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99 - 1603년의 사제문(賜祭文), 한석봉 필 '褒忠祠' 편액, 포충사 기록유산1 현판

향토학인 2017. 3. 19. 20:47

인지의 즐거움099

 

1603년의 사제문(賜祭文), 한석봉 필 '褒忠祠' 편액

광주 포충사 기록유산1 현판, 금석문-

 

김희태

 

광주 포충사(褒忠祠) 현판(懸板)과 편액(扁額)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다. 원사우의 신실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과 전시관에 전시된 많은 수의 기록유산. 포충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지정신청서 작성에 참여한 길.

 

자주 볼 수 없는 원사우 신실 안에 7개의 편액과 함께 포충사 중수기 등 20개의 기문 현판이 보존되어 있었다. 국왕이 내린 제문을 새긴 사제문(賜祭文, 1796, 1812, 1832, 1892)(목록 02)과 비망기 등 관찬 기록, 9종의 포충사 중수기, 견승헌 등 건물 기문과 제영, 포충사 보존계와 방명록 등 다양하다.

 

유물전시관인 정기관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포충사우가(褒忠祠宇歌),(목록 03) 국왕의 사제문(賜祭文)(목록 01) . 포충사우가는 1614년에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이 지은 글. 사제문은 열성조사제문다록(列聖朝賜祭文茶錄)’이라는 제하에 5건이 한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선조 36(1603), 선조 38(1605), 영조 10(1734), 영조 18(1772). 원 사우에 있는 사제문(02)4종이니, 9종의 사제문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일문충효 만고강산(一門忠孝萬古綱常) 편액(목록 25)은 의친왕(春菴 李堈, 1877~1955) 글씨이다.

 

몇 가지 들춰보자. 먼저, 1603년 사액(賜額) 당시의 편액, ‘褒忠祠’(목록 23). 해서체로 끝에 萬曆三十一年(1603)六月 日 宣賜기록이 있어 16036월 사액 당시 편액임을 알 수 있다. 글씨는 당시 명필가로 가장 뛰어났던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 필이다. <포충사지>(권하 원우조)에도 사우는 3칸 기와집 1, 액호는 석봉 한호 글씨(祠宇 三間 瓦葺一棟 額號 褒忠祠 石峯 韓濩筆)”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편액에도 선사(宣賜)’ 기록이 뚜렷하다.

 

함께 있는 편액은 영당(影堂, 무진, 6세손 경삼), 전사실(典祀室), 성인문(成仁門), 청사영당(晴沙影堂, 宋成鏞), 충효문(忠孝門, 槿園 具哲祐[1904~1989]), 견승헌(見承軒, 송운회[1874~1966] 글씨), 충효당(忠孝堂, 윤순거[1596~1668] 글씨)이다.


다음으로 사제문 현판. <列聖朝 賜祭文茶錄>. 포충사를 왕명으로 건립하고 사액된 뒤 왕이 내린 사제문도 2종의 현판에 9점이 새겨 있다. 1종은 전시관, 1종은 원사우. 1603년부터 1892년까지. 건립 이후 조선왕조 후기 전 기간을 국왕의 사제문이 내려지고 예관이 파견되었던 것. 역대 예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32년의 경우 금산의 전망 유허에 제를 올린 때 사제문. 1623년 사제문의 예관은 밝혀지지 않는다.

 

- 1603(선조 36) 정랑 趙曄

- 1605(선조 38) 정랑 尹光啟

- 1734(영조 10) 부수찬 兪健基

- 1772(영조 48) 예조정랑 高益擎

- 1796(정조 20) 원임 좌승지 徐瀅修

- 1812(순조 12) 광주목사 洪養黙

- 1832(순조 32) 영광군수 韓羲運(금산 戰亡유허),

- 1892(고종 29) 茂朱부사 閔致純

 

1614년 김상헌의 포충사우가(목록 03)는 인지의즐거움 105에 내력을 적었다.

