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66
백제국 강남(江南) 달나산(達拏山)과 월출산
김희태
강진 월남사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하여 다수의 백제 와당이 출토된 바 있다. 건물터나 유구의 성격은 앞으로 규명해야 하겠지만, 유물의 수량이나 내용에 있어 중요한 성과로 보인다. 그 시기는 출토된 유물의 문양 등과 비교하여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와 관련하여 검토해 볼 시사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중국의 『속고승전(續高僧傳)』과 고려시대 간행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혜현(慧顯, 慧現, 570~627경)의 수행 입적처 남방(南方) 달라산(達拏山)과강남(江南) 달라산에 관한 내용이다. 몇 연구에서 달라산=월출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백제 와당과 연관하여 월남사가 혜현 입적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걸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백제시대의 군현 편제와 관련하여 월남사와 주변사찰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현 편제와 관련하여 월남사와 주변 사찰을 다루면서 『속고승전』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현과 달라산에 대해 살펴 보려는 것은, 기록에 나오는 ‘남방’과 ‘강남’이 군현제와 관련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즉 달라산 앞부분에 표기된 위치에 대한 검토를 해 보자는 것이다. 『속고승전』의 ‘남방(南方)’, 『삼국유사』의 강남(江南)은 일반적으로 방향을 표시하는 보통 명사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강남을 언급한 글에서는 영산강 하류라 하여 방향과 위치로 보았다.(정아영, 「감응연을 통해본 백제의 법화신앙」 )
그런데 ‘남방’은 백제의 오방(五方)과 연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고, ‘강남’은 고려시대의 전라도 지역(현 전북특별자치도)의 도명칭이 ‘강남도(江南道)’였던 적이 있음을 연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삼국유사』가 삼국시대의 역사서임으로 고려시대 역사행정지명인 ‘강남’ 또는 ‘강남도’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삼국유사』의 저술과 간행이 고려 시기인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의 오방과 고려의 강남도는 군현제와 연관하여 바로 상급의 행정명칭이었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속고승전』과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자. 요약하자면, 백제시기에 수덕사에 머물렀던 승려 혜현이 남방(강남) 달라산으로 옮겨 수행하다가 58세에 입적하였고, 입적 한 뒤 혀만은 훼손되지 않은 감응을 얻게 되었는데 생전에 법화경 독송으로 쌓았던 공덕 때문이었다 하면서 석탑에 간직하였다는 것이다.
백제국 달라산사 석 혜현전(伯濟國 達拏山寺 釋慧顯傳)( 『속고승전』)
승려 혜현(慧顯)은 백제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마음을 수고로이 하고 뜻을 한 곳에 모아 법화경(法華經) 독송을 업으로 삼았기에 복을 빌고 청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 그 뒤 삼론(三論)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따라가서 수업을 들었다. 법이 일단 정신에 물들자 더욱 그 실마리가 불어났다. 처음에는 본국 북부(北部)의 수덕사(修德寺)에 머물렀는데, 대중이 있으면 강의를 하고 대중이 없으면 곧바로 맑게 독송하였다. 사방 먼 곳에서 풍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으로 산을 이루어 떠들썩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날 (혜현은) 문득 남방(南方)의 달라산(達拏山)으로 갔다. 산세가 지극히 깊고 낭떠러지가 겹쳤으며 바위가 단단하였다. 비록 나아가서 (혜현을) 살펴보려는 (사람이) 있더라도 올라가기가 어렵고 위태로웠다. 혜현은 그 안에 조용히 앉아 업[독송]에 전념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고 마침내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같이 공부하던 이가 그(혜현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석굴(石窟) 안에 두었다. 호랑이가 몸과 뼈를 모조리 다 먹었는데 오직 해골과 혀만 남았다. 3년 동안 그 혀는 더욱 붉어졌고 부드럽기가 살아있을 때보다 나았다. 3년이 지난 후에야 바야흐로 혀뿌리가 자줏빛[紫色]으로 변하면서 돌과 같아졌다. 승려나 속인이 이를 괴이하게 여기며 공경하여 모두 석탑에 봉해두었다. 혜현의 나이는 58세였으니 즉 정관(貞觀) 초년 이었다.( 『속고승전』,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한국사데이터이스 인용)
백제국 달라산사 석혜현전(『속고승전』 권28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통합대장경)
혜현 구정(惠現求靜)(『삼국유사』)
승려 혜현(惠現)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애써 뜻을 모아 법화경(蓮經)을 독송하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기도하여 복을 빌면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다. 겸하여 삼론(三論)을 전공하여 수도를 시작하니 신명에 통하였다. 처음에는 북부(北部) 수덕사(修德寺)에 살면서 대중이 있으면 [경을] 강하고, 없으면 지송(持誦)했으므로 사방의 먼 곳에서 [그의] 교화를 흠모하여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다. 차차 번잡한 것이 싫어 마침내 강남(江南)의 달라산(達拏山)으로 가서 살았다. 산이 매우 험준하여 내왕이 어렵고 드물었다.
