.

 

12. 형자관의 남평현감 고신도 전한다. 이 시기에 진주형씨가 나주 남평, 화순 능주(도장마을) 등과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13. 1533년 하양현감 형자관에게 표리일습을 하사한 유서. 관찰사 송흠(宋欽)의 계문으로 선정을 베푼 형자관이 특사를 받는다.

14. 1771년 능주목 서이상면 도장리 김응수 준호구.  

15. 1981년 도장마을.

16. 2006년 도장마을. 25년의 세월사이 많은 변화가 보인다. 사진자료는 생활사자료이기도 하지만 국토기록이기도 하다. 2006년 이후 마을회관은 2층으로 올렸고, 길따라 중간쯤, 전시관으로도 썼던 방앗간은 헐리고 만다. 변화와 기록, 도장에서는 계속된다.

                                      

17. 동네의 학당이자 어른들의 교류공간인 백파정에 모인 외지 재학 학동들. 1960년대. 그들도 이젠 70대가 되었다.

                              

18.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 ‘화순 도장’의 기록보존소이자 미술관이며 박물관인 마을회관. 2013년에는 해망마을도서관도 열었다. 마을축제 때 고문서 전시. 소장과 전래, 보관도 중요하지만, 그게 뭔가도 알고 자랑도 해야 한다. 그래야 자부심도 생긴다.

 

* 사진 : 10~14 ; 한국학자료센터 한국학자료포털(http://kostma.net) / 15~18 도장마을, 김성인, 심홍섭

 

* 국가기록원, <기록인> 23(2013년 6월호), 기록의 寶庫, 전통마을(기획특집5) - 화순 도장리

* 화순 도장골 밭노래 축제 학술토론회 자료집에도 실림(<우리는 이렇게 살았다>-밭노래마을의 삶, 문화 그리고 기록-, 전남화순군 도장골 밭노래축제 추진위원회, 2013.10.5. 3~11쪽) 

 

기고201306기록인23기록보고화순도장.pdf

 

기고201306기록인23기록보고화순도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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