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08 -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 - 신안 우이도

향토학인 2014. 11. 30. 01:38

인지의 즐거움 008

 

다도해 섬마을 우이도의 기록유산

- 유배기록, 마을기록, 문중기록 -

김희태

 

면암 최익현이 찾은 우이도 상산

 

우이도 산 봉우리 높아 구름에 닿았는데 一峰牛耳接雲高(일봉우이접운고)

오르다 보니 기력의 피로마저 잊었네 登陟渾忘氣力勞(등척혼망기력로)

아름다워라 바다의 수없는 섬들이여 可愛層溟多少嶼(가애층명다소서)

파도야 치든 말든 저 홀로 천년만년 萬年壁立敵洪濤(만년벽립적홍도)

 

1876년 병자년 8월 한가위. 지금의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 상산(해발 359m) 정상을 찾은 일행 들. 산마루에 올라 철마(鐵馬)와 원정(眢井)의 고적을 살펴본다. 그리고 땀을 식히던 일행 가운데 한 선비가 구름 속으로 보이는 섬들을 바라보면서 시를 읊는다. 우이에 올라 바로 읊다.[登牛耳口號]

 

우이도.

지금은 142가구 241명이 사는 섬으로 도초면 우이도 출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후기 나주목에 속한 우이도(牛耳島)는 133가구 320명(남197, 여123)으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년) 기록에서 확인된다. 당시 마을 이름은 6곳이 보인다. 이보다 조금 앞선 『여지도서(輿地圖書)』(1759년) 기록에서는 우개도(牛開島)라는 섬 이름으로 113호 334명(남 219, 여125).

 

조선 시대에 나주목에 속했던 우이도는 1896년에 신설된 지도군 흑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무안군 흑산면, 1962년11월 도초면에 편입되고 1969년 신안군에 이속되었다. 1971년 6월에 도초면 우이도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전형적인 다도해의 섬마을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 저 한편의 시이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은 누구나 잘 아는 조선 시대 말기의 대학자. 대한제국시기의 의병장. 그는 어떤 연고로 우이도를 찾았고 함께 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면암집』에는 당시의 기록이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겨 보자.

 

이곳에는 세상의 많은 시비와 득실이 일체 귀에 들어오지 않고, 갠 낮과 밝은 밤에 오직 돌밭에는 소 모는 소리와 푸른 바다에 노 젓는 노래만이 들려오니, 무릉도원이라도 이 경치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있었던 마음에 두렵고 눈에 해괴하였던 것들이 점차로 소멸되고 의연히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뒤에 도산(陶山)의 절요(節要)[이황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파옹(巴翁)의 철령시(鐵嶺詩)[송시열 덕원으로 귀양 갈 때 지은 시]를 외면서, 무젖어 체득하고 읊조리며 창달시키니 온 천하 사물들이 내 마음을 흔들지 못하는데 귀양살이의 신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래 앉아서 각기병이 더칠 때에는 먼저 굴봉(窟峰)과 전정(前頂)에 올라 걸음을 시험하고, 다시 맨 꼭대기에 올라서 전산의 형태와 사면에 둘러 있는 수세(水勢)의 폭과, 강만(岡巒)의 거리를 한눈에 다 보아 가슴을 한없이 넓혔다. 또 철마와 완정을 상세히 살피며,[세상에 전하기를 고운 선생이 당 나라에 들어갈 때 이 산에 올라 작은 샘을 파고 은배(銀盃)를 띄워 두었으며, 또 철마를 두어 산기(山氣)를진압케 하였다 한다. 그 뒤 철마는 그대로 전해 오고 은배는 근일에 와서 마을 사람이 훔쳐다 팔아먹었으며, 그곳에 지내오던 제사마저 폐지하였다고 한다.] 또한 1천 년 동안 흘러오는 신화같은 갖가지 고적까지 빠짐없이 구경한 끝에 비로소 이 산의 광경이 과거의 제주도에 못지않고, 또 오늘의 걸음이 나의 곤경을 인내하는 데 일조가 될 것을 알았다.

 

다도해 섬마을 우이도 문씨가의 기록물

 

이 기록의 끝에 “동행한 사람은 별감 양문환(楊文煥), 주인(主人) 문인주(文寅周), 팔금(八金) 김대현(金大鉉), 영장 손희종(孫煕宗), 솔겸(率傔) 김윤환(金允煥)이다.”라고 하였다.

