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98 - 광주, 들이 넓고 기름져 호남의 명도(名都)라네, 1614년 褒忠祠宇歌

향토학인 2017. 3. 19. 14:09

인지의 즐거움098


광주, 들이 넓고 기름져 호남의 명도(名都)라네
1614년의 포충사우가인(褒忠祠宇歌引) 현판을 다시 보다


김희태

광주는 들이 넓고 기름져  光州之野 彌迤漫衍沃饒
호남의 명도(名都)로 불리웠네. 曰湖南名都
무등산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르고 無等巉嵓 穹窿揷雲漢
그 아래 극락(極樂)의 호수 맑게 흐르네.  其下極樂之澄湖


널찍하고 기름진 들녁의 호남 명도 광주.
높이 솟은 무등산과 그 아래 흐르는 맑은 강.


한마디로 광주를 잘 나태내고 있다. 두어마디 짧은 글이지만 산과 강도 잘 표현 했다. 가벼운 듯 하지만 광주를 잘 나타냈다. 어디에 있는 누구의 글일까. 그 다음 글은 무슨 내용일까.


광주 포충사.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광주의 자랑스런 인물 제봉 충렬공 고경명선생 배향.
문과에 장원 급제해 주옥같은 글을 남긴 큰 선비
예순이 되어 왜란이 일자 의병장이 되어 쓴 마상 격문
중과부적의 접전 현장에서 신명을 다하다 아들도 함께 순절
문무겸전(文武兼全) 세독충정(世篤忠貞)의 충의지사
1601년 창건, 1603년 사액(褒忠), 창건 이래 원위치 원형유지
조선시대 왕명으로 제관이 파견되는 최고의 예우 사액.
서원훼철령에도 존치된 전국 47개 원사 중 전라도 유일 사우


그 역사적 현장, 포충사를 얼마전 다시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인 포충사를 국가 사적으로 승격 지정하고자 자료를 정리하는 일에 참여(2015.10~2016.05)하면서다. 예전과는 달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신청서 작성만해도 하나의 학술과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험이 있으니 지혜를 모아 달라는 말에 넘어가 발을 내딛게 되었다.


수차례 가본 터였지만 그건 새로운 만남이었다. 볼 때마다 갈 때마다 느끼는 새로움. 유산과 현장, 기록과 사람을 만나는 ‘인지(仁智)의 즐거움’이다.


그 하나가 1614년에 지어진 ‘포충사우가(褒忠祠宇歌)’. 청음 김상헌(1570~1652)이 고경명(1533~1592)의 충절을 추앙하여 지은 글. 일종의 일대기 형식의 시가(詩歌).


이 현판의 첫 행 제목은 ‘褒忠祠宇歌 幷引’
끝에는 ‘萬曆四十二年 甲寅十月之晦 安東金尙憲再拜稿’


제목과 지은이와 지은 때를 알 수 있다. 포충사우가로 인(引)을 함께 썼고 1614년(광해군 6, 萬曆 42) 갑인년 10월 그믐날 안동인 김상헌이 재배하며 지은 글.


‘인(引)’이란 한문 문체의 명칭이다. 일종의 ‘서문’과 같은 것. 중국 고대의 자전인 <광아(廣雅)>라는 책에 ‘인은 부연(敷演)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자기 뜻을 부연하여 서술하는 것을 말하는 것. 이것은 서문(序文)의 시초로서 문장의 성격이 대략 ‘서’와 같지만 길이가 짧은 것이 보통이다. ‘포충사우가’라는 본문 시가에 앞서 그 경위를 짧게 적은 글(引)을 함께(幷) 쓴다는 것.


지은 때는 1614년. 임진왜란으로 제봉공이 순절한지 23년. 포충사를 건립한지 14년 뒤이다. 지은이는 청음 김상헌(1570~1652). 안동 김씨. 서울 출생. 마흔다섯살 때. 김상헌은 17세기 척화신(斥和臣)으로 절개와 지조의 상징적인 인물. 1636년(이조 14)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 청나라가 항복의 뜻을 적은 국서를 보내오자 찢어버렸고, 1640년에는 청의 출병(出兵)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조정의 명을 받고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가 6년만에 돌아온다.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시대를 넘어 회자되고 있다.


