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97 - 1666년, 1744년, 광주 백천사를 찾은 선비들

향토학인 2017. 3. 19. 05:10

인지의 즐거움097

 

1666년, 1744, 광주 백천사를 찾은 선비들

 

김희태

 

1744년

동복과 광주의 네 선비

백천사에 머물며

한 구절씩 읊는다

 

병암 하영청

현강 유승

덕중 최락

덕관 최옥

 

헤어질 때

최옥이

그 아쉬움을

남긴다

 

백천사

그 터를 찾아

나들이를

해야겠다.

 

보물 제110호로 지정된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이 있다. 법원 앞. 동구 지산동 448-4번지 일원. 이곳을 백천사지로 보고 있다. 기록은 조금 다르다.

 

<광주읍지>(1899, 규장각 소장, 10787)에는 장원암은 광주 동쪽 10리에 있는데 무등산 북쪽 장원봉 아래이다. 일명 백천사이다.(壯元菴 在州東十里 無等山北壯元峯下 一名柏川寺)”라 하여 광주읍치에서 동쪽 10리 거리이고 장원암백천사를 같은 사찰의 이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읍지에서는 백천사는 보이지 않고 장원암만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1759) 광주 사찰조에서는 장원암은 광주 동쪽 5리 무등산에 있다.(在州東五里 俱在無等山)”는 기록, 이 보다 약간 뒤의 <광주목지>(1799) 사찰조에는 장원암은 광주 동쪽 10리에 있는데 무등산 북쪽 장원봉 아래이다.(壯元庵 在州東十里 無等山北壯元峯下)”라는 기록이다. ‘장원암만 나오면서 거리도 5리와 10리로 다르다.

 

몇 조사를 통하여 지산동에는 세 곳의 절터가 조사되었다. 먼저, 신양파트호텔이 들어선 지역 곁은 장원암지로 보고 있다. 지산동 20번지 일원.

 

또 한 곳은 무등산 북서쪽에 조성된 지산유원지의 깊숙한 골짜기에 있는 절터. 제비등 아래에 조성된 무등산 골프연습장 아래쪽 나지. 지산동 산63-1번지 일원. 신흥사찰인 동원사에서 남쪽으로 100~150m 정도 거리.

 

그리고 보물 오층석탑이 들어서 있는 곳. 첫 번째의 절터(장원암)가 중심이다가 뒤에 세 번째(석탑 소재지)로 옮겨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사는 <무등산 불교유적>(향토문화개발협의회·광주광역시, 1987), <광주 문화유적분포지도>(전남대박물관·광주광역시, 2004), <한국의 사지>(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11)

 

그런데 백천사 관련 기록이 몇가지 더 확인된다. 광주와 인근 고을 선비들이 나들이를 하고 시회를 하고 방회를 하는 문화공간이자 교류처.


1666년 광주목사와 여섯 선비의 사마 방회


병오년(1666, 현종 7) 1213광주 목사 윤변(尹抃) 7인이 모인 사마(司馬) 방회(榜會) 기록과 제영 방회는 과거시험 합격자들의 모임. 조선 왕조를 지탱했던 인재들의 등용문 과거. 특히 동기(同榜)들은 재조(在朝)건 재야(在野)건 활동 기간 내내 끈끈한 정을 이어간다. 때로는 계회도로 남기기도 한다.

 

백천사의 병오년 모임은 예비시험격인 사마시 합격자들의 방회. 합격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만나서 대소사를 논의하고 시를 읊었던 것.

