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45 - 첨단 문화재 지도를 만들자, 1997

향토학인 2016. 6. 2. 03:37

인지의 즐거움045

  (19970501)

 

첨단 문화재 지도를 만들자

-유적총람 CD-ROM제작-

 

김희태

 

    

“지도제작에는 정상기(1678-1752)와 김정호의 업적이 뛰어 났는데 전자는 동국지도를, 후자는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 그 이전의 지도는 행정적, 군사적인 목적이 주가 되었으나 이 시기의 지도에는 산업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산맥과 하천, 항만,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해진 점에 큰 특색이 있다.”

 

 

고등학교 국사책에 실린 내용인데, 눈여겨 볼 것은 조선후기에 간행된 지도에 산업 문화 측면, 즉 산맥과 하천, 도로망까지 정밀하게 표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목판본 지도첩인 대동여지도를 예로 들어보자.

 

이 지도에 범례로 제시한 지도표는 14개 항목인데, 각 항목을 다시 1-3개로 세분했기 때문에 23개항을 알 수 있도록 표시하였다.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 섬, 마을을 비롯하여 역참, 창고, 관청건물, 봉수, 중요 무덤, 방리, 진보, 읍치(邑治), 성터, 옛날의 산성과 고을(古縣), 온천과 도로 등 지도에 표기된 지명의 총수가 1만 2천여개이다. 조선시대의 지도 가운데 가장 정밀한 세밀도로서 현재의 지도와 근사할 정도로 정확하다.

 

오늘날로 치자면 지형도에다 도로지도, 하천지도, 군사지도, 산업지도, 관광지도, 문화재지도까지 겸한 셈이다. 그로부터 140여년이 다된 지금은 어떠한가?

 

몇년전 대구에서 가스폭발의 대참사가 있었다. 지하에 매설된 가스관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공사를 하다가 말 그대로 뇌관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조선후기 지도의 발달과 지하 매설된 가스관의 폭발, 전혀 관련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지도는 문화수준의 반영        

 

지도의 제작은 한 나라의 국력을 반영하는 지표의 하나로 간주된다. 국가와 국민의 관심, 과학기술의 뒷받침, 국토전체의 인문사회 산업정보의 파악능력 등이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지도가 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라는 개인의 노력이 주가 되긴 했지만, 18세기 이후 조선사회가 성취하였던 국가적 능력과 관심이 축적하였던 문화적 수준이 반영된 것이다.

 

이같은 지도제작에 담긴 정신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면 인위적인 구조물에 대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표시하여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처럼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하 매설물에 대한 정보자료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분야별로 공사를 할 때마다 ‘혹여 다른 시설물을 건드리지 않을까’ 조마 조마하면서도 모험을 할 수 밖에 없었지 않았는가 싶다. 물론 개별적으로는 훌륭한 배치도가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치도가 서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던데 있다.

 

그 이후로 부쩍 국가 지리정보체계(GIS) 사업에 대한 관심이 증대 되었다. 국토 전반적인 산업지리자원을 체계화하여 전산화한다는 것이다. 지하 매설된 가스관, 수도관, 통신자료가 포함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늦은 감은 있지만 모든 정보가 정리되어 고루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이같은 국가와 국민의 관심이 ‘문화유산의 정보화와 지도화’에로 모아져야 한다. ‘문화유산의 해’라는 당위성은 두번째 두고라도 지금의 우리는 ‘통신만능’과 ‘비쥬얼시대’에 살고 있고, 또한 전국토에 인문사회정보의 파악능력도 본 궤도에 올라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다 다양하게 그리고 누구나 활용 가능한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는 국가 기밀을 누설한다 하여 잡혀가 옥사당하고 판각은 불태워졌다고 전하지만, ‘정보화’라는 세계적인 추세속에 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뒤떨어진 정보때문에 경쟁력만 떨어진다. 자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된 정보자료가 없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며 ‘세계화’속에 파고들기는 어렵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까지의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화 내지는 지도화작업을 살펴보자.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전국의 문화유적을 집대성한 “문화유적총람”을 발간한 바 있다. 유적의 유형별로 분류하여 소재지와 특징, 가치들을 설명하고 일련번호도 정리해 놓은 책으로 총 11,670점이 등재되었다. 전남은 2,053점으로 경북(2,359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10년이 지난 1987년, 전라남도에서 “문화유적총람”을 간행했는데, 25,184점에 이르렀다. 전남만 보더라도 10년새 열배도 훨씬 넘는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앞서 예시한 국토에 대한 인문사회정보의 파악 능력(지표조사 등 학술조사 실시, 향토사 연구 열기의 확산 등)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1984년에는 한국고고학연구회에서 “한국고고학지도”를 간행하였다. 당시까지 조사된 고고학 유적을 지도에 표기하고 소재지와 참고문헌을 정리한 지명표를 첨부했는데, 4,130여개소에 이른다. 선사유적은 물론 성터나 절터, 가마터 까지 포함하고 있다. 고구려고분이나 낙랑유적 등 북한 소재 유적까지 표기하였다.

