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043
(20000401)
천년만에 찾은 날 내린 비, 눈물이련가.
-후백제 태조 진훤과 조선 태조 이성계 유적-
김희태
천년만에 찾은 날 내린 비, 눈물이련가.
용의 해인 경진년 첫 답사(2000년 3월 19일, 광주민학회)에 왠 봄비인가 했다. 충남의 논산과 전북의 전주. 후백제를 세운 진훤(견훤)과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유적지를 대상으로 출발할 때 빗발이 날린 것이다. “용”과의 상징성은 두 인물이 왕조를 개창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용이 나타날 때면 비구름이 함께 한다는 속설에서인지. 진훤왕의 “지렁이” 설화는 자못 흥미롭다. 개국에 이어 누대에 걸쳐 왕업이 이어졌더라면 어쩌면 “지렁이”가 아닌 “용” 설화가 깃든 출생담 내지 혼인담이 회자되었을 법하다.
첫 답사인 탓에 회장(이강재님, 조청일님) 인사, 답사 계획, 회원 저서(이정심 수필집, “뻘짓 어만짓”)를 나누다 보니 갈재를 넘고 있었다. 논산에 이르러 국도 1호선을 타고 내려가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왕릉에 다다를 때쯤 더없이 맑은 하늘이 일행을 반겨 주었다.
입구의 안내표지에는 분명 “견훤왕릉”이었는데 묘역에는 전 견훤묘(傳 甄萱墓)라 했다. 개국조이건만 왕릉이라 부르지 못하고 그 마저 고증이 안되어 있으니 눈물을 흘릴법하지 않는가. 또 있다. 후백제왕국을 세운 것이 892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해가 936년, 실로 천년 세월이 지나 첫 기병지인 광주에서 민학패들이 찾아 나섰으니 또한 감동할 일이 아닌가.
왕릉은 둘레가 83미터, 높이는 5미터 가량, 직경 9미터로 '견휜묘', '왕묘', '왕총말랭이‘라고도 한다. 마산천과 어울어진 너른 들 건너 전주의 승암산과 김제의 모악산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이다. 70리 거리의 그 산 아래 도읍지인 완산주(전주), 아들에게 갇혀 지낸 금산사(김제)가 있다.
진훤(견훤)에 대해서는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 많다. 먼저 상주 가은현과 광주 북촌이라는 출생기록이다. 상주는 전국 9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상주에 속한 가은현이라 해야 하고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일원이었다. 892년 광주에서의 첫 기병의 배후 근거세력, 조선후기의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조에 기록된 견훤대(甄萱臺), 견훤의 아들 신검과 연관 있을 법한 “신거무장” 전설 등을 보면 광주와 관련이 많다.
견훤인가, 진훤인가. “甄”자는 질그릇을 굽다, 교화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견”과 “진”으로 읽는다. 조선후기 역사학자인 순암 안정복(1712-1719)이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진훤으로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종의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에서도 ‘진’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甄氏” 족보에도 본래 ‘진’이었는데 탄압을 피해 ‘견’으로 읽게 되었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고 하니 진훤으로 읽어야 함이 타당하다.
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45년간의 치세기간이다. 당대로 끝나고 말았지만 40년 이상 왕위에 있으면서 군사를 부리고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능력은 있었던 셈이다. 특히 외교적인 측면이나 군사력 면에서는 왕건보다도 우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 내부의 분열, 934년 9월의 운주(홍성) 전투의 패배, 개혁의지의 부족에 따른 민심의 이반에 따라 멸망하였다.
특히 신라 영역에 살고 있던 백제 유민들이 추구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요구를 따르지 못한데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개혁에 대한 열망을 수렴하지 못한 정권은 항상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교훈으로 남겨준 준 셈이다.
첫 답사의 의례행위에 이어 마련한 음식을 놓고 “민학주”가 돌려졌다. 고천문은 1년 무사와 조자룡회장의 49재 축원을 곁들였다. 제관은 80청년 개근생 강수의 옹. 이어 황산벌의 백제와 신라,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 논산을 뒤로 한채 전주로 향했다. 전주에서는 서해숙선생(전라문화연구소)과 함께 했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와 전주
전주에서는 천주교 성지를 거쳐 승암산에 올랐다. 높이 306미터의 산이지만 전주천이 감싸고 돌면서 형성된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진산이다. 전주의 역사와 풍물을 말하면서 다다른 곳이 동고산성이다. 진훤왕이 완산주에 도읍 할 때 그 본부가 어디였겠느냐를 알게 해준 산성이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면 22칸의 크기의 3단 건물터를 확인했다. 제일 윗단의 길이가 117미터에 이른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선조가 자리잡은 곳이며, 그가 남해의 왜구를 물리치고 경축연을 베풀었다는 오목대, 이목대, 그리고 한벽당 등을 지나 경기전에 이르렀다. 전라도의 중심도시로서 전주도호부성의 문루인 풍남문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요즈음에 사극이 유행하여 조선왕조 개국과정 등에 대해서는 일반인들도 잘 알 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사극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경기전의 초입에는 “용의 눈물 촬영지”라는 안내표지가 버젓이 서 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이성계는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과 사대부들과의 결탁 등에 힘입어 조선왕조 개창에 성공한다. 왜구와의 싸움에서 경렬공 정지장군의 활동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뒤에 이성계와 갈라서게 되는데, 무등산이나 지리산의 불복산 설화가 이에서 연유하지 않은가 싶다.
경기전(사적 제339호)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414년에 지어 어용전 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 전주, 경주, 평양에 있었는데 뒤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이라 불렀다. 이성계의 영정(보물 제931호)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경기전 경내에는 1970년 완주군 구이면에서 옮겨 놓은 예종(1468-1469) 태실과 비석(1578년 세움), 복원된 전주사고(史庫), 조경묘 등이 함께 있다. 조경묘(肇慶廟) 1771년에 지었는데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을 보관한 곳으로 정유재란시 이곳 선비들이 끝까지 지켜낸 행적이 유명하다. 이 곳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은 500여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기록문화유산이다.
승암산에서는 산수유, 전주천을 따라 내려 오면서는 개나리 움에서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답사의 주제로 정한 지렁이와 용, 출발할 때 내린 비, 지렁이의 눈물인가. 아니면 용의 눈물이었을까.
* 김희태, 후백제 진훤과 조선 태조 이성계유적-광주민학회 답사기-, <금호문화>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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