 

그 가운데 ‘주인 문인주’가 눈에 띤다. 대학자 면암이 우이도 산행을 함께 하면서 ‘주인’이라 한 ‘문인주’는 누구일까? 면암과는 어떤 관계이길래 주인이라 했을까?

 

하여 기록 찾기가 이어졌고, 우이도 문씨가문에 소장된 다양한 기록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우이도의 역사기록과 함께. 내륙의 양반가 중심의 전통마을 기록과는 다를지라도 엄연히 몇 백 년을 이어지면서 내려오는 중요한 역사기록이다.

 

면암 최익현은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유배된다. 1876년 2월 16일에 우이도(소흑산도)에 도착해서 문인주(文寅周)라는 사람의 집에 관소를 정했다.

 

이듬해 7월에 흑산도(대흑산도)에 거처를 마련하였고, 일신당(日新堂)이라는 서당을 열었다고 한다. 1879년 3월에 유배에서 풀려나니 유배기간 3년의 절반은 우이도에 있었던 셈이다. 유배자는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야 했는데, 그곳이 바로 우이도 문인주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라 표기를 한듯싶다.

 

2009년 7월에 들렀던 우이도의 문씨가로 다시 연락하였다. 문채옥 선생. 1920년생. 구순에 가까우셨지만 건강하셨는데 연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이다. 당시 그곳에 들렀을 때 집안 곳곳에 책이며 유물이며 기록물이 가득했다. 족보, 제사, 풍수에 관한 기록들, 일기도 있고 마을의 제반 일이나 현장에 대한 기록도 꼼꼼히 남겨 두셨다.

 

그중에 한 가지. 5대조 문순득(文淳得, 1777~1847) 선조에 관한 각종 기록이다. 중요하게 보관하고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표해시말」(일명 문순득 표해록)이 대표적이다. 1801년(순조 1) 12월부터 1805년 1월까지 유구(琉球, 현 오키나와), 여송(呂宋, 현 필리핀), 중국 광동·마카오·북경·의주·한양을 거쳐 고향 우이도에 돌아오는 가장 오랜 시간의 표류 기록이다.

 

문순득의 구술을 이곳에 유배와 있던 손암 정약전(1758∼1816)이 기록하였는데 문집으로 간행되지는 못하고 손암의 동생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제자인 유암 이강회(1789~?)가 필사한 원본이 문채옥씨 댁에 보관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표해시말」이 실린 『유암총서(柳菴叢書)』와 또 다른 저술인 『운곡잡저(雲谷雜櫡)』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요한 기록이 있다. 하나는 선박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 국가경제를 위해 수레를 제작하여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 논문 형식의 「거설객난답(車說答客難)」, 수레 사용의 효용성을 논한 「제거설(諸車說)」 등이다.

 

선박에 관한 기록도 문순득이 표류하면서 보고 온 외국의 선박에 대한 구술을 듣고 저술한 것이다. 정약용을 통해 북학파의 영향을 받은 지방학자 이강회가 유배인의 높은 학문과 표류인을 통해 외국문물을 접할 수 있는 우이도에 머물면서 실학정신에 입각하여 남긴 저서로 볼 수 있다.

 

사회상이 나타나는 공문서와 가장 오래된 포구 시설 기록물

 

다른 하나는 섬지방의 사회사정을 알 수 있는 각종 공문서 필사본과 정약전이 소나무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송정사의」이다. 특히 『운곡잡저』 권1에는 상부 관아에 보낸 공문서 39편이 수록되어 있다. 주로 흑산도의 민정(民情), 군역(軍役), 표류선박 조사와 관련해서 상부에 청원하거나 보고하는 문서로 쓰인 시기는 이강회가 우이도에 칩거했던 1818년과 1819년 무렵으로 보인다. 그 정황이 매우 소상하여 이 시기 전남 해안도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이용될 수 있다.

 

문씨가 소장 기록물로 교지와 호적문서도 있다. 1716년 우이도 진촌에 사는 문계창(文繼昌)을 절충장군으로 임명하는 교지, 1835년 문순득을 가선대부로 임명하는 교지 등 교지 6매, 1843년 나주목(羅州牧) 우이도에 사는 문순백(文淳柏)이 나주목으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 등 호적문서, 호패 2점 등이다.

