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46 - 악조건 20년새 풍성한 수확, 향토사 연구 어제와 오늘, 1997

향토학인 2016. 6. 2. 04:03

인지의 즐거움046

  (19970101)

 

악조건 20년새 풍성한 수확

-향토사 연구 어제와 오늘-

 

김희태

 

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다. 그 고향, 자기가 태어나고 생활했던 지역을 아끼고 한 발 더 앞세우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리라. 그리고 자기의 고향에 대하여 애착을 갖고 자부심을 갖는 감정이야말로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이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사회의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근래 30여년간의 우리 사회는 한쪽으로 치우친 입장에서만 보고 듣고 느끼고 하다보니 그 감정이 애정이나 자부심 보다는 증오와 배타심으로 서로 작용했던 적이 더 많았다. 또한 그 나름의 사회적 환경 탓도 있어 ‘지역감정’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느껴지리라.

 

그 순수한 첫 출발점인 자기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바탕이 되어 전개되어 온 향토사학 연구,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 보자. 전남지역을 대상으로 연구자나 단체의 창립과 활동실적, 그리고 특징적인 연구업적을 몇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대학이나 전문학자들에 의한 조사연구활동은 다른 지면이 있으리라 본다. 이같은 정리를 토대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몇가지 제언하는 것이 순서일성 싶다.

 

국사정리는 향토사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국사’ ‘한국문화’ ‘중앙정치’라는 말에는 익숙해 있어도 ‘전남사’ ‘영산강문화’ ‘순천지방정치문화’라는 말을 쓰면 얼른 설명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실제 자료를 뒤져봐도 한눈에 알기 쉽게 정리된 경우가 드물다.

옛 성인의 말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이 고전 용어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문민시대를 이루고, 세계화를 추진하여 지구촌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수신제가(修身齊家)’ 된 연후에 ‘치국’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종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개개인이 정의와 도덕을 공부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것은 “개인과 지역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제가(齊家)’는 요즈음처럼 핵가족시대의 1세대(소가족)만의 뜻이 아니다. 혼인으로 얽혀 있는 대가족을 의미하고 이는 바로 그 지역 전체가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향토사가 잘 정리되어야만 국사가 바로 기록될 수 있고, 지역이 잘 다스려져야만 세계화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남과 광주의 향토사 연구성과, 그리고 개인이나 단체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충남의 예성동호회나 경주의 신라문화동인회가 있긴 하지만 지역별, 분야별로 참여하는 사람이나 정리 성과를 보면 단연 돋보인다는 평이다. 대학이나 전문 연구기관도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향토사 단체나 문화원, 그리고 각종의 연구회에서의 다양한 조사 연구활동은 오늘날 우리 지역을 ‘향토사의 보고’로 칭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향토사연구단체의 협의체인 전국협의회가 1985년 창립이래 지금까지 그 본부를 바로 광주에 두고 있다.

 

향토사단체로는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영광향문화연구회, 함평향토문화연구회,구례향토문화연구회, 담양향토문화연구회, 호남향사회, 향토문화진흥원, 광주전남사료조사연구회, 광주민학회, 향토지리연구소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각 군이나 면 단위에도 모임이 있다. 문화원은 도내 24개소와 광주 3개소 등이 활동하고 있다.

 

학회로는 전남사학회, 한국도서연구회, 남도불교문화연구회, 한국고시가연구회, 호남고고학회, 무등역사연구회, 현대사사료연구소, 남도민속학회 등이 있다. 전남도나 광주시, 시군 등 행정기관도 재정. 행정적인 측면에서 큰 뒷받침을 하고 있다.

 

특히 향토사연구단체는 자생단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문화원이 지방문화원 진흥법이라는 개별법에 의해 도움을 받고 있다면, 향토사 단체는 민법에 의한 비영리법인이나 임의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자생 임의단체로서도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실적을 올리고 있는데, 법적인 뒷 받침과 정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72년 설립된 ‘향문회’ 큰 활약

 

이같은 향토사연구활동은 크게 두가지 측면, 즉 단체창립 등 연대기별로, 또 하나는 활동의 성과물을 유형별로 살펴 보는 것이다.

