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71
담양 석당간을 지나간 관찰사 구봉령, 1583년
김희태
담양 석장 潭陽 石檣
돌을 깍아 만든 기다란 장대 허공을 떠받치니
斲石成竿拄半旻 착석성간주반민
벼슬길 도리를 내려다 봄이 그 천년 세월이구나
俯臨官道幾千春 부림관도기천춘
예건 이제건 다니는 길손들의 일 많고 적음 아려니
古今行客知多少 고금행객지다소
누가 바로 공평과 청렴함에 첫째 가는 사람인지를
誰是忠淸第一人 수시충청제일인
길에서 만난 우뚝 솟은 돌을 깍아 세운 석장(石檣), 하늘을 반쯤이나 허공을 떠받치고 있다. 그 높은 곳에서 벼슬살이 하는 사람들 내려다 본지 천년세월. 그냥 보고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오간 것, 그들이 한 크고 작은 많은 일들 다 알고 있고, 그 안에는 분명 공평과 청렴함에 있어 일인자도 있었을 것. 아니다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으니 첫째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곳을 지나면서 다짐해 본다. 함연의 ‘관도(官道)’는 순찰길 나들이의 도로, 오늘날로 치자면 국도에 해당될 것인데, 이를 ‘벼슬길의 도리’로 풀어 보았다.
언제쯤일까? 또 어디이며 누가 남긴 글인가.
‘담양 석장(潭陽 石檣)’이란 부제가 달린 시이다. 바로 담양 객사리 석당간을 말한다. 시의 제목은 ‘담양으로 가면서(發向潭陽)’. 백담 구봉령(栢潭 具鳳齡, 1526~1586)의 문집 <백담선생속집(栢潭先生續集)>에 실린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구봉령은 16세기 중후반을 살았던 문신이다.
구봉령이 이곳을 지난 건 아마도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절 순찰의 임무를 띠었던 때가 아닐까 싶다. 구봉령은 1583년(선조 16) 6월부터 1584년 4월까지 열달간 전라도관찰사를 지낸다. 문집에 실린 시의 전후로 보아 순창쪽에서 담양을 향해 오다가 만난 석장이다. 부임 초기에 첫 순찰을 했을 터이니 1583년 여름일 것 같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전의 문화유산 현장과 거기에 담긴 사람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비록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현장을 지나면서 직접 보고 형상화 한 점, 전라도관찰사라는 관인의 공식 순찰 일정이었다는 점,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 등 눈여겨 볼만하다.
구봉령의 ‘發向潭陽’ 시는 2수인데, ‘담양 석장’ 앞의 시는 ‘담양 연덕원(潭陽 延德院)’이다. 연덕원은 담양도호부 동쪽 5리 거리에 있던 당시 공공기관이다. 순찰 길임을 알 수 있다.
담양 연덕원 潭陽 延德院
추월산 저건너 푸른 기운은 낮은 기슭 감싸고
秋月山前翠麓低 추월산전취록저
작은 나무 흔들리는 그림자 푸른 시내에 깃드네
小欄搖影碧溪西 소란요영벽계서
문득 뜻 밖에도 수풀사이의 새들 사랑스러우니
丁寧却愛林間鳥 정녕각애임간조
술병들어 손에게 권하는 듯 정답게 지저귀는구나
勸客提壺款款啼 권객제호관관제
구봉령의 문집에는 담양과 창평 관련된 시가 몇 수 더 보인다. 담양 오리원(潭陽五里院), 제 담양 축요루(題潭陽祝堯樓), 담양 추월산(潭陽秋月山), 발향담양(發向潭陽), 창평 유둔현(昌平油芚峴), 창평 선화루(昌平宣化樓), 창평 선화원(昌平宣化院) 등이다. 오리원, 선화원, 유둔현, 추월산, 축요루, 선화루 등 지명과 시어를 따라 시상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축요루는 담양도호보 객관 동쪽에 있던 누각이다. 정유재란기에 피해를 입기 전의 경관을 알 수 있다.
담양 축요루에 짓다 題潭陽 祝堯樓
대궐을 떠난 뒤 문득 가을이 지나니
身違鳳闕忽經秋 신위봉궐홀경추
화악산 봉우리 꿈속에도 시름이라네
華岳峯巒夢裏愁 화악봉만몽리수
일편단심 해 향한 해바라기 마음으로
向日葵心丹一寸 향일규심단일촌
아침마다 홀로 축요루에 오른다네
朝朝獨上祝堯樓 조조독상축요루
앞의 저 시의 제목에 ‘석장(石檣)’이라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담양 객사리 석당간’이다.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제505호]이다. 1969년에 보물 지정을 하면서 ‘담양 읍내리 석당간’이라 하였는데, 2002년에 ‘담양읍 석당간’, 2010년에 ‘담양 객사리 석당간’으로 변경하였다.
