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仁智)의 즐거움따라004
1555년 6월 25일 무등산을 찾은 이, 누구인가
-유배객 소재 노수신의 을묘피구록(乙卯避寇錄)-
김희태
남도의 진산이라는 무등산! 이름만으로도 푸근하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일상의 진리를 그 이름 하나로도 일깨워 준다. 그 무등산에 관한 수많은 기록 가운데 제봉 고경명(1533~1592)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산수유기 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제봉이 마흔 두 살나던 1574년(조선 선조 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을 유람한 기록이다. 단순한 등정기가 아니라 무등산 실경과 명류들의 발자취, 그리고 무등산 주변의 유서깊은 산사나 고적들을 흥미있게 소개한 걸작이다.
첫날인 1574년 4월 20일 증심사를 들렸을 때 주지 조선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유독 눈에 띠는 구절이 있다.
‘조선(祖禪)이 송화로 빚은 술과 산나물로 나를 접대하고 이야기가 소재(蘇齋)의 옛 놀이[舊遊]에 미쳤는데 자못 조리가 있어 들을 만하였다.’
소재, 누구일까? 언제 어떤 인연으로 무등산을 찾았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하며 밤을 지샜을까? 또 다시 발동한 궁금증 따라 기록과 현장 찾기. 그게 인지(仁智)의 즐거움이다.
왜 인지의 즐거움인가?
‘인자요수(仁者樂水), 지자요산(智者樂山)’이란 말에서 인지(仁智)-산수(山水)-향토(鄕土)로 이어 진다. 기록과 현장, 유산과 사람을 찾으면서 향토학인(鄕土學人)이 되어 내 나라 내 땅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즐거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찾았다!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 1515~1590)!
1555년(명종 10년) 6월 25일, 소재가 무등산을 유람한 것이다. 그때한 여름날, 어인 일로 증심사를 찾았을까? 그리고 시까지 남겼을까?
소재 노수신은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다. 1547년 명종이 즉위하던 해에 사림들이 피해를 당한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진도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뜻하지 않던 사건을 만나 피난길을 떠난다.
그 사건, ‘달량진사변’이라고도 하는 ‘을묘왜변’이다. 왜구가 서남해안을 침략해 노략질한 사건이다. 노소재가 1547년 윤9월 진도에 유배온지 8년만인 1555년의 일이다.
전쟁인 탓에 유배객도 피난을 떠날 수 밖에 없다. 그저 단순하게 허둥대며 줄행랑은 아니다. 여유롭지만은 않았겠지만 관조한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긴다. 그것도 문학작품으로. 이름하여 ‘을묘피구록(乙卯避寇錄)’. 마흔 일곱수의 시(詩)로 기록한 왜구 피난 기록이다.
‘을묘피구록’은 소재 노수신의 문집인 <소재선생문집(穌齋先生文集)> 권4에 전한다.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계된 민족문화추진회에서 한국문집총간 35집으로 영인본을 간행한 바 있다.
소재의 피난길은 1555년 5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두달여, 진도 소포(素浦)를 떠났다가 해남, 목포, 무안, 함평, 나주, 광주, 담양, 순창, 광주, 영암, 강진, 벽파진을 거쳐 다시 진도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해양(남해안)과 내륙수로(영산강)를 잇는 길이다.
소재는 그 다급한 피난길임에도 들리는 곳마다 경관 풍물을 벗삼아, 만나는 사람마다 인연을 내세워 47수의 시를 기록으로 남긴다. 시란 분명 형상화 된 문학작품이지만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문화도 읽힌다. 시의 제목 다음에 적은 주석에 날짜와 날씨, 그리고 만난 사람과 들린 곳과 인연 등 전후 사정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마흔 한살 피구 유배객이 찾은 무등산 증심사! 그 시를 풀어 본다.
證心寺 贈祖禪 증심사 조선스님에게 주다
(二十五日 晴 不使久於城 乃尋寺 無悔同宿 25일 날씨 맑음. [광주]성안에서 오래있지 못하고 절을 찾아 무회와 밤을 지새다.)
路入山無等 로입산무등 길따라 들어서니 산은 무등이요
心知寺有禪 심지사유선 마음 알아 주는 조선스님 절에 있네.
閑忙各半日 한망각반일 한가롭고 바쁜 가운데 서로 반나절
喜懼獨中年 희구독중년 기쁨과 두려움속에 홀로 중년일세
兵甲黃塵裡 병갑황진리 누런 먼지 속에서 전란을 치렀는데
煙霞白水前 연하백수전 맑은 물 앞에선 연하가 피어오르네.
臨分把雲衲 임분파운납 헤어질 때 손을 잡은 속인과 스님
淸嘯向晴天 청소향청천 맑은 바람소리 개인 하늘을 향하네
한 여름철, 음력 6월 25일 맑은 날. 광주목 읍성안에서 머물다가 무등산의 증심사를 찾는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 무회와 함께 밤을 지샌다. 어쩌면 조선스님과 도밤새껏 토론을 했을법 하다. 선문 선답이었을까? 유배 와중이었으니 세상사도 논했을 터! 왜구를 피했던 길[피구길]이었으니 시대사도 말했을 법하다. 이처럼 소재는 증심사에서 조선스님과 며칠밤을 지샜고, 헤어지면서 스님에게 시를 지어준다. 시상을 통하여 소재의 심사를 헤아려 본다.
30대 중년의 나이에 뜻을 펴지 못한채 유배를 당한 사회 현실, 8년여의 유배 생활에서 찌든 몸과 마음,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유배객마져 피난길에 내몰린 시대의 아픔. 갈기 갈기인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채 내딛는 발걸음. 그래도 길은 있던가! 길따라 들어서니 무등산이요, 그곳에 절이 있으니 증심사요, 또한 마음이 서로 통해 선을 논할 이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스님.
정말로 모든 것을 잊고 한가로움속에도 바쁘게 산사에서 뜻 맞는 지기를 만나 서로가 반나절, 하루 왼종일을 토론한다. 기쁨도 넘쳐난다. 한편으로 두려움도 묻어 난다. 그게 중년의 나이탓일게다. 어쩌면 속인과 스님, 둘다 만감이 교차하는 중년 동갑내기는 아니었을까?
돌아보니 진도 유배지와 남녁 곳곳은 을묘왜변의 전란으로 인한 전쟁터! 전쟁의 누런 기운이 속까지 스며든듯하다. 문득 앞을 보니 맑은 물 앞에선 연하가 피어오른다. 증심사 계곡의 한적한 풍광, 황혼녁 한가한 산사의 고요함은 모든 걸 내려놓게 한다. 전쟁으로 인한 피난길, 속까지 타들어도 겉으로는 한가함을 느끼고 있으니 속(俗)과 선(禪)이련가?
그러기를 몇 날. 이젠 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헤어지는 날, 스님과 속인은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모른다. 하늘은 그 마음을 아는가? 맑은 바람소리만 개인 하늘에 메아리되어 퍼져 나간다.
그래서 20년 뒤 제봉 고경명이 무등산 증심사에 들렸을 때 소재의 이야기가 ‘자못 조리가 있어 들을만 하다’고 했을터.
소재가 오기 한 해 앞서 1554년 제봉 고경명도 무등산에 올랐음이 ‘유서석록’에서 확인된다. 1552년 진사에 입격하고 다음해 오른 스물두살 청년 제봉의 눈에 비친 무등산은 어땠을까. 하여 기록 찾기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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