김상헌이 ‘포충사우가’를 지은 때는 병자호란이 일기 23년 전이다. 1612년 12월 연안부사가 되었는데 이듬해의 옥사에 아들이 김제남의 손자 사위라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1615년 호군이 된다. 그러니까 ‘포충사우가’를 지은 1614년 10월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어떤 연고로 청음은 광주의 ‘포충사우가’를 지었을까?  


우선 상정해 보자. 청음의 스승이었던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와의 관련. 청음은 열여섯에 월정에게서 배운다. 1585년(선조 18). 그런데 임진란이 끝난 뒤 월정은 제봉의 신도비문을 짓는다. 1608년(광해 즉위년). 관련이 있었을 듯 싶다. 그리고 ‘포충사우가’를 지으면서 되새겨 본 제봉 삼부자의 순절, 충정의 정신. 죽음도 마다한 나라를 위한 그 올곧음이 청음에게도 영향을 미쳐 ‘척화신’이 되게 된 한 인연은 아닐까.


다시 현판으로 돌아가자. 제목과 끝의 연기, 작가를 제하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현판은 전체가 67행이다. 1행은 21~24자. 11행까지가 인(引)이다. 경과를 적은 것. 12행~67행까지 56행은 시가 본문. 인에 보면 제봉공의 아들 고용후가 찾아 가 부탁했음이 나타난다.


“나의 친구 고군 선행(高君善行)이 일전에 나에게 찾아와 해평 윤상공(海平 尹相公)부터 여러 상공들이 그 선대부의 저술한 「정기록(正氣綠)」을 위해 쓴 서문을 보이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그 끝에 붙여 달라고 요청했다.”


‘선행(善行)’은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자(字). 호는 청사(晴沙). 제봉의 막내아들. 1606년 문과 급제. 김상헌이 벼슬에서 벗어나 있을 때 찾아 간 것 같다. 청음의 스승이었던 윤월정이 쓴 <정기록>의 서문도 보았을 터이고, 이미 고제봉의 신도비를 지은 것도 익히 알고 있었던 터. 몇 차례 사양하다가 청음은 장가(長歌)를 짓는다.


포충사우가는 포충사에 현판으로 전한다. 그리고 <정기록>(1617), <광주목지>(1799, 奎10800), <제하휘록>(1839년 편찬, 1963년 간행), <제봉연보>(1839, 1911, 1963), <광주읍지>(1924), <포충사지>(1959)에 실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청음선생집>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광주와 무등산의 입지와 역사성, 제봉의 출자와 행적, 임진란 의병 창의, 의병군의 활약과 순절, 사우 건립과 추숭, 마지막에 다시 광주와 두등산 극락강으로 돌아와 그 정신 계승되기를 축원한다. 장엄하기까지 하다.


우뚝한 무등산 언제까지 그대로 있고
맑고 맑은 극락강도 변함 없는데
이 곳에 살고 있는 모든 효자 현손들도
대마다 좋은 가풍 잘 계승하기 축원하노라.


포충사우가 본문 첫 부분(광주, 호남 명도라 읊고 있다)

포충사우가(褒忠祠宇歌[幷引]) 현판(포충사 전시관, 정선종 사진)


<광주목지>(1799, 奎10800)의 포충사가인(부분). '引'부분은 실리지 않고 본문부터 실렸다.



