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73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의 비, 나주
-우리 곁의 미래유산-
김희태
나주 동학사죄비 건립 1주년 기념 모임이 열렸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 서거 일주기 추모식도 함께였다. 열아홉번째 맞는 한일 동학기행 시민교류회. 2024년 10월 28일과 29일 나주, 그 뜻 깊은 자리 한켠에 섰다.
그 나주 동학 “[일본인] 사죄비”, 나주역사공원(나주시 죽림동 60-33)에 세워진 비제로 한다면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東学農民軍犠牲者を悼む謝罪の碑]”. 1주년 되어 열린 기념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를 미래유산으로 소개하자는 제안이 왔다. "미래유산”이란 일반적으로 근현대기의 인물, 사건, 이야기가 담긴 유산, 그리고 미래 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시기적으로 조금은 오래된 유산이 대상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시점이라 의아해 할 것이지만, 저 속에 깃든 인물, 사건, 이야기로 치자면 1894년부터 연원이 되니 당연히 미래 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건립되게 된 사연으로 보아도 한일 동학기행 시민교류회로 치자면 19회째, 이를 주도했던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의 한국 연구부터로 보자면 1960년대로 올라간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순국과 나주
“사죄비”에도 있듯이 나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희생당한 땅이다. 1894년 12월 10일(양력 1895년 1월 5일)에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9대대가 나주목에 입성한 이래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최후의 항쟁을 계속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소총과 전술로 무장한 일본군의 ‘전원살육 작전’으로 처절하게 희생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압송되어 온 동학농민군 지도자 수백 명은 나주 호남초토영(지금의 나주초등학교)에서 처형 당하여 순국하였다.
저 일본인 사죄비의 건립은, 2018년 제13차 ‘한일 동학기행’ 방문단이 나주 호남초토영을 방문하였을 때 오간 대화가 그 시말이다. 나천수사죄비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와 구순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1929~2023) 명예교수가 주인공이다.
“동학 관련하여 진압군 일본 측은 가해자 측인데, 가해자 측에서 왜 일본군이 살육했던 역사를 발굴하려 하는가”
“일본군이 가해했던 역사를 덮어 놓는다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된다.”
“가해 역사를 밝힌 후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조그마한 위령비를 세우고 싶다.”
2019년 10월 30일, 나주시민의 날에 나주시-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일본측 동학기행단 대표 3자간에 MOU를 체결하고,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매년 나주동학농민혁명 한일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나주 동학 실상을 밝히고, 그 후에 민간인 차원의 위령비를 건립하자는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한일 동학 학술대회를 연차로 개최하면서, 양심 있는 일본 지식인 중심의 위령비 건립에 대한 나주시민 여론을 들었다. 2019년 나주 한일동학학술대회에서 이노우에 교수가 ‘사죄문’을 발표한 바 있어, ‘사죄비’로 명칭을 바꾸는 것을 건의하여, 일본 측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본인이 먼저 실상을 밝히고 사죄합니다
그리고 역사 현장의 자료이고 미래 세대의 유산이 될 것이기 때문에 건립의 주체도 인명을 표기하기로 하여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한일동학기행 참가자 일동”으로 하였다. 비문은 양면으로 동쪽에는 일문, 서쪽에는 국문으로 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나주에서의 동학농민혁명군 희생은 동학토벌군으로 참전한 일본군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일본군은 나주에서 1895년 2월 4일에서 2월 7일 사이 머물다가 2월 8일 북문을 거쳐 광주로 이동한다. 2월 4일 기록에 남문 부근의 작은 산에 시체가 산을 이룬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장흥 전투(1.8.~1.10, 양력)의 중죄인을 죽인 것이 매일 12명씩 103명을 넘었다고 하였다. 이에 더하여 시체를 버린 것이 680명이고 악취가 진동하고 땅은 죽은 사람의 기름에 뒤덥혀 하얀 은[白銀]처럼 얼어붙어 있었고 시신은 개나 새들의 밥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산을 이루는 시체는 제하고라도 783명이 학살된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본군 참전기록을 처음 발견하여 학계에 소개한 학자는 이노우에 카츠오 명예교수이다. 국내에는 박맹수 전 원광대학교총장을 통하여 소개되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는 일기 전문 번역본을 출간한 바도 있다.
