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횡묵(1834~1906) <총쇄(叢瑣)> 10(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속141)
인지의 즐거움095
십리 늘어진 숲 길, 만개한 경호 연꽃, 길 멈춰 시 한수, 경양방죽
김희태
1897년경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 吳宖默
관찰부 보고차
광주 방문 길
경양역 앞
십리 늘어진
방죽 길 따라
연꽃 활짝 핀
경양지 보다가
가던 길 멈춰
시 한수 짓나니
광주의 명소이자 농업관개시설로서 활용을 해 왔던 경양지(景陽池). 그 명칭과 축조설과 관련된 인물인 김방의 행적, 관련 시문에 대해서 조선시대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2005년의 일이다.
광주 경양지(景陽池, 경양방죽, 경호]는 우리나라 농경의 중심지 호남지방의 중심고을에 자리한 관개용 저수지로서 역사도 오래되었으며, 생활사와 문화교류 현장이었다. 그리고 광주의 형국상 비보의 기능도 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현장을 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고증도 미비하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 광주읍지, 호남읍지, 여지도서, 고지도류, 광주목사 조희일의 죽음집, 양경우의 제호집,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목민심서, 아언각비 같은 조선시대 기록을 통하여 경양방죽 명칭 유래, 축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는 김방의 행적, 문인들의 시문들을 찾아 정리하면서 잊혀져가는 역사현장과 기록 찾기를 토대로 경양방죽의 복원활용과 역사인물의 현양의 필요성을 제기해 보았다.
경양지의 명칭은 모두 10개가 확인되었다. ‘경양(景陽)’이라는 지명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경양역(景陽驛)과 연관된 것을 보인다. 그리고 위치는 행정치소인 광주읍성과 교통시설인 경양역의 중간 지대로서 광주-장성을 잇는 주 통행로가 가로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금교방축(金橋防築)’, ‘금교제(金橋堤)’, ‘경호(鏡湖)’, ‘서방지(瑞坊池)’ 등의 다른 이름도 있었다.
이름은 두 가지 경향으로 크게 나뉜다. 물을 막은 둑을 중심으로 부여된 명칭과 가두어 둔 물을 중심으로 부여된 명칭이다. ‘금교방축’, ‘경양언(景陽堰)’, ‘경양제(景陽堤)’ 등이 제방을 중심을 기록한 것이라면, ‘경양지’, ‘경양호(景陽湖)’, ‘경호’ 등이 물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경호영지(鏡湖影池)’, ‘연지(蓮池)’, ‘영지(影池)’ 등 다른 이름도 더 전 해 온다.
경양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초기로 알려져 오고 있고, 김방(金倣)선생이 축조자로서 여러 가지 전설도 전해온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좀더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김방의 행적과 활동을 살펴 본 결과, 벽골제 보수 등 농업 관개 수리 시설의 확충 등에 특별한 역량이 있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실학적 활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현양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경양지에 관련된 시문은 다산 정약용의 청년시절 시가 잘 알려져 있었다. 조사를 통하여 1570년 전후의 고경명이 지은 시가 확인되었다. 이어 1624년(인조 2) 광주목사를 지낸 죽음 조희일의 시가 확인되었다. 이 시에 차운한 제호 양경우의 시도 있었다. 17세기 초반 지방관을 지낸 문관 조희일의 시가 서정적이라면, 18세기 후반 이곳을 여행하던 청년 정약용의 시는 서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문을 통하여서도 지역 공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광주목사 김선은 경호의 정자에서 장성, 순창, 담양, 옥과 등 인근 수령들과 경양지(경호)의 연꽃 감상을 하기도 한다. 여수군수 오횡묵(吳宖默, 1834~1906)은 전라남도관찰부에 보고하러 가던 길에 십리 늘어진 경양호의 만개한 연꽃을 보고 가마를 멈추고 시(景陽驛 鏡湖 蓮花盛開 停車賦詩)를 짓기도 한다. 이밖에도 여러 문인과 관인들의 시를 확인할 수 있어서 경양지는 유상처로도 인식되고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안사항이다. 우선, 경양방죽의 복원과 활용에 대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나간 역사현장의 복원은 어려운 점이 많다. 필자가 제안한 복원의 의미는 현장을 당시 그대로 복원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도 어렵다. 여기에서 복원은 인식(認識)의 복원이다. 상징적인 복원을 해 보자는 것이다. 경양방죽이 농업관개시설이었지만, 조선시대 문인이나 관인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보았듯이 문화교류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또한 광주의 형국과 관련하여 비보의 기능도 일정 부분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부분을 중심으로 일정 장소에 상징적으로 복원하자는 것이다.
현재(2005년)의 계림동 구시청 일대 일정 공간도 좋고,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내의 한 한 공간이라도 좋다. 일정시기별로 광주의 축소 모형도를 제작하고, 한편으로 경양방죽 중심의 모형도를 복원하거나, 실제 물을 담는 공간을 확보하여 그곳에 기록과 전설과 모형을 함께 배치하여 역사 공간, 문화쉼터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물론 기록과 전설과 현장에 대하여 자료를 더 수집 고증할 필요성은 있다. 중요한 것은 수집 고증이 이루어지더라도 외형의 형태 복원이 아닌, 내면의 정신과 인식의 복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김방이란 역사 인물에 대한 현양 사업이 필요하다. 15세기에 당시 최대의 농업 관개시설인 벽골제를 중수할 때 주도적인 역량을 발휘할 정도로 경륜과 기량을 갖춘 광주의 역사 인물을 드러내고 알려 보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련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구전자료가 더 많이 알려져 왔지만,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경양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문헌기록 자료가 전해진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자료도 있다. 이들에 대하여 분야별, 시기별 조사 수집과 함께 종합적인 정리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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