석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대(臺)를 말한다.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명칭 변경 과정에서 자료를 검토하면서 저 ‘석장(石檣)’ 시를 본 것이다. 또 하나의 용어는 ‘석도(石棹)’이다. 1872년 담양부지도나 담양읍지, 추성지, 중수비(1839년) 등에 ‘석도(石棹)’라 표기되어 있다. 사공석(沙工石)도 있다. 담양 선비 남석관( 南碩寬, 1761~1837)의 문집 『이안유고(易安遺稿)』에 ‘영석도(詠石棹)’라는 제목의 시가 보인다.
<담양부읍지>(1871년) 고적조에는 석당간-석도의 규모와 무게, 세우게 된 연유, 중수, 재료 등 제원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담양부)관아의 동쪽 5리에 석도(石棹)가 있다. 높이는 백여척(尺)이며 크기는 한 아름 남짓인데, 쇠사슬로 그 위에 관(冠)을 잡아매어 놓았다. 또 50척 남짓의 석탑이 있다. 세속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처음 고을을 만들 때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추성(秋成)의 땅 형세가 마치 배가 가는 모습처럼 생겼기 때문에, 석탑을 만들어 두어서 배를 정박시킨 것이라고 한다. … 정조 갑인년(1784년)에 석도가 바람에 부러진 뒤로 46년이 지난 기해년인 지금 임금 5년(1839, 헌종 5)에 고쳐 세웠다.(府之東 五里有石棹 高百餘尺 大一圍餘 以鐵索 鎻之冠其上 又有石塔 高五十餘尺 俗傳 初設府時 所置也 秋成地勢 如行舟形 故置石塔 使鎭泊云 … 正廟甲寅 石棹爲風毁折 後四十六年己亥 當宁五年改建 … )
석도(石棹) : 돌 기둥이 여섯 모서리에 3층이며, 높이는 26척(尺)이다. 내부 상층의 높이는 5척, 중층의 높이는 7척, 하층의 높이는 14척이다. 둘레는 6척 5촌이다. 둥근 무쇠통[水鐵桶] 3층의 높이는 13척이다. 내부 상층의 높이는 4척이며, 무게는 5백 58근 8냥이며, 중층의 높이는 4척이며 무게는 6백 14근이다. 하층의 높이는 5척이며, 무게는 6백 69근 8냥이다. 둘레는 4척이다. 모두 합한 무게는 1천 8백 42근이며, 모두 합한 높이는 39척이다. 무쇠를 부어 만든 삿갓처럼 생긴 모자를 노[棹] 위에 쓰고 있는데, 둘레는 13척이며 무게는 3백 93근 8냥이다. 시우쇠[正鐵]로 만든 삼지창의 높이는 2척이며 무게는 11근인데, 노 위에 꽂혀 있다. 놋쇠로 만든 풍경(風磬)의 무게는 1근 1냥이며, 비용은 모두 합해서 8백 9냥 2전 1푼이다.(石棹 石柱六稜 三層 高二十六尺 內上層 高五尺 中層 高七尺 下層 高十四尺 圍 六尺五寸 水鐵桶圓三層 高十三尺 內上層 高四尺 重五百五十八斤八兩 中層 高四尺 重六百十四斤 下層 高五尺 重六百六十九斤八兩 圍四尺 合一千八百四十二斤 合高三十九尺 水鐵鑄如笠形冒冠於棹上 圍十三尺 重三百九十三斤八兩 正鐵三枝鎗 高二尺 重十一斤 揷于棹上 鍮鐵風磬 重一斤一兩 合所費錢 八百九兩二戔二分)
석장이나 석도는 돛대 또는 노(櫓)를 상징한다. 담양 읍내의 지세가 배형국이라 노로써 세웠다는 내용이 담양지 등에 나온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유산 석당간으로 세워졌지만, 조선시대 기록에서는 16세기 1583년 시에는 ‘석장’, 18세기나 19세기 읍지류나 문집, 고지도에는 ‘석도’로 나온다. 사찰유산으로 기능했던 시기보다 더 오랜 기간을 생활사유산으로 주민의 인식속에 깃들어 있는 셈이다.
*인성문화 5호, 2024.
조선후기의 석도(石棹, 석당간)와 사공석(沙工石)(담양부지도, 1872년, 규장각)
담양 객사리 석당간(보물) - 석장(石檣), 석도(石棹)의 기록도 있다.
담양 석장 시(구봉령, 백담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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