 

첫장에 명안. 직과 성명, 생년, , 사마 입격 연도. 본관을 기록하고 이어 연작 제영. 목사 윤변(파평인), 진사 이수약(李守約, 星山人), 생원 김오(金浯, 光州人), 전현감 고두기(高斗紀, 長興人), 진사 박세빈(朴世彬, 竹山人), 진사 이익혐(李益馦, 光州人), 생원 박광후(朴光後, 順天人)

 

광주 목사 윤변은 쉰 한 살(1616년생). 1635년 생원 증광시에 합격한 뒤 1660년에 경자 식년시 급제. 166510~166812월 광주목사 재임. 한 살 많은 진사 이수약 등 연배도 엇비숫한 선비도 있다. 그러가 하면 끝자리 박광후는 정축생(1637, 인조 1)으로 갓 서른. 백천사 방회가 있던 그해 진사시 입격. 노소 동영(同詠)이다.


박헌가(朴獻可, 1713~1772)도 백천사에 들른 듯 싶다. ‘백천사회(柏川寺會)시가 문집인 <활효재집(活孝齋集)> 1에 보인다. 보성군 미력면 반룡 마을에서 능주, 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로 이거한 함양박씨 박유(朴瀏, 1627~1675)의 증손.

 

1744년, 광주와 동복의 네선비, 담론하고 수창하다.


동복 선비 병암 하영청(屛巖 河永淸, 1697~1771)의 문집에 광주 선비들과 백천사에 머물며 지은 시가 있다. 병암, 하영청, 현강 유승(玄岡 柳乘, 1677~1746), 덕중 최락(德中 崔洛), 덕관 최옥(德灌 崔) 네 선비. 시의 제목에 '갑자' 연기가 있어 1744년, 영조 20년임을 알 수 있다. 병암은 실학 대가 규남 하백원(1781)1844)의 증조부.


광주 백천사에서 현강 상사 유승과 친구인 덕중 최락, 덕관 최옥의 형제와 편안하게 문장을 담론하고 이어 연구를 읊다.(光山 栢川寺 訪玄岡柳上舍乘甫 崔友洛(德中) (德灌)兄弟 穩和論文仍成聯句[甲子])


여윈 말로 먼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기이한지[현강]

늘그막에 때때로 텅 빈산에 쓸쓸히 앉아있네

금일에도 옛날처럼 등불아래 담론을 하니[덕중]

거울 속 안색은 늙어 쇠약하기까지 하네


바둑을 손수 대적하면서 세 번을 연거푸 두고[덕관]

술로 정이 깊어져서 백 잔의 술을 권하였네

인간 세계에 좋은 일들이 이처럼 있을 수 있을까[병암]

내일 아침 돌아갈 때 소매를 더디게 끌겠네[현강]


羸驂遠訪一何奇(玄岡)

歲暮空山悄坐時

燈下談論今似昔(德中)

鏡中顔髮老還衰

棋因手敵連三局(德灌)

酒爲情深勸百巵

勝事人間寧有此(自詠)

明朝歸袂晩敎遲(玄岡)


현강 유승이 먼저 읊는다. 예순 여덟의 나이, 제일 연장인듯 싶다. 이어 덕중 최락, 덕관 최옥, 그리고 마지막 2연을 병암 하영청과 현강 유승이 마무리한다. 텅 빈산 절집에서 쓸쓸했는데 예전처럼 담론하고 바둑을 두고. 백잔의 술을 권하고. 이처럼 좋은 일이 인간세계에 있을까. 마흔 여덟 병암 하영청이 읊는다. 내일 아침 떠날 때 소매를 부여잡겠다는 현강 유승. 아마도 절에 머물고 있던 선배 문사 문안차 와 담론하고 바둑두며 한 구절씩 수창한 것 같다. 그때는 무슨 담론이었을까. 


밤샌 담론과 수창. 병암 하영청은 아침에 다시 길을 나선다. 덕관 최옥은 못내 아쉬워 한다.아마도 절집에 유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저기 서찰도 보내고 글을 지으면서 예 글을 뒤적이곤 있었지만 찾는 이는 없고.  웬지 허한 쓸쓸함을 떨치지 못했는데 그대가 와서, 눈쌓인 길을 와서 반가웠는데 또 이별이라니.


