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仁智)의 즐거움따라 003
1612년, 베옷 입고 두건 쓴 석상에서 어버이의 병이 낫기를....
김희태
고산 유선도(1587∼1671).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이다.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뛰어난 시인’, 고산에 대한 후대의 평가 가운데 한 대목이다.
신해년에 남쪽으로 기행을 하고 글로 남긴다. 남귀기행(南歸紀行). ‘萬曆紀年三十九 斗柄揷子日有七[만력 기원으로 삽십구년 두병은 자방에 꽂혀 있고 날은 7일인데]’로 시작하는 장편의 7언시이다. 신해년은 1611년, 광해군 3년이다.
문집인 <고산유고(孤山遺稿)>에는 남귀기행에 이어 그 이듬해에 여산 미륵당을 지나면서 지은 시가 보인다.
임자년, 여산의 미륵당에 제하다 / 題礪山彌勒堂[壬子]
여산군(礪山郡)에서 말을 쉬노라니 息馬礪山郡
아침 햇살 정히 밝기도 하여라 朝日正杲杲
길가에 석상(石像)이 앉았는데 路傍坐石像
우뚝하니 형색(形色)은 늙었네 兀然形色老
초가에 지전(紙錢)을 드리우고 茅屋垂紙錢
베옷에 두건을 씌웠구나 布衣巾覆腦
누가 한 것은 모르거니와 不識何人施
복을 구함인 줄은 알 만하구나 求福可知道
신이 진실로 영험이 있다면 神乎苟其靈
나 역시 기원할 바 있도다 余亦有所禱
원컨대 신묘한 의술을 얻어 願得神妙醫
어버이 묵은 병 깨끗이 쓸어내기를 親痾卽淨掃
강녕하게 고당(高堂)에 앉으시고 康寧坐高堂
경사를 얻어 장수를 누리시기를 受慶遐壽考
자손이 뜰 아래 가득할 제 兒孫滿庭下
머리 끄덕이면 문안에 답하시기를 點頭答寒燠
* 출전 : <국역 고산유고>(윤선도 조, 박종우, 이상원, 이성호, 이형대 역, 소명출판, 2004)
<고산유고> 題礪山彌勒堂(한국고전번역원)
끝에 임자년의 간지가 있어 1612년임을 알 수 있다.
남귀 기행을 한 이듬해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던 듯 싶다. 스물여섯살의 윤선도, 그의 눈에 비친 문화재 현장을 보자.
오래전부터 문화재 홍보강의 할 때면 으례 이 시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한다.
우리가 보고 배운 것과 실제는 다를 수도 있음을 말하면서, 다양한 시각을 가져 보자는 것. 그리고 선인들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문화유산과 역사 현장을 읽어 낼 수 있다는 것.
우선 여산 미륵당의 모습을 보자. 세 번째 행부터 여섯번째까지 4행. 바로 옆에서 본 듯하다. 서경(敍景)이랄까?
‘길가’ ‘석상’ ‘우뚝’ ‘늙었네’ ‘초가’ ‘지전’ ‘베옷’ ‘두건’...
길가에 있는 지전이 둘러진 초가지붕집 안의 오래되고 우뚝한데 베옷을 입고 두건을 쓴 형상의 좌상.
문화유산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요즈음의 문화재 용어로 한다면, 여산 미륵당 석조 미륵보살좌상, 아니면 석조여래좌상, 아니 그냥 석인상일수도 있을 터.
나아가, ‘지전’에서 마을 공동체 신앙 대상이란 점도 알 수 있다. ‘베옷’과 ‘두건’을 연계시키면 기복 신앙의 일면도 볼 수 있다. ‘초가’에서 단촐한, 그러면서도 성스러운 보호각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고산은 이곳 여산 미륵당의 길가 석상을 마주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길이 호남과 수도권이 통하는 삼남[호남]대로 길목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호남고속도로 여산 휴게소가 있는 것을 보면, 지리환경의 역사성까지 더듬어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치자면 조선시대 국도인 셈이다. 이 길은 나중에 신작로라 하다가 국도 1호선이 되고 다시 고속국도가 지나게 된 것이다.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춘향가의 ‘조아미 고개를 얼른 넘어 여산읍에 숙수 전라도 초입이라.’(박동진 창본 춘향가)에서 ‘여산’ 나오는 것도 그 길목의 뜻이 있음에랴.
이런 설명을 하면서, 하나 덧붙인다.
윤고산과 같은 문학 대가, 유학 관인이 마을 앞 길가의 석상을 보고 이처럼 자세히 시를 읊었다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 아닌가 하는.
격조나 수준이 높거나 유학적인 면에서만 다루었을 것 같으리라는 고산의 창작세계가 향촌의 주민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형상화를 했다는 점. 그리고 정월 대보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도.
또 하나 있다. 9행에서 12행까지이다.
주민들이 그러했듯이 석상의 영험함을 통해 어버이의 묵은 병이 나아지기를 기원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충효를 기반으로 하는 그 사회에서 효를 기원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남행을 하고 돌아 가면서 길가의 석상을 보고서, 아니 그 석상의 ‘지전’과 ‘베옷’, ‘두건’ 등 마을 신앙 생활사 현장을 보고서 염원을 담았던 것 같다. 그 무렵 그의 주변을 보면 ‘어버이의 묵은 병 깨끗이 쓸어 내달라’는 것은 그만큼 더욱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o 17살(1603, 선조 36, 계묘) 南原尹氏와 혼인하다. 진사 초시에 합격하다.
o 22살(1608, 선조 41, 무신) 4월, 모친상[양모 구씨]을 당하다. 서울에서 居喪하다.
o 23살(1609, 광해군 1, 기유) 8월, 생모 安氏의 상을 당하다.
o 25살(1611, 광해군 3, 신해) 10월, 복을 마치고 11월에 海南으로 가다.
o 26살(1612, 광해군 4, 임자) 봄, 進士試에 합격하다. 12월, 생부 副正公[惟心]의 상을 당하다.
o 29살(1615) 2월에 상복을 벗다.
1608년과 1609년 두 분의 어머니를 여의고, 신해년 10월에는 복을 마치고 해남을 간다. 남귀기행이다. 그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런데 생부는 병이 있었던가 보다. 그해 12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니 남귀기행한 뒤 다시 서울 오르는 길에 들린 여산의 미륵당에서 ‘어버이의 병’에 대한 기원을 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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