 

또 하나 중요한 기록. <辛未八月初十日 謁聖時下泮宮備忘記>(목록 04). 1691(숙종 17) 기록. 처음에는 좀 생소한 내용이라 신미년을 조선조 말기 1871년쯤으로 추정했다. 국가 사적 신청서에도 ‘1871?’로 표기했는데, 최근 자세히 보니 1691년이었던 것. 국왕 숙종이 내린 전교문(傳敎文). 일종의 특별법과도 같은 것. 흥학과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천명한 당부의 글로 중외의 학관(學官)에 반포하도록 하는데, 그 현지의 사례로 포충사에 판각문이 남아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지탱의 근간, 흥학과 인재양성의 국왕 반포문이 사액 사우 포충사에 있었는데 지나쳤다. 기억을 되살리게 된 것은. 장성 필암서원에도 동일 내용의 현판이 있었는데, 이와 비교해 보니 내용은 같았다. 필암서원 현판은 1710년 판각 게시한다는 내용이 끝에 새겨 있다. 포충사 현판이 반교 당시 거라면 더 원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16918월에 숙종이 문묘를 배알(拜謁)하고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은 뒤, 다음날 전교를 내려 흥학과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천명한다. <조선왕조실록>이날(1691.8.10) 새벽에 임금이 하련대(下輦臺) 에 나아가 먼저 비망기(備忘記)를 나려 여러 선비들에게 게시하게 하여 전교를 내리자,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성교(聖敎)를 중외(中外)의 학관(學官)에게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는 기록(<숙종실록> 23, 숙종 17[1691] 8월 임진[10])이 있어 1691년의 전교를 중외 학관의 반시 차원에서 포충사에도 게판(揭板)한 것.


수량으로 가장 많은 것은 중수, 중건에 관한 기문류. 1879년의 <포충사 중수기(褒忠祠 重修記)>(목록 05)가 가장 앞서고 1919~1933, 1970~1974년 사이로 크게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1970년대 초반에 중개수가 많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금석문은 5종인데, 포충사 묘정비(목록 36)11대손 고정주가 지어 1933년에 세웠다. 원래 경내에 있었으나 현재는 외삼문 밖에 있다. 곁에는 한글 해설 묘정비(1979, 임창순 찬)가 있다.

 

<호남 순국열사비>(목록 38)는 조선시대 말기~대한제국기의 항일 의병활동을 한 호남 지역의 순국 열사 비이다. 앞 면의 큰 글씨는 전 참판 이시영(李始榮)이 썼으며 1951(단기 4384년 신묘) 4월 충효당 앞에 호남순열모의계중(湖南殉烈慕義契中)에서 세웠다. 충효당은 현재의 외삼문 자리 부근에 있던 강당 건물이다. 음기는 이산 고광열이 지었다. 창의제공(倡義諸公, 고광순, 기삼연, 고제량, 양회일, 김준, 정시해, 양한묵, 이순식, 이석용, 심수택, 전수용, 최종익, 안규홍, 양한규, 김원국, 고제남), 취의제공(取義諸公, 전재건, 장태수, 황현, 백인수, 김기순, 김영상, 김상각)의 명안(, 성명, 본관)을 기록하였다.

 

금석문으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忠奴 鳳伊貴人之碑>(목록 36)이다. 별다른 비문 내용도 없고 세운 연대나 세운 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봉 고경명의 의병 전쟁길을 따라 나섰던 노비를 忠奴로 예우하고 있음을 본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사람이건만 사람 축에 들지 못하고 일종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국난을 당해 그들은 기꺼이 주인을 따라, 국가를 위해 신명을 다했고, 또 우리 선조들은 그들을 예우했던 것이다. 봉이와 귀인은 제봉 고경명을 따라 나섰다가 살아 돌아 온 뒤 다시 제봉의 아들 고종후를 따라 나섰다가 진주성에서 함께 순절하였다. <포충사지>에 충노 사실(忠奴事實)과 송재직의 글, <書忠奴鳳伊貴人事蹟後>(1899)가 있다.(<국역 제봉전서>, 357~358)

 