포충사우가[인을 함께 씀](褒忠祠宇歌[幷引])

 

나의 친구 고군 선행(高君 善行, 晴沙 高用厚)이 일전에 나에게 찾아와 해평 윤상공(海平 尹相公)부터 여러 상공들이 그 선대부의 저술한 <정기록(正氣綠)>을 위해 쓴 서문을 보이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을 그 끝에 붙여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는 나 자신이 친구의 소원을 알맞게 할 수 없어 머뭇거리면서 감히 승낙하지 못했었다. 그 뒤에 선행은 또 건사(建祠)‧사제(賜祭)‧사액(賜額) 등에 대한 시말을 모두 손수 적어 가지고 거듭 찾아와 보이면서 나에게 시(詩)든 문(文)이든 간에 꼭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생각하기를 하찮은 나로서 친구의 사랑을 이토록 끊임 없이 받을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아, 충효의 대절은 본래 명교의 으뜸이다. 선비로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어질건 못나건 상관없는 것인데 하물며 나는 선행과 더불어 예부터 내려오는 통가의 사이에 있음에랴? 정분을 따지면 딴 사람에게 비할 바 아니고 또 요청하는 태도도 아주 진실하여 조금도 외식(外飾)이 없으므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장가(長歌)한 편을 지어 보내는 바다. 그러나 마음에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이 거칠고 고루한 말이 대군자의 거룩한 덕과 지극한 행실을 백분의 일도 발휘하지 못함이다. 하지만 애상하고 측달하고 분만하고 격열한 생각을 저절로 금할 수 없게 된 것만은 내 스스로 망령스리 초성에 겨눌 수 있다고 하겠다. 보는 자는 한갓 월식시(月蝕詩)를 본뜬 것이라고 말하지 말기 바라오 그 노래는 아래와 같다.