백천사에서 하병암과 이별하며 받들어 주다


정성을 다해 글을 써서 조석으로 보내고

언제나 책상 맡에서 옛 글을 보고 있었네

쓸쓸한 선가의 창가에 방문한 자 없는데

눈 쌓인 길을 방문한 자 다행히 그대 있네

 

栢川寺 奉贈 河屛庵爲別[崔沃 德灌)

磨丹漬墨送朝曛 

凡凡床頭閱古文

禪窓閒寂人無間

雪露相尋幸有君


1955년 오층석탑에서 금동제 사리합 출토, 1959년 동종과 촛대 확인


이쯤되면 백천사는 꽤 경관 좋고 볼만하고 절집도 여러 채 있던 절이었던 듯싶다. 지금의 지산동에 세곳의 절터가 있는데, 보물 오층석탑이 있는 공간이 백천사 중심사찰로 보인다. 1950년대 유물 출토 관련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50년대에는 백천사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눈 것. 1955년에는 백천사지 오층석탑을 긴급 보수하기 위해 공사하던 증 3백년전 국보를 발견했다는 기사. 금동제 원형 사리합(舍利盒, 직경 24센티, 높이 9센치)과 금동제 사각형 유비(遺碑, 상하 양편 반원형의 넓이 2센치, 길이 16센치). <경향신문> 1955823일자.

 

1959년에는 지산동에서 주택지를 정지하던 중 신라시대 유물로 고증되는 금이 섞인 동종 1, 불상 앞에 꽂는 촛대 2점 도합 3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발굴지가 옛날 백천사(栢川寺) 자리이기 때문에 또 다른 유물이 발견될지 모른다는 기사. 이 종은 약 16백년 전의 유물로 종의 표면에는 당초문(唐草紋)과 좌불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크기는 높이가 17센치, 상부 직경이 10센치, 밑 직경이 13.5센치로서 크기는 대단치 않으나 무늬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 했다. <동아일보> 1959818일자. 두 번 출토된 유물이 다 서울로 이송된다는 기사이다.

백천사지 오층석탑은 1935년 5월 24일 보물로 지정된다. 1955년 국보 제181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보물 제 110호가 된다. 이때 까지 지정명칭은 "광주 동 오층석탑". 문화재명칭부여기준이 만들어지면서 2010년 12월 27일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光州 芝山洞 五層石塔)"으로 바뀐다. 이제라도 제이름을 찾아야 한다.

   

백천사 절터는 도심에 묻혀 있고 사역은 겹겹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광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내놓을만한 통일신라 오층석탑이 있다. 1950년대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 유물 발견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광주는 물론 인근 고을 사람들이 기도처로는 물론 시회나 방회 등 문화공간이 되었다. 그 자료를 모으고 해석하고 알리는 일. 거기에 구전까지 곁들여 서사(敍事)로 풀어 내면서 지금의 시대에 맞게 사적기를 만드는 것, 또 하나 우리의 책무이다.

 

* 병암 하영청의 문집 국역본을 후손이신 하상래 규남박물관 이사장이 보내와 이를 인용해 몇 줄을 보태다.(2019.04.30)

* <병암유집>(국역), 2018, 옮긴이 이영숙·나상필, 규남박물관·전남대학교·호남문화사상연구원·화순군



병암 하영청(屛巖 河永淸, 1697~1771)의 문집 병암유고(경인문화사, 1977, 영인본)


*1666년 백천사 사마 방회 자료, 1955년과 1959년의 신문기사는 나주 윤여정학형이 검색해 보내오다.

백천사 오층석탑 긴급 보수공사 중 사리합과 유비 발견 기사

(<경향신문>, 1955.08.23일자,  네이버 라이브러리 검색, 화면 캡쳐)

백천사지에서 동종과 촛대 발견 기사(<동아일보> 1959.08.18일자, 네이버 라이브러리 검색, 화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