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05 - 쌍용이 머리를 맞대고 치솟는구나 - 줄당기기 역사자료1

향토학인 2014. 3. 5. 13:06

 

인지의 즐거움 따라 005

 

쌍용이 머리를 맞대고 치솟는구나

-줄당기기 역사 자료1, 장흥-

 

 

김희태

 

머리를 맞대고 쌍용이 들 가운데서 싸우고

 

성 가득 우레 북 울려 하늘을 흔들려 하네

 

눈발이 흩날리는 너른 들녘,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온 듯 하다. 징소리, 쇠소리. 왁자지껄, 시끌벅적. 하늘이 흔들린다. 기다란 줄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 이윽고 양쪽에서 세차게 내 달라 맞닥뜨린다. 줄머리가 고가 치솟으니 쌍용이 움직이는 듯 하다. 장흥 보름줄다리기 현장을 읊은 시이다. 100여년전이다. 1918년.

 

장흥 보름 줄당기기 역사자료로 몇가지 기록이 확인된다. 1917년의 사진 자료와 1918~1930년 사이의 장흥 유림들의 문집에 나타난 시 2수이다.

 

1917년의 사진 자료는 당시 목포신보사에서 발간한 <전남사진지>이다. 이 책은 전남 각 군단위로 읍이나 시가지 전경, 주요 경관명소, 문화유산, 산업자원 등에 대한 사진을 4~10매 내외로 제시하고 설명을 붙인 것이다. 지금은 변한 곳이 많아 100여년전의 경관과 문화현장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다음이 장흥 줄다리기 설명 내용이다.

 

장흥 사자산과 줄다리기[綱引]

조선 사람 다수가 모여 음력 2월 1일 옛관습에 따라 매년 거행하는 농민들의 줄다리기 광경으로 평야를 사이에 두고 멀리 구름위로 치솟은 것은 장흥 사자산[富士 ; 전남사진지 표기]이다.[목포신보사, <전남사진지>, 1917]

 

예양강 강터의 줄다리기-가장 오래된 줄다리기 사진

 

장흥읍의 동쪽에 있는 사자산을 멀리 배경으로 하고 예양강(일명 수령천, 현 탐진강) 강터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원경이다. 음력 2월 1일에 매년 행하는 농민들의 줄다리기 광경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자산을 ‘장흥의 후지(富士)’라고 표현하여 외형으로 일본의 후지산과 비교하여 이름한 듯 싶다. 그리고 ‘줄당기기(줄다리기)’도 일본식 표기인 ‘綱引’으로 하고 있다.

 

100년전의 장흥 줄다리기 광경. 이제 그 사진을 통하여 당시 경관을 읽어 보자.

 

장흥읍을 관통하는 예양강(또는 수령천, 뒤에 탐진강이라 함)에 형성된 일종의 하중도(河中島)에 자리한 시장 마당에서 남북 양쪽으로 길게 줄을 늘여 놓은 모습이다. 장옥(場屋)이 50여동이 보이는데, 이와 비교해 보면 줄의 길이는 200~250 미터쯤이고 참여 인원은 300여명으로 보인다. 장흥 줄당기기는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하는데, 사진상의 위쪽에 보이는 강줄기에 다리가 놓여 이 다리가 구분의 기준이 되었다. 시장의 대동공간은 서부의 심장부인 셈이다.

 

줄다리기 사진으로는 현재까지 확인 된 것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사진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 시장 자리는 지금의 장흥읍 기양리 토요시장 위쪽 매일시장 부근으로 사진은 남산공원 동쪽 입구 언덕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장은 1936년 병자년 홍수 때 휩쓸려 가버리고 1938년부터 시장 매축공사를 시작했고 1940년에 강안 제방까지 막았다. 멀리 사자산이 보이고 그 아래 보이는 마을은 건산리(현 장흥 고교 밑동네)이다.