이같은 일에 앞장 선 학자가 나카츠카 아키라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이다. 1960년대부터 근대일본의 역사에서 ‘조선문제(朝鮮問題)’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자각하여 청일전쟁(淸日戰爭)과 동학농민혁명을 비롯 근대 한일관계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리고 실천한다.
2006년부터 한일동학기행 시민교류회를 결성하여 매년 자비로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면서 조사하고 연구하고 저술을 한 것이다. 적게는 13명, 많을 때는 40명의 일본인들이 참여한다.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지한파 1세대 나카츠카 교수, 그 활동의 정점에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가 있다.
나카츠카 교수는 ‘전라남도’와도 인연이 깊다. 2002년 <동학전적지 여행>을 하는데, 대상지역은 강화도·서울·전주·진도였다. 이 2002년의 ‘진도’ 여행이 ‘전라남도’와 첫 인연이 되었다. 이 ‘진도 여행’은 1995년 7월 25일, 일본 홋가이도대학 문학부의 후루카와강당[古河講堂] 표본문고(舊標本庫) 연구실에서 「韓国東学党首魁ノ首級(한국동학당수괴의 수급」)이라고 묵서된 유해가 발견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6구 가운데 ‘1906년 9월 20일 全羅南道 珍島에서 일본인이 ‘採集’한 동학군 지도자 두개골’이 있었고, 그 현장 진도를 방문한 것이다.
2009년에 장흥 석대들 동학 전적지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하였다. 석대들 전적지의 국가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보존과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때 필자와는 첫 만남이었다.
2012년 12원 9일 나카츠카 교수의 도서 12,521권이 전라남도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단행본 8,850권, 학술잡지 3,939권, 지도집 2권 등이다. 2009년부터 몇년간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2013년 10월에는 전남도청을 방문해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감명 깊은 강연도 했다.
역사적 양심은 지금도 살아 있어
전남도립도서관에는 기증서가를 마련하여 공개하고 있고, 기증도서 가운데 대표 저서 2권의 번역본을 냈다. 『현대일본의 역사인식-일본의 양심이 보는-[現代日本の歷史認識 その自覺せざる欠落を問う』]』(박맹수 번역)과 『시바료타로의 역사관-그의 조선관과 메이지 영광론을 묻다-[司馬遼太郞の歷史觀その「朝鮮觀」と「明治榮光論」を問う]』(박현옥 번역)이다. 2014년에는 고창군이 제정해 시상하는 제7회 녹두대상을 수상한다.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 제막식을 하루 앞둔 2023년 10월 29일 저녁에 제18회 한일동학기행 시민교류회 행사가 ‘탯자리’에서 열렸다. 이 행사의 마지막 절차로 참여한 한·일 시민들의 선물 교환과 증정이 있었다. 한·일 시민들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서로의 마음에 담는 시간이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이 영면(永眠)하였다는 부보(訃報)가 전해졌다. 추모의 묵념을 올리면서 일평생 평화와 평등을 염원하셨던 교수님의 큰 가르침을 길이 이어가자는 다짐을 하였다.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사죄비’는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 가해자측인 동학군토벌 일본군의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 한일 동학기행 시민교류회가 18년간의 연차 답사를 통하여 현장을 확인하고 교류하면서 민간인들의 성금으로 건립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최초라는 점 등에서 미래 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 사건, 이야기가 담긴 미래유산이다.
*김희태, 「새로운 미래향한 역사적 양심의 승리-동학농민군 희생자 사죄비 최초로 나주에 서다-」-우리곁의 미래유산-, 『대동문화』 145호(2024년 11·12월호), 6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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