 

교지 가운데 문계창(1716년), 문취우(1781년), 문덕겸(1811년), 문순득(1835년) 교지는 납속(納粟) 교지이다. 납속책이란 조선 시대 국가재정이나 구호대책을 보조하기 위해 행했던 재정 마련을 위한 정책이다. 변란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의 타개와 흉년 시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필요한 재정확보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일시적으로 일정한 특전을 내걸고 소정 량의 곡식이나 돈을 받는 것을 납속이라 하였다. 납속 시 부여하는 특전의 종류에 따라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는 납속면천(納粟免賤), 양인에게 군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납속면역(納粟免役), 양인 이상을 대상으로 품계나 특히 양반의 경우 관직까지 제수하는 납속수직(納粟授職) 등이 있다. 우이도 문씨가 교지는 납속 수직의 사례로서 이를 통해 도서 지방에까지 납속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이도에는 조선 시대의 선창(船艙) 시설이 잘 남아 있다. 중수한 기록도 비석(1745년)으로 남아 있어 해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국 해양문화사에서 섬 주민들의 경제 활동을 이야기 하면, 주로 물고기를 잡는 어로행위를 먼저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이도는 어로활동 보다는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해상교역 활동을 통해 섬 주민들의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러한 독특한 해양문화를 물질적으로 증명하는 역사 유적이 우이도 선창이다.

 

이 우이도 선창은 상업 활동을 목적으로 건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포구 시설 중 하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원형으로서의 보존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이도 선창의 보존가치가 증명된 것도 기록물 덕택이다. 선창 시설의 중건비가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 95cm가량이다. 해풍과 바닷물에 일부 글씨가 마모되어 있으나 다행히 문채옥 옹이 훼손되기 전의 비문을 적어놓아 거의 그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1745년(영조 21) 3월에 마을주민 김하승(金夏昇) 등 21명이 시주하고 최두산(崔斗山) 등 4명의 화주(化主)가 일을 맡아 비를 세웠다. 석공은 김해선(金海先)과 승려 랑진(郞眞)이고, 야공(冶工)은 김와룡(金臥龍)이다. 문채옥 선생은 화주 가운데 한 명인 문일장(文日章)의 8대손이다.

 

이처럼 집안과 주변과 현장에 대한 문 선생의 기록사랑은 역사 현장의 고증에 까지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서남해 섬과 유배문화』(2011), 『홍어 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2012)라는 전시회(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열리기도 했지만, 그의 기록사랑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후손과 주민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후학을 위해 기록물 일체를 공공기관에 기증하였다.

 

신안 우이도 선창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233번지 문씨가옥. 손암 정약전의 유배생활과 관련 깊은 곳이며, 이강회의 저술이 이루어진 곳으로 전한다.

문채옥 선생의 기록사랑정신은 남다르다 못해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다. 문순득의 표해 기록과 장약전의「 송정사의」, 「운곡선설」 등 그가 보존해 온 기록물에서 진가가 드러났다. 후학을 위해 평생 수집한 기록물을 공공기관에 기증했다.

문 선생이 기록한집 안 세계도와 제사 기록

  

『운곡잡저』 : 선박과 수레 제작 활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표해시말  

    

 

 

 

 

 

문씨가 고문서

•교지: 문계창(文繼昌, 1716년), 문취우(文就瑀, 1781년), 문덕겸(文德謙, 1811년), 문순득(文淳得, 1835년), 문광길(文光吉, 1892년), 유인한씨(孺人韓氏, 1892년)

•호적문서: 문순백(文淳柏, 1843년), 문운기(文雲琦, 1843년), 문운남(文雲南, 1843년)

•호적표: 지도군수(智島郡守, 文光吉, 1897년)

    

조선시대 축조된 우이도 선창(벼리목이라는 ‘계선주’가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도 선착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745년 중수비 음기 인명  

1872년의 흑산진 지도(규장각소장)의 소흑산도(우이도)와 선창

 

국가기록원

기록인(IN) 25/2013년 12월호

기록의 보고, 전통마을

다도해의 섬마을 우이도의 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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