 

 

<전남사진지>(1917, 목포신보사)는 나주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제보(나주 김종순 윤지향)를 받은 뒤 대출하여 당시 전라남도 문화공보실 홍보담당 사진전문가를 통해 접사촬영을 하여 사진본과 복사본을 소장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몇 년 뒤 다시 연락하여 책자를 수소문하였으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은 <예향>과 <羅州近代百年史 : 신문자료집성(1887-1960)>(목포대학교박물관; 나주시청 편, 1997) 등에 일부가 소개된 바 있다. 1917년의 사진과 그 뒤로 변한 현장 사진을 곁들이고 답사를 통하여 주변 경관을 확인 해설한 사진향토지 발간을 하고자 김경수향토지리연구소장, 윤여정향토사학자 등과 논의를 한 바 있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다.

 

1917년의 해설자료는 지인의 자문을 통하여 국역하고 출판사(향지사)에서 입력작업까지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다시 보니 장흥 줄다리기 사진과 신안(당시 무안) 압해도의 염전 사진 등이 주목된다. 줄다리기도 가장 오랜 사진자료이며, 소금가마 염전도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 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일 가능성(전남발전연구원 김준선생 제보, 2012.03.07)이 있기 때문이다. 이태전 스캔작업(윤여정선생)을 통하여 디지털 파일로 소장하게 되었는데, 이제라도 사진향토지로 정리 발간했으면 싶다.

 

동서의 형세 두 편으로 나뉘어 일어나네, 1918년 삭전(索戰)

 

줄다리기는 전통시대에 삭전(索戰)·삭희(索戱)·조리지희(照里之戱)·조리희(照里戱)·갈전(葛戰)·도삭(綯索)으로 표기 하였다. 중국에서는 ‘시구(施鉤)’·‘타구(拖鉤)’·‘발하(拔河)’로 불리고, 일본과 오끼나와에서는 ‘츠나히끼(綱引き)’로 불리운다고 한다. <전남사진지>는 일본인이 펴낸 자료로서 줄다리기 표기가 ‘綱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줄다리기와 관련된 장흥 유림의 시는 2수이다. <장흥문집해제>(장흥문화원, 1997)를 통해서 검색하였다. <장흥문집해제>는 문집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데 검색어를 ‘索戰’, ‘索戱’로 검색하였다. 내용에서 언급한 경우도 있어 보다 자세한 원문 검색을 통하여 더 많은 자료가 찾아지기를 기대한다.

 

그 가운데 한 수는 1918년으로 연대가 확인된다. 제목에 ‘무오(戊午)’의 간지가 있기 때문이다. 서른 여섯 중년, 이인근(李寅根, 1883~1949)선생의 눈에 비친 줄다리기 형상이다.

 

o 무오년 정월에 백형의 삭전운에 차운하다

  [戊午正月次白兄索戰韻]

 

징 북소리 시끌벅적 호령소리 분명하니        

  鉦鼓喧喧號令明(정고훤훤호령명)

동서의 형세 두 편으로 나뉘어 일어나네       

  東西形勢兩分生(동서형세양분생)

용과 호랑이 천근의 힘으로 다투어 싸우고    

  龍爭虎鬪千斤力(용쟁호투천근력)

땅과 하늘 만인의 소리로 기울고 무너지네    

  地塌天崩萬仞聲(지탑천붕만인성)

 

뭇 사람들 마음 단속하여 단체로 나아가며    

  管束衆心團體進(관속중심단체진)

대오를 지휘하여 빈틈없이 행렬을 이루었네  

  指揮隊伍密行成(지휘대오밀행성)

한마당의 승부야 마땅히 보통의 일이니         

  一場勝負宜常事(일장승부의상사)

이것을 병가에 견준다면 다 이런 마음이라네 

  較這兵家摠是情(교저병가총시정)

 

1918년 정월 대보름의 ‘索戰’ 그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현장은, 시장바닥 이어서가 아니다. 이미 정초에 고샅줄에서부터 겨루기를 시작한 터라 의욕이 넘쳐난다. 덩실 덩실 매구치는 사람들, 징소리와 북소리 쿵쾅거린다. 온 고을 사람들이 달려 온 듯 시끌벅적하다. 서로가 우리네 편이 더 잘하라고 소리 소리 지른다. 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동서로 나뉘어 나아간다. 용쟁호투, 용호상박이다. 용과 호랑이가 만난 듯 서로가 있는 힘을 다해 겨룬다.