 

단체로서의 활동은 1957년 창립된 한국고문연구회(변시연)가 처음인듯 싶다. 고문헌의 수집과 간행을 지금까지도 해오고 있다. 1960년대에 들어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대학과 전문가들이 지역문제를 조사 연구하기 시작한다. 각 지역 문화원이 설립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70년대 들어서서 ‘향토문화’ 연구를 대상을 한 단체가 처음 설립되는데, 1972년 창립된 향토문화개발협의회(약칭 향문회)이다. 장성과 광주를 중심으로 28명의 회원이 향토문화 개발과 이론 정립, 그리고 지역사회의 미래상 정립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문향’이라는 회보를 55호까지 냈으며, 지금은 200여명이 활동한다.

 

1973년에는 왕인박사현창협회가 결성되고, 1974년에는 한국문화재보호협회가 지방에 지부를 두면서 도지부와 시군지부가 결성되기도 한다. 1978년에는 전남일보 부설로 향토문화연구소가 발족된다. 1979년 창립된 광주박물관회에서도 신문과 연보 발간, 박물관 대학 개설(1982), 청소년 문화강좌(1984) 등을 실시하는 등 사회교육을 실시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많은 단체가 결성된다. 전남일보가 광주일보로 통합된 뒤 1982년 개편된 향토문화연구소(김정호)는 각 지역에 연구위원제를 두고 향토사 순회강연과 실무강좌, 그리고 회보간행 등을 한다.

 

또한 각 시군 단위로 향토사연구회가 결성되기 시작하는데, 지역별 연구위원이 주동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82년에 함평향토문화연구회(리현석), 영광(이기태), 목포(이돈채), 1986년에 구례(문승이), 담양(이해섭), 나주목(이민관), 진도, 탐진향토문화연구회 등이 활동한다. 면단위까지도 확산되는데 1986년에 다시(나주)향토문화연구회(최병철), 주암(승주)문화연구회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에는 대우재단에서 향토사 단체에 지원을 하며, 다양한 각지의 단체를 대변할 협의체가 요구되어 1985년에는 향토사연구 전국협의회가 결성되는데 본부(사무국)를 광주에 두게 된다.

 

이처럼 지역별로 결성된 단체와는 달리 특정한 대상의 연구를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도 있다. 1982년 발족한 다산학 연구원, 1986년에 광주민학회, 1987년 창립한 호남보학연구회와 전남땅이름학회, 전남사학회, 향토문화교육연구회, 1988년에 현대사사료연구소, 무등역사연구회, 1989년에 광주전남사료조사연구회와 호남향사회, 남도불교문화연구회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단체의 구성원은 전문가와 동호인을 포함하고, 연구대상이 광범위해지며, 각 지역에서 고루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기업, 언론, 행정기관도 참여

 

기업이나 개인이 출연하여 법인을 설립하기도 하는데 1980년 설립한 김향문화재단에서는 문화총서 5권을 냈고, 1977년 설립된 금호문화재단에서는1983년부터 격월간으로 “금호문화”를 발행하게 되는데 이제는 월간으로 140호 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80년대에 또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전남도 등 행정기관에서도 다양한 향토연구 활동을 지원하거나 직접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전남도에서는 향토문화총서를 40책 이상을 내고 있으며, 1986년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적인 학술행사(고문화심포지움)를 주최하여 해마다 이어지고 있으며, 1991년부터는 6책 30권 분량으로 도지를 발간하고 있다. 광주시에서도 향토문화연구총서, 고전국역총서, 조선조명현연구서등을 간행하고 있으며 광주권 인물을 중심으로 5회째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각 시군에서도 마을유래지나 내고장 전통가꾸기 등 책자 간행을 지원하고 있다.

 

각 시군 문화원에서도 다양한 연구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1986년에는 문화원 도지부가 결성되어 문화의 날인 10월 20일에 향토문화상을 주고 향토문화연구 심포지움도 매년 열고 있다.

