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51 - 1492년 문과급제해 시강원 보덕, 담양부사를 지낸 문신, 나주 보덕공 박이관비, 1799년

향토학인 2024. 4. 22. 10:20

인지의 즐거움351
 

1492년 문과급제해 시강원 보덕, 담양부사를 지낸 문신, 나주 보덕공 박이관비, 1799년

 

김희태


보덕공 박이관비는 나주시 남평읍 광촌리 함양박씨 종중 선산에 조성된 묘역에 있다. 조선시대 전기 문과에 급제한 역사인물로서 석비가 거북좌대와 생동감 있는 쌍용문과 화문 비머리 등 양식적으로 특징이 있으며, 비문은 당대 문신 학자 도암 이재가 짓고 제액 글씨는 유척기, 비문 글씨는 민우수가 써서 건립연대와 찬서자를 알 수 있으며 당대 서예가의 글씨로서 예술성도 지니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향촌사회사적 가치가 크다. ‘나주 보덕공 박이관비 및 석물 일괄’ 명칭으로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62호로 지정(2024.01.17.)되었다.
 
박이관(朴以寬, 1459~?)은 조선전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보덕, 사헌부 장령, 담양부사, 홍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용(子容), 호는 보옹(葆翁)이다. 박득시(朴得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해(朴解)이며, 아버지는 진사 박수화(朴遂和)이다.
 
박이관은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92년(성종 23) 식년 문과에 오른다. 출생연도는 족보에 1459년으로 나온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도 1503~1518년 사이의 활동 기록이 나오고 『담양군읍지』에 1519년 기묘사화 이후 소요자적 했다는 것으로 보아 1520년대 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1518년(중종 13) 담양부사 때 도회 취재(都會取才)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도회 취재는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의 하나이다. 복시(覆試)가 있기 전년에 실시하는 초시(初試) 외에 각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도내의 교생을 가려서 매년 6월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여 강론 또는 제술(製述)을 시험해서 우수한 자를 계문(啓聞)하여 복시에 바로 나아갈 자격을 주는 초시에 준하는 시험이다.(《경국대전》 禮典 諸科 奬勵).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많은 선비가 화를 입음을 보고 조정에서 물러나 동생 박이홍(朴以洪)과 더불어 명산을 순례하며 자연을 즐겼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양친의 상을 당하매 여막을 짓고 시묘하였다. 박이관이 세상을 떠나자 남평 정광산에 묘역을 마련하였다.
 
박이관의 비는 1799년(정조 23)에 세워진다. 비석 말미의 연기 “숭정 후 삼기미 십이월 일(崇禎後三己未十二月 日)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당시 민간에서는 청나라 연호 대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 기원년(1628년)으로부터 몇년이라는 형태를 많이 썼다.
 
비문은 도암 이재(陶庵 李縡, 1680~1746)가 짓고, 지수재 유척기(知守齋 兪拓基, 1691~1767)가 제액 전서, 정암 민우수(貞菴 閔愚洙, 1694~1756)가 비문 글씨를 썼다.
  
이재는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부친은 이만창(李晩昌)이며, 모친은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며, 송준길(宋俊吉)의 외손녀다. 모계가 당대 서예로 명성을 날리던 가문인 점에서 이재의 서풍의 근원은 외가인 것으로 보인다. 23세이던 1702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이후 이조정랑, 대사성, 양관 대제학 대사헌을 지냈다. 삶의 대부분을 도학자를 견지하면서 명사들의 신도비와 묘표 등을 남겼다. 장성 김인후신도비(송시열 찬, 1742년, 전라남도 기념물) 비문 글씨를 썼다.
 
민우수는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菴)·섬촌(蟾村), 시호는 문원(文元),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조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며, 부친은 문충공 민진후(閔鎭厚)이다. 김창집·김창협에게 나아가 수업하였고, 사헌부지평, 대사헌, 세자찬선 · 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순창 삼인대비(三印臺碑)(1744년, 전북 유형문화재), 안성 홍계남장군 고루비(洪季男將軍故壘碑)(1745년, 경기 유형문화재), 정읍 고암서원 묘정비(考巖書院廟庭碑)(1747년, 전북 문화재자료) 등을 썼다.
 
유척기는 문신 학자이자 명필가로 금석학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자는 전보(展甫), 호 지수재(知守齋), 본관은 기계(杞溪),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나주목사를 지낸 유명악(兪命岳)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정랑, 대사간, 호조판서, 우의정을 지냈다. 순창 삼인대 비의 제액 전서(1744년, 전북 유형문화재 ), 정읍 고암서원 묘정비의 제액 전서(1747년, 전북 문화재자료 ), 완주 안심사 사적비(安心寺事蹟碑) 제액 전서(1759년, 전북 유형문화재), 괴산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의 제액 전서(충북 기념물), 그리고 고흥 송대립 묘갈(宋大立墓碣) 제액 전서(1750) 등을 썼다.
 
거북 좌대 위에 비신을 세운 석비이다. 비신과 비머리는 한 돌이다. 비머리는 앞면에 쌍룡문이 사실적이며 뒷면은 화문을 조식하였다. 앞면부터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제액 전서와, 찬서자, 비문, 연대, 세운 사람이 새겨져 있다.  
 
제액은 “시강원 보덕 박공 묘갈명(侍講院輔德朴公墓碣銘)”, 비제는 “유명 조선국 통훈대부 세자시강원보덕 지제교 박공묘갈명[병서](有明朝鮮國通訓大夫世子侍講院輔德知製敎朴公墓碣銘[幷序])”이다.
 