 넓고 크고 기름진 광주 들판은
 모두들 호남에 이름난 도시라 하네
 우뚝한 무등산 구름 위에 솟아 있고
 그 밑에는 극락강(極樂江)도 깨끗하다오
 나락‧서속‧기장 온갖 곡식 잘 익은 열매를
 대나무 제기에 담아서 조상께 드릴 수 있고
 또 소나무‧대나무‧자단‧적목‧두충‧측백은
 겨울에도 변치 않는 아름다운 수목이라오
 기둥도 되고 들보도 되고 또 기용(器用)도 되어
 백공(百工)이 경영하는 온갖 자료가 된답니다
 이 물산의 풍부함 만이 한 지방의 으뜸이랴
 백성의 호를 따지면 만호가 넘고
 인구로 따지면 몇 십배라네
 고루 거각 여기저기 즐비한데
 온갖 단청 올려서 어른거리고
 아침저녁 현송소리 끊임없는데
 추로의 남긴 문풍 완연하구나
 어진 선비 몸을 닦고 행실도 삼가
 잇달아 조정에서 드날렸다오
 단군‧기자‧백제 또 고려를 거쳐
 현재의 본조까지 이르는 동안
 몇 천년 세월 몇 억만 사람이
 끊임없이 지나갔는지 모르는데
 왜 유사(遺祠) 고묘(古廟) 두루 남겨서
 내려온 풍성(風聲) 드높이지 못하고
이제야 겨우 창설을 보게 했을까
 정령코 비상한 인물은 비상한 변을 겪은 후라야
 비상한 제도가 생기는가 봐
 아! 우리 임은 참으로 불행했었지
 어째서 그렇게 비상한 시기를 만났었던가
 파계(派系)를 소급하여 깊은 근원 더듬어 보니
 맨처음 시조가 제주에서 났다 하네
 고성이 밝은 정채 드러내고
 원구(圓丘)가 또 영기를 쌓고 쌓아
자손들이 대마다 창성했는데
 바다를 건너온 후 성상이 움직여
 천관에 이르자 관적을 받았다오
 우리 임 탄생할 때 천품(天禀)을 잘 타고 나서
 젊을 적부터 문단을 독차지 했었네
 문장은 마치 청전(靑錢)‧홍속(紅粟)이 가득찬
 태창과도 흡사하고
 또 자전청상이 늠름한
 무기고와도 같았었지
 빠르고 날카로운 붓끝을 휘두를 때
 풍운 조화가 글 속에 다 들어 있었네
 선배들은 기린과 봉황이
 세상에 나왔다고 다투어 가면서 일컬었고
 후생들은 하도와 천구가
 천부에 나타났다고 이상스럽게들 보았다오
 내직으로 목천‧예수‧봉래도산과 같은
 모든 은영을 다 거쳤고
 외직으론 선보(單父)의 탄금(彈琴)과 하양의 종화(種花)와 같은
 풍류혜정(風流惠政)도 모두 지났지
 몇해 동안 좋은 솜씨 소매에 넣고
 산수로 흥을 품고 술마시면서 시만 지었다네.
 하루 아침 느닷없이 조제흑치가
 수천척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자
 맨먼저 닥치는 동래성(東萊城)에서
 번뜩이는 칼머리에 충신의 피가 흘렀네
 천험(天險)으로 된 조령(鳥嶺)도 갑자기 무너지자
 배를 타고 한강을 나는 듯이 건너왔다
 하북(河北)의 안진경 같은 이 하나 없어
 24군 모조리 다 무너지듯이
결국은 금성까지 깨지고 말았다오
 오랑캐 군사 날뛰면서 휘몰아 오는데
 불꽃 같은 그 형세 당할 수 없고
 서릿발 같은 창칼로 춤을 추는데
 대낮에 햇빛도 깜깜해졌지
 임금께서 관서로 파천(播遷)하자
 온갖 백성 앞에 나와 길 쓸게 되고
 칠묘도 못 지킨 채 삼궁은 재가 되었다
 이리도 같고 독사도 같은 저 오랑캐들은
 이를 갈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사람만 잡아 먹더니
 서울 안 길거리에 피가 흘러서
뒤끓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네
 호남에 십만이 넘는 근왕병은
 아깝게도 용렬한 장수에게 맡겨지고
 행궁의 호위는 너무도 조촐하여
 완전한 무영(武營)하나 없었다
 중동은 밤낮으로 두 눈이 빠질 듯이
 남쪽을 바라보면서 군사만 기다렸는데
 용인에 패진한 군사 다시 수습할 수 없어
 원융은 그만 도망쳐서 구영(舊營)으로 되돌아 갔었네
 호남 사람 부자형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모두들 원융을 찢어 죽이려 했지
 누가 다시 각 고을에 호령을 내려
 흩어진 패잔병 불러 들일까
 글렀구나 글렀구나 나라 일 다 글렀구나
 천주가 넘어지고 지유도 끊어졌네
 우리 임 이 때를 당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눈물만 흘리고 목이 메어 말을 못했지
 맹서코 그 몸이 죽을 때까지
 적을 쳐서 임금께 보답하려고 했네
 혼자 서서 사방을 바라보고 한 번 외치니
 의기 있는 사내들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우뚝한 대장단(大將壇) 맨 먼저 쌓고
 다음에는 대장기(大將旗) 높이 세웠네