 

땅과 하늘은 줄패장과 줄꾼, 매구꾼과 농악패, 응원차 나온 주민까지 만인의 소리에 용이 승천하듯 줄은 이리 저리 휘감다가 꼬이다가 무너진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여러 차례. 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잡고 단체로 나아간다. 힘은 들지만 빈틈이 없다. 우리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 다시 힘을 내라 줄패장이 목청껏 소리 지른다. 그러다가 어느 한쪽으로 쏠려간다. 동쪽이냐? 서편이냐? 이제 한마당 승부가 끝났다. 승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건 일상사다. 온 고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대동공간이 된다.

 

처음에 ‘징소리 북소리 쿵쾅거리고 호령 뚜렷하고, 동쪽 서쪽의 형세 둘로 나뉘어 일어나도다.’로 국역을 해 놓고 보니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연결되지 않는다. 전남대 박명희선생(고전문학 한시)이 감수해 주니 잘 통한다. 그래서 전문 분야는 따로 있는 듯하다.

 

이 시를 지은 이인근선생의 자는 경지(景祉), 호는 소천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이수조(李洙祚)선생의 아들로 장흥 부산면 금장에서 태어났다. 일생동안 은거하면서 생활하였고 자연속에 머무르며 문학은 물론 지리, 건축에도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사리에 밝았다. 초당을 중건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주변의 용호정(부산 용반), 귀음재, 영모재, 죽림재, 동백정(장동 만년), 반룡재, 영호정(부산 기동), 영석재(용산 모산) 등을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봉우 임승현(奉禹 任承鉉), 노대식(盧大植), 백중언(白仲彦) 등과 교류하였다. 문집인 <소천유고(小川遺稿)>)>는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는데 시 126수가 실려 있다.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 필사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시의 제목에서 ‘백형(白兄)’이라고 인물의 성씨만 나온다. 그가 지은 시를 보고 차운 한 것이니, ‘백형’이 지은 또 다른 ‘索戰’ 제영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백형’은 누구인가?

 

이인근과 교유한 인물로 백중언(白仲彦)선생이 보인다. 호는 금강(金岡), 이름은 영윤(永允), 장흥 안양 출신이다. 백중언(白仲彦)이 교유한 글은 이인근의 문집(<소천유고>)에서 ‘4월 1일에 영호정으로 돌아가는 백중언을 송별하다(四月一日送白仲彦歸暎湖亭)’이라는 제영이다. 영호정에서 헤어질 때 지은 시이다.

 

금강 백영윤(자 중언)이 이인근의 줄다리기 시 제목에 표기된 ‘백형’인 듯 싶다. 백중언과의 교류 기록은 낙헌 김인섭(樂軒 金夤燮, 1884~1949)의 문집(<낙헌문집(樂軒遺稿)>)에서 시 6제 10수, 서 1편이 확인된다. 그리고 안규봉(安圭奉, 1874~1956)성생과도 교류한 듯 <소남유고(小南遺稿)>에서도 1제 2수가 확인된다. 안규봉의 자는 태언(泰彦),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장흥 부산면 효자리 출생이다. 관련 자료를 더 찾아 볼만하다.

 

쌍룡에 머리를 맞대고 치솟는구나, 대보름 삭희(索戱)

 

그리고 또 한수의 시는 일제강점기 중반 1930년, 쉰 세 살까지 살았던 김옥섭(金玉燮, 1878~1930)선생이 상원일(上元日) 즉 정월 보름에 줄다리기를 보면서 감흥을 시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의 문집인 <신헌유고(愼軒遺稿)>에 있다.