비문은 박이관의 출자와 관직 등 행적, 선대의 세계, 박이관 형제의 활동, 자손록, 명문 등의 내용이다. 후손 박경흠(朴景欽)이 이재에게 요청하여 비문을 받았고 9대손 해겸(海謙), 해명(海明), 해돈(海暾), 당(塘) 등이 비석을 세울 때 주도하였다. 박경흠은 박이관의 둘째 아들 박명순(朴命純)의 후손으로 이재의 제자이다.
 
* 탁본조사
-일시 : 2024.04.28(일) 08:00~ 14:00.
-장소 : 나주시 남평읍 광촌리 산1 함양박씨 선산
-주차 : 남평읍 광촌리 178 저존재(著存齋)
*조사 : 윤여정, 정선종, 김민규, 이수경, 성대철, 김희태, 곽재경, 양성숙, 이효숙/박성환, 박해열, 박형종(종중), 김집중


【국역문】
시강원 보덕 박공 묘갈명[제액]
유명 조선국 통훈대부 세자시강원 보덕 지제교 박공 묘갈명[병서]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경연사 세자우빈객 이재는 지음.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집의 민우수는 글씨를 씀.
대광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유척기는 전자를 씀.
 
박 보옹(葆翁) 이관(以寬)과 월영(月影) 이홍(以洪)의 형제는 기묘 년간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 조정암과 같은 모든 현인들이 소인을 몰아내고 기강을 바르게 잡으려 했다.
 
보옹은 임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예(司藝) 홍문관 전한(典翰) 시강원 보덕(輔德)을 지내고 외직으로 남평과 능성 현감 순창군수 담양 남원 강화 부사 홍주목사를 지낸 사실은 가승에 나타났고, 그밖에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은 자상하지 못하나 모두 부모를 봉양키 위하여 나아간 것이다.
 
월영(月影) 공은 현량(賢良) 천(薦)을 받았으되 응시않고 사화가 일어남에 당적(黨籍)으로 금고되었으니 그 출세하고 숨은 것이 비록 다른 것 같으나, 보옹도 기묘년 뒤에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와 명양(鳴陽, 창평 고호) 산수 좋은 곳에서 소요하였으니 출세하고, 처세한 뜻이 은밀한 약속이 있었다고 보겠다. 아 그 현철함이여.
 
보옹의 자는 자용(子容)이요 천성이 인효(仁孝)하며 양친에게 효도가 극진하고 전후 상(喪)에 다 여묘하며 상기(喪期)를 마치니 사람들이 옛 고시(高柴)가 이(齒)를 보이지 않은데 비교하였다. 그 담양부사가 되었을 때 모친이 늙었다 하여 공부(公府)로 가기를 싫어하거늘 공이 감히 그 뜻을 어기지 못하고 아우 월영으로 하여금 모친을 모시고 창평 유곡(維谷)으로 이거케 한 것은 공이 봉양하기 편하게 한 것이다. 공은 부(府)에 있으며 공양할 음식을 친히 맛보고 보내는데 유곡은 담부(潭府)와 거리가 수십리로되 그 조만(朝晩)간 때를 지키고, 각각 입에 맞도록 하였으나 그 효도의 지극함이 이와 같았다.
 
공 선대는 함양(咸陽) 사람으로 상조(上祖)인, 휘 선(善)이 고려 예부상서요 신유(臣蕤)에 이르러 공훈으로써 더욱 나타났으며 아들 육형제 가 다 문과에 올랐는데 장남 지문(之文)은 벼슬이 소감(少監)으로 공의 칠대조가 된다. 증조의 휘 득시(得時)는 사복경(司僕卿)이요 조의 휘 선(鮮)은 사온서정(司署署正)이요 고(考)의 휘 수화(遂和)는 진사요 태어나서 품안을 떠날 때 부친 상(喪)을 당하여 전훈(羶薰)을 먹지 않으니 그때 삼세 효자라 칭하였다. 외조는 언양(彦陽) 김백형(金伯衡)이다.
 
공의 초배(初配)는 광양서씨(光陽徐氏)로 일찍 돌아가고 계배(繼配) 서영류씨(瑞寧柳氏)는 승사랑 정(汀)의 딸이요 아들 명세(命世) 명심(命諶) 명순(命純) 명우(命佑)는 모두 진사이다. 명세의 사위는 목사(牧使) 류성남(柳成男)이요, 명심의 아들은 윤(掄)과 규(揆)와 양(揚)인데 규는 생원이요. 사위는 판서 임완(林浣)이며 명순의 사위는 병사 임진(林晉)이요. 명우의 사위는 류혜(柳惠)이다.
 
공의 묘는 남평고을 동쪽 정광산(淨光山) 기슭의 곤(坤)좌이다. 공의 후손 경흠(景欽)이 나를 찾아와 놀며 명(銘)을 청하기에 명(銘)하여 가로되
 
명양(鳴陽)의 지역은 산(山)도 높고 물도 힘차도다
아 이 사람이여 뜻과 마음이 자유롭도다
기묘당적(己卯黨籍)은 모든 어진이가 깨끗하였도다
아 공(公)의 형제는 출처(出處)가 부끄러운 것 없도다.
 
1799년(정조 23, 崇禎後三己未) 12월 일 9대손 해겸(海謙), 해명(海明), 해돈(海暾), 당(塘)이 세움.

 

박이관선생 문과방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