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42 - "시대어(時代語)" 단상,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1994

향토학인 2016. 6. 1. 03:46

인지의 즐거움042

    (1994)

"시대어(時代語)" 단상,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김희태

 

  기록은 한번 잘못되면 오래간다

 

   <한국의 지명유래집>-전라·제주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10)을 보다가 우선 눈에 띠는 두어 곳을 살펴보게 되었다. 땅이름(地名)의 유래 설명이 틀린 곳이다.

 

   그 하나는 표제어 “겸백면”에 관한 설명 가운데 있는 내용이다. 겸백면은 전남 보성군 지역인데 조선시대 후기의 겸어면(兼於面)과 백야면(白也面) 두 개 면이 1914년에 합해진 합성 지명이다. 그런데 이 “백야”와 표기가 같은 다른 곳의 지명을 보성 겸백면 일부인 “백야”로 설명한 것이다. 다음 내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성)에 "팔전산 봉수(八巓山烽燧) 동쪽으로 순천부(順天府) 백야관(白也串)에 응하고 남쪽으로 마북산(馬北山)에 응한다."라고 백야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한국의 지명유래집> 전라 제주편)

 

   이 글의 “순천부 백야관”은 현재의 여수시 화양면에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로 조선시대에는 순천도호부에 속했던 곳이다. 보성 겸백면의 일부인 “백야면”과 순천부 “백야관”을, 지명표기가 “백야(白也)”로 같다는 점에서 동일 지명으로 보고 설명한 것이다. 보성 겸백면 고문서를 조사하면서 확인하여 수정 건의(네이버 지식백과)를 한 바 있다. 2014년 11월의 일이다.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국가기관에서 전문가들의 집필로 발간된 자료인지라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6년 5월에도 고쳐지지는 않았다.

 

   또 다른 하나, <한국의 지명유래집> “영광군” 설명의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의 유래에 대한 내용이다.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우선, 1889년에 흥선대원군에 영광을 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호수가 많은 고을 수로 보니 순천·나주에 이어 세 번째로 호수가 많아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다. 영광군청 누리집의 설명도 비슷하다.

 

     - 한편, 이곳에는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이란 구절이 전해온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1889년 영광을 칭해 '호수(戶數)는 영광만 한 데가 없다.'라고 한 데서 유래 되었다. 호수가 많은 고을 수를 적다보니 나주·순천 다음에 영광이 세 번째였고(29개 면 557개 리, 12,691호 44,783명)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에서는 전주 다음으로 네 번째였다고 하여 비롯된 것이다.(<한국의 지명유래집> 전라 제주편)

 

     - 1889년 29개면(557개리) 중 12,691호(44,783명)로 "호수(戶數)는 영광만한데가 없다"라고 한데서 유래 되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이하응)이 말했다고 한다. 호수가 많은 고을수를 적다보니 나주(17,633호/57,782명), 순천(13,669호/46,338명) 다음에 영광이 세번째이고 전라도에서는 전주 다음으로 네 번째였다.현대에 와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비교해 보면 과거 영광은 호수가 많고 인구가 많아 한마디로 인심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의미한다.(영광군청 누리집/영광의 유래/옥당고을, 호불여영광)

 

   그런데 1889년 흥선대원군이 영광을 칭했다는 것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또 나주 순천에 이은 영광의 호구수 12,691호, 44,783명은 그 출전은 어느 역사서일까?

 

   결론적으로 1889년은 근거가 없다. 1889년 발간 영광읍지도 아직까지는 확인이 안되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호남평으로 문불여장성, 호불여영광 등 팔불여를 말했다고 알려진 정도이다.

 

   호구수 12,691호 44,783구 기록은 1789년 <호구총수>에 나온다. 아마도 이 “1789년”이 언젠가 “1889년”으로 오기된 것이 그대로 국가기관에서 간행한 <한국의 지명유래집>에 실리고 영광군청 누리집에도 오른 듯 하다. 이 <호구총수>를 인용한 “호불여영광” 유래에 대한 글은 필자가 오래전에 쓴 적이 있다.

 

   1994년의 일이다. 향토학 지기(선영란 외) 몇몇이서 전남 역사문화 해설서 원고를 나누어 쓴 적이 있다. 그 때 역사편을 주로 맡았는데 영광지역을 정리하다가 두 가지 내용을 자료로써 확인하였다. 하나는 고대의 고분들이 법성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한다는 것. 문화 전래의 길로서 해양-법성의 중요성이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할까. 다른 하나는 “호불여영광”의 문헌근거로서 <호구총수> 수치로 확인 한 것.