 

1990년에는 향토문화진흥원(김정호)이 설립되고, 1993년에는 향토지리연구소가 활동한다. 정보화 추구라는 시대의 흐름속에서 각종의 문예정보를 컴퓨터를 통해 보급하는 단체나 연구소도 설립되고 있다. 광주교육연구소에서 ‘남도기행’이라는 CD롬 타이틀을 제작하여 비엔날레 기간동안 지역 홍보자료로 활용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같은 향토사 단체들은 자생력을 갖고 창립 이후 현재까지 계속 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창립의 계기만 부여된채 활동이 멈춘 단체도 있다. 이제 앞에서 살핀 단체들이 이루어낸 성과를 특징적인 몇몇 유형별로 살펴보자

 

가장 기본적인 조사라 할 지표조사, 학술조사는 시군별 역사유적,선사유적,불교유적,민속자료 등을 정리하는 것으로, 도내 24개 시군중 20개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가 완료되었다. 물론 이는 행정기관의 지원과 대학연구진의 조사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현지 조사에서 각 지역의 향토사단체들이 가장 중요한 정보제공을 했던 것이다.

 

문헌집은 기초자료인 지리지 읍지와 각종 옛문서 등을 발굴하여 정리 번역 영인하는 작업으로 ‘해남문헌집’(1989), ‘함평군문헌사료집’(1992-1993), ‘광주권문집해제’(1992), ‘조선왕조실록 전라도사료집’, ‘장흥지리지읍지모음’(1992) 등 다양하다.

 

마을지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초집단이며 앞서 인용한 “수신제가” 이념의 실천장소의 정리라는데 중요성이 있다. 이 마을지는 세가지 방향에서 정리되고 있다. 우선은 마을주민이 직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비용을 염출하는 것인데 장흥 부산 용반리(우리의 보금자리 지와몰)와 함평 학교 영화마을(영화촌)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대학연구진이 참여한 경우는 신안 안좌 방월리(방월리)가 있고, 향토단체에서는 영암 군서 구림(왕인과 도선의 마을 구림)과 나주 노안 금안동(호남3대명촌 금안동) 등이 있다. 장흥 관산 방촌(전통문화마을 장흥방촌)의 사례는 대학과 향토연구자, 주민이 함께 참여하고 관에서 재정지원을 받은 경우이다. 군이나 면단위를 묶어 마을유래를 집성한 자료도 발간되고 있다.

 

‘해제고을’, 향토사연구의 교과서로 활용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군지나 면지가 편찬되는데 면지로서는 무안 해제, 나주 봉황, 영광 법성, 순천(옛 승주) 송광면지 등이 간행된 바 있고, 강진과 장성, 장흥은 면별로 연차 간행중이다. 특히 무안 해제면지(내고향 해제고을)는 이 지역 면지의 효시가 되었으며, 순천 송광면지(송광향지, 진인호)는 주암댐 수몰로 고향을 잃게 된 한 교사의 힘으로 정리된 것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각 지역의 다양한 자료를 모아서 간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남도 민요를 모은 ‘진도 속요와 보존’, 현대사 자료를 모은 ‘청죽골비망록’(담양), ‘소안항일사료집’(완도), 촌락운영에 관한 ‘영광남극재사백년’, 물줄기의 내력을 밝힌 ‘영산강 350리’ 등을 들 수 있다.

 

연표와 향토사 방법론에 대한 책도 정리되고 있다. 연표로는 ‘광주전남100년연표’(광주일보), ‘전남의 역사연표’(전라남도), ‘광주1백년연표’(박선홍)가 있다.

 

방법론에 대한 이론서는 ‘향토사이론과 실제’(호남향사회, 향토문화진흥원)와 ‘문화유적조사요람’(향토문화개발협의회) 등이 이 지역에서 간행되어 전국 향토사 연구의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다.

