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70
재사당 이원선생의 입명비(立命碑)와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 나주 복암
김희태
나주 노안면 학산리 복암 근처 야트막한 산 기슭에 3기의 빗돌이 있다.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 1471?~1504)선생의 입명비(立命碑)와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 그리고 ‘재사당 이선생 유허중수비’(병진년)이다. 이원이 무오사화 때 나주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했던 터에 세운 것이다.
이원은 봉상시에 재직하면서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 인하여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곽산으로 유배되었다가 1500년(연산군 6) 다시 나주로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로 죄가 더해져 참화를 당하였다.
입명비를 보자. 우복룡(禹伏龍, 1547~1613)이 나주목사 재임 때에 유허에 짤막한 비석을 세우고 ‘贈都承旨行禮曹佐郎李公黿立命碑(증 도승지 행 예조좌랑 이공 원 입명비)’라 새겨서 세웠다. 옆에는 ‘李齊賢之後裔, 朴彭年之外孫, 二家之美, 萃于一人[이제현의 후손이며 박팽년의 외손이니, 두 집안의 아름다움이 이 한 사람에게 다 모였다.]’라는 20자를 새겼다. 우복룡 목사는 이원의 외증손으로 1602년[선조 35] 10월 3일부터 1605년(선조 38) 1월 4일 사이 나주목사를 지냈다. 1604년에는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를 중건하였다.
‘입명(立命)’은 명을 받았다는 의미인데, 명은 후명(後命)의 의미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인데, 이원이 이 땅에서 사형을 받았다는 의미로 ‘입명비’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원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이제현(李齊賢)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이공린(李公麟)이며, 어머니는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에 급제, 검열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호조좌랑, 성균관박사 겸 봉상시를 지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행의(行義)로 추앙받았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금강록(金剛錄)』·『재사당집』 등이 있다.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는 이덕수(李德壽, 1673~1744)가 글을 지었고 7세손으로 광주목사로 있던 이명곤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우선 전문을 소개한다.
“재사당 이 선생은 젊어서 점필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기개와 절조와 문학으로 연산조에 이름이 드러났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한훤당(寒暄堂, 金宏弼)·탁영(濯纓, 金馹孫) 등 여러 명현들과 함께 모두 뜻하지 않은 화에 걸려들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기운이 움츠러들거니와 그 일은 대략 청음(淸陰) 김문정(金文正, 金尙憲) 지은 묘갈문 속에 보인다. 대개 선생이 시호를 의논한 일에 연좌되어서 무오년(연산군 4, 1498)에 처음 관서의 곽산(郭山)으로 유배되고 3년 만에 나주로 옮겨졌다가 갑자년(연산군 10, 1504)에 이르러 화를 입었다. 나주의 동쪽 10리는 이름을 복암(伏巖,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복암)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선생이 거하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외증손인 감사 우복룡(禹伏龍, 1547~1613)이 일찍이 나주목사가 되어서 유허에 가서 짤막한 비석을 세우고 기록했는데 세월이 오래되자 점점 깎이고 부식되었다. 성상 즉위 2년에 선생의 7세손 이형곤(李衡坤, 1672~1733)이 이어서 나주목사(1727[영조 3].09.15∼1733.04 재임)로 와서 비석을 어루만지며 감모하였다. 이미 또 애석하게 비석에 유배 살고 화를 당한 시기를 기재하지 못한 때문에 뒷사람들이 상고할 바가 없게 될까 저어하여, 장차 특별히 돌을 다듬어 새기기 위해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젊었을 때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명현들이 산마을에 이르면 반드시 그 유적을 구해서 보았으나 능히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때마다 안타깝게 여기곤 하였다. 지금 남행하여 나주를 지나가는 인사들은 이 비석이 있는 덕분에 장차 거친 들판의 풀더미 속에서 선생의 유풍을 상상하며 배회하느라 차마 떠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군의 이번 일은 선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말세의 풍속을 밝게 깨우치는 것에 그 공로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무릇 천하의 일은 반드시 귀와 눈으로 접한 뒤에야 능히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의리와 충렬로 성취한 사적이 찬란하더라도 진실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날이 오래되면 시간이 멀어질수록 점점 잊혀지지 않는 일이 드문 법이니, 이것이 또 이군의 은미한 뜻이 있는 바이다. 이군의 당제 이명곤(李明坤, 1685∼?)이 마침 광주목사(1731[영조 7년].02∼1733.04 재임)로 있어서 또한 그 일에 함께 참여하였다고 한다.”
7세손 나주목사 이형곤이 지은 ‘입명비 중수사실(立命碑重修事實)’도 『재사당선생일집(再思堂先生逸集)』(권2)에 있다.
이원은 나주 적거지에서 생활하면서 영암 구림에 있는 간죽정의 기문을 짓는다. 간죽정기(間竹亭記)는 친우 박이경(朴而經, 朴權, 1465~1506)이 선친의 간죽정을 중수할 때 친우의 부탁으로 지었다. 박권은 <금성별곡(錦城別曲)>을 지은 오한(五恨) 박성건(朴成乾, 1414~1487)의 큰아들이다. 이 글의 끝에는 '듣는 얘기로만 빼어난 간죽정 풍경을 다 적을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보고 나서 다시 적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그 원은 이루지 못하고 참화를 당하고 만다.
2023년 4월 23일 윤여정 나주문화원장과 김준혁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김관(문화원 사무국장), 이상목(경주이씨 39세손, 한국화가)이 위치를 확인하고 1차 조사를 하였고, 2024년 5월 31일 윤여정, 정선종(전 남도불교문화연구회장), 김희태가 2차 조사를 하였다. 3차 조사는 2024년 10월 24일 탁본조사를 하였다. 윤여정, 정선종, 김희태, 김관영(나주문화원 나주학연구소장), 이상목이 참여하였다
*적거유허비(謫居遺墟碑) 원문
再思堂李先生謫居遺墟碑
再思堂李先生。少遊佔畢齋之門。以氣節文學。顯名於燕山朝。及史禍作。與寒暄,濯纓諸名賢。俱罹奇禍。至今譚者爲之氣短。其事略見於淸陰金文正所撰碣文中矣。蓋先生坐議諡。戊午。始謫關西之郭山。三年而移羅州。至甲子。被禍州之東十里地名伏巖。至今傳爲先生所居。先生外曾孫禹監司伏龍曾牧是州。就遺墟。豎短碑以識之。歲久而稍剝蝕。至聖上卽位之二年丁未。先生七世孫衡坤繼牧是州。摩挲感慕。旣又惜其不載謫居遘禍之歲月。恐後之人無所考据。將別治石以記。而屬筆於余。余少之時。遍行四方。至名賢所居之鄕。必求見其遺跡。而無能有識之者。輒爲之悵然以恨。今人士之南行過是州者。賴此片石。將有以想像先生之遺風於荒榛野草之間。徘徊而有不忍去者。李君斯擧。其於表先懿牖末俗。顧豈不大哉。凡天下之事。必其接於耳目而後乃能動乎其中。雖義烈所就。其跡炳然。苟曠日不交於前。鮮有不浸遠而浸忘。此又李君微意之所存也。李君之堂弟明坤適牧光州。亦與聞其役云。
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李德壽撰
七世孫通政大夫行光州牧使 明坤書
(『재사당선생일집(再思堂先生逸集)』권2 부록 ; 한국문집총간 016집)
입명비
재사당 이선생 적거유허비
적거유허(지)비 비문(이덕수, 서당사집/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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