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96 - 사진 한장만 남은 광주의 초기 상수도 시설물

향토학인 2017. 3. 18. 20:19

 

 

 

인지의 즐거움096


사진 한 장만 남은 광주의 초기 상수도 시설

 

김희태

 

2002년 9월 1일

여느 때 처럼

시내 길 다니며

두리번 거리다가

남광주역 언저리

앞을 내다 보다 말고

동작 그만....

 

저기 저 곳

무언가 있을듯 했는데

공사가 막 시작이다

습관적으로

뛰어 간다

김경수 동지 동행

사진을 찍어 댄다

 

이렇게 거대한

서설물이 있었다니

또 중장비로

헐어내고 있다니

기사는 소리 치지만

둘은 또 미쳐

여념이 없다

 

육중한 시멘트 건조물

저긴 물을 가둔 거 같고

여긴 물을 보낸 통로

좁은 문 속 들쳐 보니

인명 각자도 보이고

허허 참 이럴수 있나

눈앞에 두고도 몰랐다니

눈앞에서 헐리고 있다니

 

조선대 병원 산마루

전대병원 내려다 보이는

'때뚱'한 언덕배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금의 장례식장

전화를 건다 시설처

병원 소관이란다

 

그로부터 한참 지나

사진이라도 남겼겠지

어쩌면 실측이라도

기대는 기대일 뿐

그날 둘이 길길이 날뛰며

찍은 사진 몇 장

그러고는 흔적없이

 

그 자리는 어쩌면 조선시대 광주(광산)의 공공 시설물이 있을 법한 곳이었다. 성황당이나 여제단. 광주읍성 남문에서 화순으로 통하는 길목이다. 지금이야 길이 잘 나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광주천은 넘나들며 범람했을 것이고, 길은 그 언덕배기 뽀짝 밑으로 있었을 터. 요즘으로 치자면 국도였던 통행로. 오가는 길손들은 늘 그 언덕을 지나며 기원을 했을 법하다. '남동'이라는땅이름도 남아 있고 전남대병원 안의 노거수도 그 길의 징표이다. 전남 중부를 관장했던 경양역에서 이어지는 역참길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까닭으로 오래전부터 눈여겼던 곳.

 

매일신보 1922년 5월 30일자에 "광주 수도 통수식이 대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1917년에 시작한 수도공사가 마무리 된 것이다. 뒷날 제1수원지라 일컫게 된 증심사 계곡 수원지. 당시 지한면 운림리. 송수로는 취수원과 저수지는 내경 10촌의 철근혼응토관. 저수지와 여과지, 배수지까지는 내경 6촌의 목관. 그 여과지와 배수지가 설치된 곳이 자혜의원 뒷편 구릉. 7,020평. 눈앞에서 중장비로 헐리는 것을 보아야 했던 '때뚱'한 바로 그 언덕배기.

 

여과지(濾過池)는 내경 69척의 도형으로 4곳으로 나눠 3곳을 사용하고 1곳은 예비. 3곳의 유효면적은 2,490평방척. 평방척은 면적의 계량단위로 한변의 길이가 33분의 10미터의 정4각형의 면적. 주위 벽은 철근 혼응토. 그외는 모두 보통혼응토. 물이 새는걸 막기 위해 바닥전부를 두께 4분의 아스팔트로 포장하고 주위 벽 내면은 두께 3분의 몰타르를 바름.

 

배수지(配水池)는 여과지 가까이 180척 지점. 내경 34척 8촌의 원형. 벽 높이 12척 7촌. 주위 벽은 철근혼응토조. 그외는 보통혼응토조. 만수면은 기점상 168척 5촌. 유효수심 12척. 인구 1만명에 12시간분의 급수량 9,659입방척을 저장할수 있다. 내부는 유동벽(流動壁)을 축조하고 정수는 배수지내를 환류해 정체하는 것으로 하고 겨울철 결빙을 막고 먼지 등 기타의 혼입을 막고 다시 그 윗면에는 진토로 복개.

 

수원지에서 송수로를 따라 여과지를 거쳐 배수지에 이른 무등산 계곡물은 배수관을 통해 시가로 급수된다. 배수 본관은 내경 6촌 철관. 좌우 4촌과 3촌의 철관을 분파 해 시내 일반에 급수한다. 배수관의 총 연장은 4,165간 5분. 그 사이 양수기 1개, 제수판 21개, 토수구(土水口) 4곳, 소화전 32곳, 급수전 36곳에 이른다.

 

1간(間)은 여섯자로 1.82미터. 수원지에서 여과지까지 송수로 1,915간은 3,485.3미터. 시내 급수 배수관은 7,581.21미터.

 

제2수원지는 1939년 3월, 제 3수원지는 1957년 5월, 제 4수원지는 1967년 4월, 동복수원지는 1972년 2월 설치된다. 신설과 획장이 이어지는 반면 일부는 매각되기도 한다. 1981년 3월에는 광주호 취수, 1983년 12월에는 황룡강 취수, 2001년에는 주암호 취수가 이루어진다.

 

1920년대 광주 초기 상수도시설, 여과지와 배수지가 설치되었 던 그 터. 어쩌면 그 여과지와 배수지가 들어 서면서 그 이전시대의 광주의 전통 공간 건조물터가 1차로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80여년이 흘러 또 다시 허물고 말았다. 2002년. 기록하나 못 남기고.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은 그 현장. 아쉽기 짝이 없고 그저 허전할 뿐이다.

 

* 사진 : 김경수(향토지리연구소장, 소니828 촬영)

* 참고 : 광주광역시, <광주도시계획사>, 2011. 354쪽, 355쪽(세번째 사진), 3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