혜현이 고요히 앉아서 [번뇌를] 잊고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같이 공부하던 이가 그(혜현의) 시신을 옮겨 석실(石室) 속에 안치했는데, 범이 [그] 유해를 다 먹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겨두었다. 추위와 더위가 세 번 돌아와도 혀는 오히려 붉고 연하였다. 그 후 변해서 자줏빛[紫色]이 나고 돌처럼 단단하게 되었는데, 승려나 속인이 [모두] 그것을 공경하여 석탑에 간직하였다. 세속의 나이 58세였는데, 즉 정관(貞觀)의 초년이었다. 혜현은 서방에 유학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일생을 마쳤으나,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전기가 쓰여지고 당(唐)나라에서도 명성이 드러났다.(『삼국유사』권 제5 避隐 제8 惠現求靜)
혜현구정( 『삼국유사』 피은편 ; 1512년, 규장각본, 국보[제306-2호])
『속고승전』은 중국 당대 승려 도선(596~667)이 혜현이 입적한 지 18년 이후인 645년(백제 의자왕 5, 貞觀 19)에 기록한 것이다. 월남사 출토 백제와당의 편년과 거의 같다. 도선이 실제 백제에 있던 문헌을 인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는 일연(一然)이 1281년경 편찬한 사서로 9편목 가운데 피은(避隱)편에 실려 있다. 두 사서에서는 이름 표기가 『속고승전』은 ‘慧顯’, 『삼국유사』는 ‘慧現’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속고승전』은 백제국 달라산사를 소제목으로 하여 혜현의 행적을 달라산사에 더 비중을 둔 듯 하다.
달라산, 달라산사는 대체적으로 월출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달라산=월출산의 이해를 전제로 혜현과 법화사상에 대하여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다른 지역으로도 비정된 바 있다. 전라북도 고산, 충청남도 진산(이병도, 『역주 원문 삼국유사』), 제주도 달라산(추정)(홍사준, 「수덕사 구기와 백석사고」,『백제연구4) 등이다.
다음으로 강남도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고려사』 기록이다.
전라도(全羅道)는 .... 성종(成宗) 14년(995)에 전주·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의 주현(州縣)을 강남도(江南道)로,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의 주현을 해양도(海陽道)로 삼았다.(『고려사』권 57 志 권1 地理2)
995년(성종 14)에 지금의 전라북도 일원을 강남도라 하고, 전라남도 일원을 해양도라 한다. 1018년(성종 9)에 강남도와 해양도가 합해져 전라도(全羅道)가 됨으로 실제로 23년간의 역사행정지명인 셈이다.
1281년께 편찬된 『삼국유사』피은편 혜현구정조의 강남 달라산 기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금강 남쪽 ~ 해양도 북쪽’ 지역을 지칭하던 ‘강남’이 전라도로 통합된 뒤, ‘금강 남쪽’이라는 기준으로 단순화되어 전남‧북을 아우르는 별칭으로 변화의 흐름을 탔을 거라는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
이 ‘강남’이 뒤에는 ‘호남(湖南)’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처럼 『삼국유사』 혜현구정조의 ‘강남’은 처음 제기했던 것처럼 군현제와의 관련 보다는, 전라도를 통칭하는 용어로 보는 것이 더 순리적일 것 같다.
다음으로 달라산에 대해서 살펴보자. 『속고승전』에는 ‘達拏山寺’와 ‘南方 達拏山’, 『삼국유사』에는 ‘江南 達那山’으로 표기되고 있다. 월출산의 명칭이거나 월출산으로 비정되고 있는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처럼 달라산(達拏山), 단라산(旦那山), 단라산(檀那山), 월내악(月柰岳), 월생산(月生山)이 월출산의 산명임을 알 수 있다. 달라산사 또한 월출산에 속한 산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월남사에서 출토된 백재 와당이 『속고승전』이 쓰여질 무렵, 즉 7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표> 달라산, 단라산, 월내악 명칭과 전거
명칭 | 내용 | 연대 | 출전 |
達拏山/達那山 | 伯濟國達那山寺/南方 達拏山 | 645(백제 의자왕 5) | 『속고승전』제28권 讀誦篇 伯濟國達那山寺釋慧顯傳, |
旦那山 | 又有旦那山, 在國西界 | 660년(의자왕20)경 | 『翰苑』 蕃夷部 百濟 鷄山東峙, 貫四序以同華 |
□那山 | 仍以□那山無爲岬寺請以住 | 946고려 (정종 원) | 무위사 선각대사비 |
月奈岳 | 小祀 月奈岳[月奈郡] | 1145년(인종 23) | 『삼국사기』 권32 잡지1 祭祀 |
檀那山 | 歲在丙辰八 月日 檀那山 月南典香 無用 誌 | 1256(고종 43) | 『大方廣佛華嚴經 普賢行願品 別行疏』 |
逹拏山 | 稍猒煩擁遂徃江南逹拏山居焉. 山極嵓險來徃艱稀 | 1281(충렬왕 7)경 | 『삼국유사』권5 피은8 惠現求靜 |
檀那 | 有月南之精藍 有檀那之勝境 | 13세기후반 | 『원감록』祝壽疏 *원감국사 충지(1226~1292) |
月柰岳 | 有月出山[新羅稱月柰岳 躋小祀 高麗初 稱月生山] | 1451(조선 문종 1) | 『고려사』권57 志 권11 지리2(전라도 영암군) |
月柰岳 | 月出山[一云 月柰岳] 在靈岩 | 1454(단종 2) |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
月柰岳 | 鎭山 月出[在郡南 新羅稱月柰岳, 躋小祀] | 1454(단종 2) | 『세종실록지리지』전라도 나주목 영암군조 |
月奈岳 | 月出山 新羅稱月奈岳 高麗稱 月生山 | 1531(중종 26) | 『신증동국여지승람』35 영암군 산천조 |
*김희태, 「강진 월남사와 주변 사찰의 군현 변화」, 『강진 월남사 3층석탑의 성격 학술대회』, 월남사, 민족문화유산연구원, 2018.12.07.
*강진우리신문 202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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