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0 - 돌에 새겨 선비들 서로 하례(賀禮)하네, 최산두 유허비, 1775년

향토학인 2017. 3. 20. 01:52

인지의 즐거움100

 

돌에 새겨 선비들 서로 하례(賀禮)하네

광양 신재 최산두 유허비, 1775

 

김희태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31536)선생은 조선전기 호남사람의 형성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기묘사회 때 유배된 기묘명현이다.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학맥을 이었고, 최신재의 문하에서 동국 18현인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수업하였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통감부(通鑑賦)의 문장이 호탕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불리었으며 조광조(趙光祖), 양팽손(梁彭孫), 기준(奇遵) 등과 함께 기묘사학사(己卯四學士)로 일컬어졌다. 학자이자 문인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3∼1536)선생은 조선전기 호남사람의 형성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기묘사회 때 유배된 기묘명현이다.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의 학맥을 이었고, 그의 문하에서 동국 18현인 하서 김인후(1510~1560)와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수업하였다. 과거 시험장에서 지은 「통감부(通鑑賦)」의 문장이 호탕하여 널리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불리었으며 조광조(趙光祖), 양팽손(梁彭孫), 기준(奇遵) 등과 함께 ‘기묘사학사(己卯四學士)로 일컬어졌다. 학자이자 문인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최산두는 자가 경앙(景仰), 호는 경앙(景仰), 신재(新齋), 농중자(籠中子), 나복산인(蘿葍山人)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백운산 기슭, 봉강면 부저리 월곡마을에서 태어났다. 1513년 31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저작, 박사, 수찬, 사간원 정언, 보은현감, 경연 검토관, 사헌부 지평,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지냈다.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이 순천에 유배중일 때 그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상경하여 조광조(1482-1519), 한충(韓忠, 1486-1519), 김구(金絿, 1488-1533), 김식(金湜),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1481-1541)등과 더불어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사귀며 경학을 강구하니 당시 사람들이 '낙중군자회(洛中君子會)'라 하였다 한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동복으로 유배되어 강학하며 지냈다. ‘적벽’을 명명하였고 이곳에서 김인후와 유희춘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주자학을 이념으로 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코자 하였다. 그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을 보자.

 

유고실기로 <신재선생실기>(1870년, 기정진 서문)가 전해지는데 부(賦) 1편, 시(詩) 18수, 서간 11편이 있다.

 

유물은 옥홀과 고문서이다. 옥홀(玉笏)은 중종 8년(1513)에 최산두에게 하사된 것으로 ‘일인유경보명유신(一人有慶寶命維新)’이란 글이 새겨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1974. 9. 24 지정. 백패 교지(1504년, 연산군 10), 홍패 교지(1513년, 중종 8)와 사령장(敎牒) 12점이 전한다.

 

유적은 학사대, 묘소, 신도비, 봉양사, 사적비, 유허비, 도원서원, 부조묘가 있다. 학사대는 어려서 학문을 했다는 곳으로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계곡에 있다. ‘白流洞’ 學士臺‘가 음각으로 새겨 있다.

 

묘소는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 저곡마을과 부현마을 사이의 화전봉 능선 중턱에 있다. 원형 봉분으로 크기는 6.5m, 상석, 석인상과 망주석, 묘비를 갖추고 있다. 곁에 재실인 봉양재가 있다. 정면 4칸의 팔작지붕집. 신도비는 묘소의 능선아래 길가에 있다. 1921년 5월에 안동(安東) 김영한이 지었다. 전체 높이는 204cm, 비신 높이 159cm.

 

봉양사(鳳陽祠)는 광양읍 우산리에 있다. 1578년께 광양현감 정숙남의 주도로 향교 곁에 세워 최산두와 현감을 지낸 박세후를 배향했다. 정유재란 때 불탄 뒤 복건하였고 1680년(숙종 6) 중수하였다. 이어 1775년(영조 51)에는 허정, 정철진, 서윤화 등의 주도로, 1828년(순조 28)년에는 정한기, 서현두(서윤화의 손자) 등의 주도로 중수하였다. 대원군 때 헐리었다가 1967년 봉양사복설기성회가 조직되어 1977년 들어 현 위치에 복설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맞배지붕집이다.

 

봉양사 입구에 하마비(1637년 5월 金汝鑑 鄭興門 徐尙卨 건립), 신재 최선생 유허비(1775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225호)와 봉양사 사적비가 있다. 사적비는 1828년(순조 28)에 강재 송치규(1759~1838)가 지었고 1856(철종 7)년에 세웠다. 글씨는 수종재 송달수(1808~1858)가 썼다.