 

   이때 쓴 원고는 어느 학자가 일부만 선별적으로 인용해 자료집(1995)으로 내고는 원본 출처는 밝히지도 않았다. 원 자료는 지금껏 간행되지 못하고 있다. 그때 쓴 영광 역사편 글의 일부를 2001년 3월 27일 영광군청 회의실에 열린 “문화부 이달의 문화인물 수은 강항선생 학술대회”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발표 주제는 “수은 강항선생의 선양활동”. 이 글의 한 장으로 ‘ 영광지역의 역사 배경’으로 다뤘던 것.

 

   당시 발표문은 공간되었기 때문에 그 글이 15년이 지나면서 내용이 덧대지고, 연도 표기가 오기되고 하면서 변화를 한 것 같다. <영광군지>(4권 64쪽, 2013년)의 호구수 관련 언급은, 오래전에 쓴 글이 그대로 실린듯하다. 당시 "시대어(時代語)"라는 말을 써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1994년 작성해 2001년 발표문에 실린 그 글을 옮겨 둔다. 잘못 정리된 것은 바로 잡아지기를 기대한다.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의 유래

 

   고려말기 왜구의 침임으로 인해 진도와 같이 섬지방의 고을은 내륙으로 옮기기도 한다. 진도는 1350년, 현재의 영암 시종으로 옮긴다. 이 와중에서 20여개 고을이 없어지거나 인근 고을에 합해지기도 한다. 백제 이래로 독립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던 육창, 삼계, 임치현 등도 없어지며 영광에 합해지기에 이른다.

 

   조선 개국이후 지방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영광은 1456년(세조 2)에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 이래의 읍터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의 장성 삼계를 포함한 영역이었다. 이때 향교도 함께 옮긴다. 전라도는 57개 고을로 정착된다. 임진왜란의 피해로 진원현이 장성에 합해진 뒤 56관이 된다.

 

   조선시대의 행정 제도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삼강, 즉 충효열 등의 교훈을 어긋친 자가 있으면 고을을 없애거나 이름을 바꾸어 인근 고을에 통합해버리기도 하였다. 영광은 조선초기의 개편 이래 큰 변동은 없었으나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극규란 사람의 역옥으로 인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이 지나 복구되었다. 100여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에 이주의 역옥으로 인해 강등되기도 하였다.

 

   군현의 하부조직으로는 면리제가 나타난다. 보통 읍의 치소는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면을 분할한다. 이를 방위면이라고 한다. 전국 군현 현황을 집대성한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년, 1759)에는 28개면과 2개도에 호구는 12,672호 44,619명이었다. 30년 뒤에 전국의 호구통계와 면리 명을 정리한 책인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 1789)에는 1개면이 줄어 27개면, 2개도(島), 12,691호, 44,783명으로 나온다.

 

   우리는 흔히 ‘호수(戶數)는 영광만한 데가 없다’(戶不如靈光)는 말을 쓴다. 조선말기에 유행된 말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말했다고도 한다. 이 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왔을까? 우선 다음의 통계를 보자. 1789년 <호구총수>상의 수치이다.

 

     - 나주 71면 769리 17,633호 57,782명

     - 순천 26면 640리 13,669호 46,330명

     - 영광 27면 557리 12,691호 44,783명

     - 흥양 16면 262리 10,015호 45,004명

     - 광주 41면 384리 8,373호 32,690명

     - 영암 20면 626리 8,214호 15,303명

 

  호수(戶數)가 많은 고을 순으로 적어보니 영광은 세 번째였다. 전주가 20,947호이니 전라도에서는 네번째로 많은 셈이다. 나주는 목으로서 영산강을 낀 전남의 중심지이며 순천은 도호부로서 동북부의 중심지이다. 나주에는 영산창, 순천에는 해룡창이 설치되어 물산 보관이동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하였기에 그만큼 사람도 많이 살았던 것이다. 결국 영광은 법성포를 중심으로 하는 조창과 연관되어 성장할 수 있었고 이같은 전통이 ‘호불여영광’이라는 "시대어(時代語)"를 낳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호구총수>(1789년) 영광 기록 앞부분. 面 27, 島2, 里 557, 元戶 12,691호, 口 44,783의 기록이 보인다. 이어 각 면별로 호구수와 소속 리 명칭을 적고 있다. 전국 마을 이름이 처음으로 종합해 기록된 중요한 관찬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번호 규1602)에 소장되어 있고 원본크기는 세로 32.8센티미터, 가로 21.8센티미터이다. 축소 영인본(<호구총수>-규장각자료총서-, 서울대학교규장각, 1996. 172쪽)을 인용하였다.

 

* 참고 : 김희태, 수은 강항선생의 선양활동, 문화부 이달의 문화인물 수은 강항선생 학술대회(발표문), 2001.3.27, 영광군청 회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