 

전국 각지에서도 지역별로 지표조사가 행해졌는데, 전남지방이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군별로 역사, 지리, 선사유적(고인돌, 고분, 유물산포지), 역사유적, 불교유적, 도요지, 전통가옥, 민속자료 등을 조사하는 작업인데 1986년에 시작한 이래 20여개 시군이 완료되었다. 각 유적의 연혁과 특징을 설명하고 1/5만 지형도에 표시를 한다. 실제 이같은 조사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문화재의 지정이나 각종 개발 사업시 사전 협의, 그리고 유적지 답사 등의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시대정신’ 반영되게

 

새로운 유적의 발견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조사된 자료만이라도 적절히 활용되어야 한다.

 

이같은 조사결과들을 종합하고 시대발전(특히 과학기술)의 추이가 반영된 것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제작하고 있는 “문화유적총람 CD-ROM”이다. 문화유적의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신속한 자료를 위하여 처음으로 전국의 유적을 전산화 한 것인데, 3년 계획으로 2집까지 발행되었다. 1집에는 광주를 비롯한 6개시도와 경기도, 제주도 등 8개시도, 2집에는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등 4개도가 정리되었다. 물론 해당지역의 학술기관이 참여하여 지금까지의 조사연구결과를 반영하였다. 설명은 물론 유적의 분포지도와 원색사진까지 곁들였다. 소재지별, 유형별 등 다양한 검색작업이 가능하다. 전남의 경우 목포대박물관이 제작에 참여 했는데, 유적해설 4,056건, 유적 사진 1,355건, 유적분포지도 228건에 이른다.

 

최근에는 기존의 지표조사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고 있다. 1/5만 지형도에 표기된 유적의 위치는 세밀한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작업을 작년부터 하고 있다. 정밀한 지표조사와 함께 유적의 분포를 1/5천 지형도에 그 범위까지를 표시한다. 고인돌의 경우 분포 수량과 함께 주변의 주거지 등 연관 유적의 분포 가능성 까지를 지도에 구역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1996년에 나주를 비롯한 전국 8개 고도(古都) 지구를 대상으로 조사하고 있는데 금년(1997년)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문화유적 CD-ROM은 분명 진일보한 업적이다. 연구자는 물론 PC를 가진 개인이면 누구나가 활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적과 유물’에만 주로 한정되어 있어 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정보자료화와 지도화가 필요하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한 여러가지 사업도 결국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읽어 내는 것이고, 그 정신을 밑바탕 삼아 미래의 우리사회를 조망해 가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동일유형의 유적들을 지리적, 시대적인 성격으로 구분 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선사시대의 고인돌들도 입지유형이 큰 강줄기나 샛강, 그리고 구릉성 산지와 평야지역 등 자연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속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도 자세히 정리하다 보면 지역별로 유형화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또한 8-9세기의 불교유적을 표시해 보면 해안가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가, 아니면 산간에 분포되어 있는 유적이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선종불교가 유입되던 시기이며 지방호족이 활동하던 때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곁들여 유적의 분포도를 통하여 불교문화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서원과 사우를 예로 들어 보자. 향리 자제의 교육과 선현의 봉사를 담당한 일종의 사교육기관이었던 서원은 관련 인물이나 세력집단들의 동향과 밀접히 연관된다. 시기별로는 조선초기, 사색당쟁이 드러나던 16세기, 임진란이 지난 뒤의 17세기, 남설되던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등으로 크게 구분 할 수 있는데, 이를 지도화하면 지역별 특징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형문화재 지도화도 시급

 

이처럼 이미 조사되고 어느 정도 지도화가 된 유적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방법