 

o 정월 보름에 줄당기기를 보다

   [上元日 觀索戱]

 

머리를 맞대고 쌍용이 들 가운데서 싸우고          

  交首雙龍鬪野田(교수쌍룡투야전)

성 가득 우레 북 울려 하늘을 흔들려하네            

  滿城雷鼓欲掀天(만성뢰고욕흔천)

웅건한 기세로 다투니 끝내 진정되기 어려워       

  爭雄氣勢終難穩(쟁웅기세종난온)

마침내 움직이지 않고 견디고 있으니 가련하구나 

  畢竟戢鱗堪可憐(필경집린감가련)

 

앞 머리에서 살폈던 그 제영이다. 현장에서 보듯 더 서경적이다. 머리를 맞대고 쌍용이 싸운다는 표현. 치솟아 오르는 순간이리라. 들 가운데. 1917년 사진은 강터, 시장공간이 마당이다. 그런데 그 주변은 농경지이다. 그리고 이곳 말고 장흥의 여러 곳에서 줄다리기를 했을 터, 대부분 마을 앞 들 가운데가 공간이다.

 

밭에서, 논에서, 길에서, 우리들의 생활공간이 바로 민속놀이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줄은 집집마다 사람마다 뜯어 가기도 하지만, 큰 줄기는 동네의 수호신 당산나무에 감아 준다. 액맥이와 무병, 풍년 기원의 염원을 가득 담아서.

 

결구를 “결국엔 때를 기다려 참아내니 가련하네.”로도 풀이했지만, 줄다리기 현장에서 양쪽에서 서로 맞잡은 상태에서의 팽팽한 힘겨루기, 그렇지만 천지의 힘이 모인 듯한, 그러면서 순간의 고요함이 묻어나는 현장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 팽팽한 상태에서의 순간 정지.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가련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은가. 안타깝지 않은가 말이다. “戢”자를 처음에는 “蕺”자로 잘못 읽어 “마침내 풀비늘로 견뎌 내려니 가련하구나.”로 옮겨 놓고 보니 뜻이 통하질 않았다. 짚으로 만든 줄의 겉면을 연계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두마리의 용이) 마침내 짱짱하게 맞붙어 움직이지 않고 있어 안타깝구나.’라는 뜻일 듯 하다는 양기수선생의 도움말이 있었다. 그리고 ‘戢鱗潛翼(집린잠익 =고기와 새가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음)’이라는 숙어도 있다.

 

김옥섭선생의 자는 찬영(贊英), 호는 신헌(愼軒)이며 본관은 영광이다. 장흥 안양면 기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릴적에 몸이 아팠으나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愼軒’이라 편액하여 심신을 다스렸고, 봉명재(鳳鳴齋)에서 수십년간을 독서와 훈도에 힘썼다. 그가 남긴 <신헌유고>는 1969년(기유)에 두 아들과 동곡 김준식(1888~1969)선생, 위대환선생 등이 힘을 모아 간행하였다.

 

쌍용이 머리를 맞대고 치솟는 현장을 문학으로 형상화 한지 100년!

줄다리기로는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기록(<전남사진지>, 1917)된지 100년!

재현 복원이 되는 그날, 고유문을 올리리라.

 

* 20111년 3월 6일 밤에 처음 올리고 다음날 새벽 해산 강현구형, 주인택 학형, 이경엽교수 등 지인들께 보냈다. 초안은 <장흥 고싸움 줄당기기>(장흥문화원, 민속원, 2013. 336~339)에 실렸다. 수정안은 <장흥문화> 37호(장흥문화원, 2015)에 싣고 2016년 3월 28일 올렸다. 2019년 5월 2일 보림문화제 줄당기기(장흥 공설운동장) 참관하다.(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송기태박사 등)

 

 

 

 

 

 

 

 

장흥 사자산과 줄다리기[綱引](1917년, <전남사진지>, 목포신보사)

 

 

 

      

 

      

 

 

                               이인근선생 제영 “삭전운”    김옥섭선생 제영 “관삭희”    이인근 “상원일”

 

 

 2019.5.2일 보림문화제 줄당기기(장흥 공설운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