 

정책적인 배려와 일상 생활화를

 

지금까지 시기별 현황과 유형별 특징을 살펴 보았는데, 몇가지 제언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우선은 지속적인 조사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정책적인 배려와 지원도 필요한 일이다. 지속성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될수록 더더욱 화급한 일이다. 정책적인 배려는 마지못해 하는 ‘시혜’ 차원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실현 가능한 장기적인 조사계획도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행정구역단위별로 조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적인 특성에 따른 조사 연구도 함께 해야 한다. 영산강 물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영산강은 10여개의 큰 갈래와 190여개의 샛강이 합해지면서 350리를 달려 목포로 흐른다. 목포사람들은 바로 식수와 직결되지만 광주나 나주 사람들은 목포의 ‘물문제’는 자기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는 인위적인 행정편제에 지난 수십년을 매달려 오다보니 자연과 문화는 뒤로 밀려 버려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이야기되는 ‘광역행정협의’는 이처럼 자연과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찾아야 하고 그 실마리는 향토사에서 풀어주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다양한 연구단체의 협의체나 협조체제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중복 조사 등으로 인한 시간, 예산, 인력 낭비요인 제거와 진정한 지방시대를 맞아 일어날 수 있는 이기주의를 문화차원에서부터 풀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향토학 백과사전을 만들자

 

또 한가지는, 교육문제와 연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 향토학과나 지방사학과를 설치하거나 관련 강좌의 개설, 그리고 이 같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훈련된 인력을 바로 그 지역에서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속을 공부하는 학생이 자기 지역의 민속조사에 참여하고 군청이나 교육청, 문화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문화교육자료집 편찬에 참여 하고, 졸업후 전문직원으로 채용이 된다면 일석삼조가 아닐까?

 

교육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는 초중고교에서도 자기 지역을 보고 듣고 느끼는 ‘산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에는 교과서의 편제가 바뀌어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더 나아가 ‘생활화’를 해야 한다.

 

다음으로, 조사 연구 결과는 공유되어야하고 종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향토연구자들은 경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전문가 집단의 방법론과 협조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해서 간행된 자료는 어디에서든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는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을 찾은 외지의 관광객이나 방문자 들이 한가한 시간에 시내 서점에서 우리 지역에 대해 알고자 책을 찾았을 때 ‘향토코너’라도 있어 다양한 이 지역의 자료가 알려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향토자료가 개설된 코너가 있다는 서점을 쉽게 찾을 수 없다. 향토사 연구에 있어 전국에서 가장 앞선 지역이라 하지만 사장되어 버리고 활용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우리는 아무데서고 ‘국어사전’은 흔히 구해 볼 수 있다. 그렇듯이 우리 지역의 자료를 모두 담은 ‘전남향토사전’ 하나쯤 만들어 전국 어디서든 전남향토사전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처럼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각국어로 번역하여 내놓고, 또 ‘인터넷’에라도 올린다면 향토사가 세계화시대의 초석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월간 예향> 1997년 1월호(통권 148호)

특집 : ‘지역학’ 연구 붐

- 연구모임 우후죽순(50-54, 박광우)

- 악조건 20년새 풍성한 수확(55-59, 김희태)

- 현장사료 지키는 마지막 파수꾼(56-60, 정금자)

- ‘향토찬미’ 넘어 생활사 탐구로(65-69, 김정호)

 

 

<향토문화 실무강좌>( 광주일보 향토문화보 특대호, 1985) - 향토문화 순회강좌 교재로 향토사연구 이론서의 기초가 되었다. 광주일보 향토문화연구소 김정호소장과 목포대 사학과  이해준교수의 만남은 향토사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된다.  


<향토사 이론과 실제>(향토문화진흥원 출판부, 1992) 이해준교수와 김정호원장,  호남향사회 회원들이 참여한 향토사 입문서. 전국적으로 향토사 입문 교재로서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향토사 회장단 모임(20020628) - 3줄 좌4 진인호(순천), 5 문승이(구례), 6 양광식(강진)

                                                        2줄 좌3 신희범(영암), 4 이민관(나주), 6 김연수(장성), 7 김용환(보성), 8 이재홍(나주), 9 문환중(나주)

                                                        1줄 좌1 최재양(화순), 2 강수의(장흥), 4 양기수(장흥), 5 리현석(함평), 7 김정섭(무안)

<예향> 1997년 1월호(통권 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