외에 서로 다른 유형의 문화자산들에 대해서도 지도화를 통하여 지역별, 시기별 특징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사투리를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막연히 광양쪽의 말투를 ‘경상도 말씨’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섬진강이라는 큰 강줄기를 놓고 볼 때 영산강 지역과는 다른 말씨의 특성이 나타난다. 산이 높으니 물이 세차게 흐르고, 이같은 자연풍토가 생활에 반영되어 말소리는 거세고 억세게 되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품성만이 아니라 기질적으로 반영되어 ‘동편제’ 판소리의 폭포수 같은 웅장함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이같은 결론은 귀납적 방법에 의해야 하고,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지도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단어들에 대해서 발음방법이 다른 것을 표기해 본다면 분명 자연지리적인 요소가 반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속풍물도 살펴보자. 전남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정초에 줄다리기를 한다. 풍년농사의 기원과 마을 안녕을 비는 세시의례이다. 동네 사람 모두모여 뒷풀이로 한마당 축제를 펼친다. 수려한 산천과 넉넉한 물산이 그대로 주민의 품성에까지 스며들어 신명과 여유가 넘친다. 그런데 줄다리기 뒤에 그 줄을 당산나무에 감는 풍습이 있다. 신성시하면서도 그것이 그대로 거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희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독 함평이나 고창 영광 무안 등 전라도 서남부만 줄을 감는다고 한다. 만경강과 영산강을 배경으로 하는 농경문화 요소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밀한 지도화를 통하여 유적(옹관묘, 백제계 석탑 등)의 분포, 들노래, 장례풍습, 풍물(농악)가락 등과 비교한다면 분명 지역 특징적인 요소가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유형의 비교를 통해서도 지역문화의 특징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종합정보자료화와 지도화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PC로 손쉽게 유적 답사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먼저 지리적인 인식체계의 확립이다. 사투리를 예로 들긴 하였지만, 막연히 '○○지방과 같을 것이다' 라기 보다는 어떤 점이 같고 왜 같은가를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1차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말에 ‘산은 물이 나뉘는 고개로 부터(山自分水嶺)’라고 하였다. 고개를 중심으로 양쪽의 물줄기가 달라지는데, 물흐르는 곳을 따라 사람이 모여들고 물자가 운송되고, 자연히 시장이 형성되고 교통이 발달하며 문화권이 형성될 수 밖에 없다. 물길 따라 뱃길따라 인심과 풍류 또한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갈려진 호남정맥과 관계되는 산자락과 물줄기를 염두에 두고 문화유적은 물론 민속과 풍물, 품성과 기질까지도 이해하여야 하고 그 방법의 하나가 지도화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국가의 관심이다. ‘가스폭발사건’을 계기로 건설교통부에서 국가 지리정보체계(GIS)에 대한 계획을 수립중이라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산업과 연관되는 인위적 구조물 만을 대상으로 하는 전산정보화를 넘어서 자연자원이나 문화유산까지를 포괄하는 계획으로 입안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가스관이나 수도관 매설, 도로의 개설이나 댐 건설 등에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것이 매장문화재와 관련이다. 문화유산을 덮어두고 그위에 건설된 산업정보만을 정보자료화 한다면, 큰 사고는 안나고 겉으로는 광이 날지 모르나 우리의 내면세계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또한 육지부 뿐만이 아니라 해양의 문화자원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는 국민의 관심이다. 10여년전의 일화가 있다. 당시에 지정된 전체 문화재를 찾아보기 쉽게 한다고 문화재지도를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배부단계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드러 내놓고 알리는 것은 좋지만 너무 많이 찾아 들면 훼손의 염려가 있고 ‘손이 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도굴이나 도난의 표적을 스스로 제공해 버린 셈이 된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배부가 되긴 했지만, ‘한도둑을 열사람이 지키지 못한다’는 말처럼 국민의식이 바뀌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정보자료화와 지도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활용 여하에 따라서는 이기(利器)가 흉기로 변할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고루 참여해야 하고, 그 결과물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산정보화를 한다면 과학기술의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과학기술자들만이 이 작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개개분야의 전문가에 의해 어느정도 유형화된 자료를 집대성해야만 그 가치가 더 빛나고 활용이 더 많이 될 수 있는 것이지, 특정 이론이나 학파에 치우친 입장이나 한두사람의 전문가에 의한 ‘팔방미인식’의 정리는 오히려 ‘정보화’ ‘지도화’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말 것이다.

 

이제 이런과정을 거쳐 완성된 자료는 국민 누구나가 공유하면서 활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5월의 문화인물은 초의(장의순)선사이다. 우리 고장 무안(당시 나주) 삼향 출신으로 대흥사 일지암에 있으면서 다도(茶道)를 정립한 분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이에 대해서 물어 본다면, 도청이나 군청으로 전화를 할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PC를 통하여 검색하면 출생과 행적은 물론 그분의 초상화를 찾아 볼 수 있고, 유적지의 설명과 원색사진, 찾아가는 길, 실생활에의 응용 방법, 일본이나 중국과의 차문화의 비교, 유적지 주변의 문화관광 자원을 한눈에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말에는 그 자료를 토대로 자녀와 함께 직접 현장을 가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오가는 길에 할아버지나 외할머니께도 들려 인사도 드리고 말이다.

 

또, 길을 새로 내는 계획을 수립하는 사람이 전산정보 시스템을 통하여 계획예정구간의 매장문화재 분포현황을 검색하여 문화유산이 없는 지역으로 노선을 설정하는 일,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오래지 않아 가능한 일일까?

 

* 김희태, 첨단 문화재 지도를 만들자-유적총람 CD-ROM제작- 연중테마 : 문화유산 지키고 가꾸기④, <월간 예향> 1997년 5월호(통권 152호), 73-77쪽

 

대동여지도 광주부근도

<예향> 1997년 5월호(통권 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