 말 잡고 소 잡아 천지신명께 제사 지낸 뒤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군사를 일으켰었다
 옥당(玉堂)에서 휘두르던 서까래 같은 붓을 잡고
 일편단심 다 털어내서 격서(檄書) 한 장 번뜩 썼네
 진중에 장병들은 머리칼이 갓을 찌르고
 막하(幕下)에 서생들은 눈물이 옷자락 적셨다
 군사란 본래 정직한 자가 씩씩한 것인데
 하물며 우리 임 마음 남이 다 감복함에랴
 깃발이 질서 있고 진법도 엄숙하여
 의병 소문 멀리 떨쳐 강적도 겁을 냈다오
 참창(攙槍)을 한꺼번에 다 소탕(掃蕩)할려고
 맨먼저 금산으로 쳐들어 갔었지
 우뚝한 적의 진영 산더미 같은데
 수많은 적의 떼도 보리가시락과 같았었다
 우리 임 말에 내려 의자에 앉고
 좌우에 문무의사(文武義士) 차례로 벌려 섰네
 북소리 한 번 높이 울리자
 차거(硨磲)‧나팔‧대각(大角)‧소각(小角)도 뒤따라 일어섰었지
 우리 군사들은 백포(白袍)와 소개(素鎧)‧오호(烏號)와 황간(黃間)
 왜놈들은 아롱진 옷과 깎은 머리, 짧은 칼과 재빠른 포로써
 서로 맞부딪쳐 용맹을 보였는데
 새매처럼 드날리고 곰과 범처럼 갈기고 칠 때
 백리 안에 맹수들 다리를 떨면서 도망가고
 나는 새들도 움츠리면서 울음이 그만 끊어졌다네
 온종일 싸웠어도 싸움이 끝이 없어
 군사가 모두 지쳤건만 기운은 오히려 떨쳤었지
 창을 휘두르면서 해를 가리켜도 해가 물러서지 않고
 채찍을 들고 말을 두들겨도 말은 엎어지기만 했네
 하느님은 순한 자를 돕지 않고 누구를 도왔었는지
 하느님 하느님 왜 순한 자를 돕지 않고
 결국 무후의 진영에 장성(將星)이 떨어지도록 했었나요
 아! 이 전쟁이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다 있지만
 부자가 한날 한시에 순국한 일은
 옛날에는 변호이었고 지금은 우리 임 뿐이었네
 까마귀와 솔개도 감히 침노할 수 없고
 여우와 삵괭이도 감히 범접 못했지
 바람과 구름만 쓸쓸한데
 시냇물 소리도 구슬픈 듯하다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하고
 저녁이면 붉은 놀만 떠 있구나
 거치러진 들판에 밤낮으로
 오직 들린다는 것은 귀신의 울음 뿐이라오
 복시와 대친으로 날마다 잇달아 와도
 우리 임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 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상제께 하소연하여
 왜놈들 씨없이 쳐버리도록 했지
 그 당시 씩씩한 기운 겹겹으로 쌓여서
 겨울철에도 무지개가 늘 일어났다오
 임금께서 환궁하여 재조를 경축하자
 공신의 기린각에 단청이 빛났었네
 화려한 집 새로 짓고 노래하며 춤을 출 때
 왼 쪽에는 아내요 오른 쪽에는 자제들이었지
 그런데 그 당시 수양성(睢陽城)에서
 함께 죽은 장허(張許)의 이름만은 빠졌었다
 호남에 부로의 마음 무엇으로 위안하며
 후세의 충성과 의리도 무엇으로 권장할 거요
 이래서 모든 선비들 상소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사당을 세웠지
 잇따라 나라에서 사액을 내리고
 좋은 날 가려 예관 보내 치제했었네
 제봉산(霽峯山) 바로 앞인 남향판에
 재실(齋室)도 깨끗하고 제수도 정결한데
 고을 사람 구경와서 온 마을을 메우게 되자
 어린애와 부인들도 하도 감격해 눈물 뿌렸네
 거룩한 충절 한 시대에만 존경받으랴
 씩씩한 이름 썩지 않고 길이길이 전해져서
 끝없이 먼 세대 내려가도록
 듣는 사람 모두들 임의 마음과 같이 할거요
 우뚝한 무등산 언제까지 그대로 있고
 맑고 맑은 극락강도 변함 없는데
 이 곳에 살고 있는 모든 효자 현손들도
 대마다 좋은 가풍 잘 계승하기 축원합니다.


1614년 갑인년(광해 6) 10월 그믐날 안동인(安東人) 김상헌(金尙憲)이 재배하고 짓다.


*포충사우가는 국역문은 여러 종이 있다. <포충사지> 국역문 인용.
<정기록>(1617 ; <국역 제봉전서>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325~331쪽)
<제하휘록>(1839년 편찬, 1963년 간행 ; <국역 제봉전서>하, 87~93쪽)
<제봉연보>(1839, 1911, 1963 ; <국역 제봉전서>하, 400~407쪽)
<광주읍지>(1924 ; <국역 광주읍지>, 광주민속박물관, 2004, 35~40쪽)
<포충사지>(1959 ; <국역 제봉전서>하, 277~2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