포충사에 있는 현판류 기록(1603~1974) 이후 포충사는 큰 변화를 하게 된다. 1976년에 정화사업을 추진하는데, 처음에는 원사우를 중심으로 정비를 계획하여 문화재관리국 허가와 지원을 받아 국비보조 문화재사업으로 추진한다. 그러다 대통령 지방순시 때 건의가 되어 국가 사업으로 포충사 정화계획이 변경 확대되기에 이른다. 결국 원 사우는 일부가 정비되고 새 사우를 현대 재료로 건립하게 된다. 국가 사업으로 했지만, 오히려 정체성이 모호해졌다고나 할까. 그러나 다양한 현판류 기록유산은 포충사의 역사성을 오롯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광주 포충사 기록유산1 현판, 금석문- 목록 

종별

연번

명칭

연대

찬서(撰書), 禮官

비고

현판

01

列聖朝 賜祭文茶錄

1603, 1605

1623, 1734 1772

禮官 정랑 趙曄, 정랑 尹光啟, -, 부수찬 兪健基, 예조정랑 高益擎

02

(列聖朝 賜祭文茶錄)

1796, 1812

1832, 1892

예관 원임 좌승지 徐瀅修, 광주목사 洪養黙, 영광군수 韓羲運(금산 戰亡유허), 茂朱부사 閔致純

03

褒忠祠宇歌 [幷引]

1614

淸陰 金尙憲(1570~1652)

04

辛未八月初十日 謁聖時下泮宮備忘記

1691

 

 

05

褒忠祠 重修記

기묘 1879

경자 1960

高時源(8), 추기 高允柱

06

褒忠祠 重修記

기미 1919

高光洙

07

褒忠祠 重修記

병인 1926

高鼎柱(1863~1933)

 

08

褒忠祠 重修記

정묘 1927

吳駿善(18511931)

09

褒忠祠 重修記

정묘 1927

高光善(1855~1934

 

10

見承軒記

기사 1929

高光善(1855~1934)

11

褒忠祠 重修記

계유 1933

金寗漢(1878~1950

12

見承軒 詩[竝小序]

계유 1933

高光瓚

13

褒忠祠 保存契序

계유 1933

李範世

14

(褒旌記)

 

春菴 李堈(의친왕, 1877~1955)

15

褒忠祠 重修記

경술 1970

高允柱

16

褒忠祠 重修事實記

경술 1970

高光七

17

褒忠祠 重修記

경술 1970

權龍鉉(1899~1988)

 

18

褒忠祠 重修及晴沙影堂重建事實記

갑인 1974

高云錫

19

晴沙影堂 重建記

갑인 1974

金潤東

20

(院任名案)

병진

원장 金相晉

 

21

忠院 重修費出義各家芳名

 

 

 

22

忠烈公 年譜所 同苦錄

기해

*高公鎭[穉允 癸丑]

 

23

四靈序

 

 

 

편액

24

褒忠祠

1603 宣賜

 석봉 한호

 

25

一門忠孝 萬古綱常

 

春菴 李堈(의친왕, 1877~1955)

 

26

影堂

무진

六世孫 慶三 六歲書

 

27

典祀室

 

 

 

28

成仁門

 

 

 

29

晴沙影堂

 

宋成鏞 1913-1993

 

30

忠孝門

 

槿園 具哲祐(1904~1989)

 

31

見承軒

 

 송운회 필

 

32

忠孝堂

 

 윤순거 필

 

기문

33

상량문

 

柳思敬(1556~?)

34

중수 상량문

 

고광렬

35

개기 축문

 

현판 무

금석문

36

포충사 묘정비

계유 1933

고정주

37

충노 봉이귀인지비

조선

 

 

38

호남 순국열사비

1951.04

전면글씨 이시영, 음기 고광렬지음

39

포충사 묘정비문

1979.12

임창순 지음, 김병남 씀

40

포충사 정화기념비문

1980.01

강주진 지음, 구철우 씀

*비고 표기는 <국역 제봉전서>에 있는 기록

 


한석봉이 쓴  포충사 편액(1603년 宣賜)

<포충사지>에 기록된 원우 규모. 사우는 3칸인데 액호는 석봉 한호 필이라 기록되어 있다.

영당 편액. 무진년 6세손 慶三의 여섯살 때 글씨라는 기록이 있다.