 

도원서원(道源書院)은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산915번지에 있는데,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이다. 1668년(현종 9년) 세워 신재 최산두,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한강 정구(寒岡 鄭逑),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 4위를 배향해 사현서원이라고도 불렀다. 1688년(숙종 14)에 사액되었으며 1697년(숙종 23), 1739년(영조 15)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헐렸다가 1977년 신실을 복설하였다. 사당, 내삼문, 동재, 서재, 외삼문, 유허비(1975년), 묘정비(1988년) 등이 있다.

 

도원서원 겁립은 최신재의 동복 유배와 연관이 깊다. 동복의 적벽은 신재가 명명한 것으로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9년, 官撰) 동복 산천조에 "적벽은 (동복)관아의 북쪽 10리 옹성산 서쪽 기슭에 있다. 강가에 절벽이 서 있는데, 돌의 색깔이 모두 붉다. 석벽이라고 불려오던 것을 최산두가 지금의 이름인 적벽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봉 고경명의 무등산 유산 기행록(1574년, 선조 7년)인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따르면, 최산두(崔山斗, 1483~1536)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어 동복에서 생활하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달내(澾川)에서 그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어느 길손을 만나 내 끝에 명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적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남도 사람들이 이곳을 알고 찾아드는 시인 묵객의 발자취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조묘(不祧廟)는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 이읍마을에 있다. 원래 광양에 건립했는데 고종때 헐린 뒤 이읍에 세웠다. 1996년에 중건한 정면 3칸 맞배지붕집이다. 고문서가 이곳에 전해 온다.

 

광양 신재 최산두선생 유허비(光陽 新齋 崔山斗先生 遺墟碑)는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교촌) 559-1에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25호(2005.01.27 지정)이다. 총 높이 243cm, 비신 높이 203cm 크기로 비의 형태는 가첨석이 없이 호패형의 비신과 연판문이 조식된 대좌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 상단에 횡으로 <新齋崔先生遺墟碑>라 전서로 썼다. 비문은 종서 16행인데, 1행 50자이고, 앞면에만 비문이 새겨 있다. 비문 끝에 ‘숭정기원후 삼을미 계추 하한(崇禎紀元後三乙未季秋下澣)’의 연기가 있어 1775년(영조 5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임란 이전 1578년께 봉양사(鳳陽祠)를 세워 최산두와 박세후가 함께 배향되는데 1775년 봉양사를 중수한 시기에 이 유허비를 세운다.

 

최산두 유허비는 순천부사인 김약행(金若行, 1718년 출생)이 글을 지었다. 글씨는 김묵행이 썼으며, 전서는 김연행이 썼다. 비를 세우는데는 읍유(邑儒) 허정(許珽), 정철진(鄭轍晋), 서윤화(徐潤和) 등이 참여하였다. 서윤화의 손자인 서현두는 1828년 봉양사 중수에도 참여한다.

 

유허비에는 인물의 행적과 봉양사의 연혁은 물론 정암 조광조 등과의 교류 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전기 사림문화 형성기의 역사적 성격의 이해와 봉양사와 지역문화의 이해, 그리고 호남사림 최산두의 행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명문(銘文)을 보자.

 

저기 백운산(白雲山) 바라보면

그 신령(神靈)함 타고나

공(公)이 속에 자랐었네

자라 점점 넓은 세상 나아가

서울 올라선 일세(一世)의 사표(師表)

의기(意氣) 서로 합하였네

불운(不運)한 화액(禍厄)이야

지난일 말 안커니

예(禮)로써 높이 섬겨

조촐히 제사(祭祀)하네.

선비들 모두 의(儀)를 사모(思慕)

실(實) 높이고 도(道)를 존숭(尊崇)

여러 번의 사우(祠宇) 개수(改修)

공(公)의 덕(德)에 어울리네

옥패(玉佩)에 금(金) 빛 글씨

찬란하고 휘황하네

옛 물건도 오히려 사랑커늘

그 사람을 잊을 건가

산은 높고 물은 길게 흘러

맑은 바람 살랑이는 여기

이 돌에 글을 새겨

선비들 서로 하례(賀禮)하네


*참고 : 김희태, 최산두의 행적과 관련 유적·유물, <전남문화재>12, 전라남도,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