충효당 편액, 윤순거(1596~1668) 글씨

견승헌 편액, 송운회(1874~1966) 글씨

전시관에 걸린 <열성조 사제문다록(列聖朝 賜祭文茶錄>, 1603년 사액 이후 역대 국왕의 사제문이다. 현판 2종 9건이다.


04 신미팔월초십일 알성시하 반궁 비망기(謁聖時下泮宮備忘記)(1691)

 

! 학교(學校)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를 기르는 것은 대개 바른 학문을 연구하여 착한 것을 가리고 몸을 닦아서 인륜에 근본하고 물리에 밝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글을 짓고 녹(祿)을 구하기만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예전에 전손사(顓孫師 : 공자의 제자. 자는 子張)가 녹을 구하는 법을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많이 들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아서 위태롭게 여기는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배우는 것이 넓고 가리는 것이 정하고 지키는 것이 요긴한 것일 수 있다면, 녹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格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이에 나는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해 개탄하지 않은 바 없다.

또 생각하건대, 예전에 안정 호공(安定胡公, 중국 宋代 胡瑗. 안정은 호)이 소호(蘇湖)의 교수(敎授)이었을 때에 부지런히 아칙(雅飭) 하여 그 제자의 사기(辭氣)가 여느 사람과 달랐는데, 더구나 저 재주가 많은 여러 선비가 아주 가까이 있어 위아래의 뜻이 온화하게 유통하니, 인도하여 도와주며 격려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아아, 너희 여러 선비는 내 가르침을 공경히 들어 잘 지켜서 잊지 말고 점점 연마하여 성취하면, 그것이 국가와 사문(斯文)의 다행임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크게 성심을 내어 마땅히 각각 맹성(猛省)하도록 하라.

이날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성교(聖敎)를 중외(中外)의 학관(學官)에게 반시(頒示)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691년 반궁 비망기. 장성 필암서원에도 같은 시기 반교문이 걸려 있다.


05 포충사 중수기(褒忠祠 重修記)(1871)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의 원우는 특별히 조가에서 치제의 은전을 내려 백세토록 변함이 없었고 충의를 포장하는 거룩한 뜻이 천고에 표출했으니 그 후손된 자로서 은의에 감격함이 어떠하겠는가.

세월이 오래되어 동우가 장차 퇴락하게 됨에 문중의 여론이 이를 근심하여 중수하기로 의결하고 불초로 하여금 그 공역을 주간하게 하였다. 지난 정사년에 있었던 중건의 역사는 내가 몸이 건강하여 동독할 수 있었으나 이제 노쇠했으니 감당할 도리가 없어 이를 사절했으나 굳이 간청하므로 마지못해 다시 공역을 주간하게 되었다. 공사에 착수한 지 겨우 60여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으니, 천우신조하여 일이 순성하였고 또는 여러 집사들의 진심갈력함을 힘입었던 것이며, 재정에 이르러서는 온 문중이 동심협력하여 모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낙성하는 날에 여러 종인들이 두루 돌아보고 기뻐하여 진선미(眞善美)를 이루었다 말하거늘 내가 이르기를,한갓 원우의 면모가 일신함만 알고 종손 광국(光國)의 숨은 노력에 기쁨은 알지 못하는가? 중수와 숨은 공이 일시에 겹친 즉 이는 우연한 경사가 아니다.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인하여 개탄하기를,왜적이 졸지에 쳐들어와 수년에 걸쳐 방자하기 이를데 없으니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어느 누가 이를 원수로 여겨 섬멸하려하지 않으리요마는 우리 가문으로서는 더욱이 남다른 감상이 있는 것이다. 성명께서 위에 계셔 포장하는 은전이 앞뒤로 이 같이 융숭하였고 원우의 중수가 또 이때를 즈음했은즉 흉적의 형세가 좌절됨을 불일내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연을 기록하기 요청하거늘 감히 문학의 졸렬함으로써 사양하지 못하고 위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고종 16년 기묘 (1879) 420일에 8세손 시원(時源)은 삼가 기록함.

*<국역 제봉전서>


1871년 포충사 중수기

*사진 정선종, 김희태, 성대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