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49
금성읍지(1897년)의 편찬과 내용 및 특징
김희태
금성읍지의 편찬과 전래
『금성읍지(錦城邑誌)』는 전라도 나주목의 읍지로 3권 2책이며 1897년(光武 1)에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표제의 금성(錦城)은 나주의 별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나주목 군명(郡名) “발라(發羅)ㆍ통의(通義)ㆍ금산(錦山)ㆍ금성(錦城)ㆍ진해군(鎭海軍)”이 아온다. 1897년 당시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했다.
『금성읍지』는 이인상(李麟相), 나도우(羅燾佑), 정구현(鄭龜鉉), 김영규(金永奎) 등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사찬읍지이다.
이승욱(李承旭)의 서문에 “사인 이인상과 나도우가 군지의 일을 부탁하였다.”고 썼다. 그리고 윤웅렬 전라남도 관찰사의 서문에는 “진사 정구현(鄭龜鉉), 감찰(監察) 김영규(金泳奎)는 모두 뜻이 있는 사람으로서 읍지를 보수하려는 뜻이 이미 오래되었고”라 하여 오래전부터 읍지를 보수하려는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욱의 서문은 5월, 윤웅렬의 서문은 9월에 쓰여졌다.
이승욱의 서문에는 “정유년(1897) 봄에 나는 명을 받아 호남 금성(錦城)에 내려갔다.”고 하였는데, 전라남북도 암행어사 직임을 말한 것 같다. 임명기사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1898년(고종 35) 10월 7일에 고종이 함녕전(咸寧殿)에서 전라남북도 암행어사 이승욱을 소견할 때 서계의 별단을 보았다고 하면서 암행한 결과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어서이다.
『금성읍지』 편찬의 목적에 대해서 알아보자. 먼저 이승욱의 서문과 범례의 다음 내용에서 보듯이 기존 간행된 읍지의 착란을 바로 잡자는데 뜻이 모아진 것 같다.
후대 사람이 기술하였으나 자못 잘못된 점이 많으니, 지금 부득이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이다.(이승욱, 「錦城邑誌序」 , 『금성읍지』)
그 후 (읍지의 내용을) 모았으나 언제 일어난 일임을 모르고, 과환(科宦)과 인물이 혹 사실과 어긋나 와전되고 연대가 뒤바뀌었다. 그래서 구 읍지에 실린 내용이 자상하고 간략하며 거짓과 사실을 참고하여 삭제하고 바로 고치어 옛날 술이(述而)한 뜻을 남겨 두었다.(「凡例」 , 『금성읍지』)
다음으로는 당시 사회 사정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다음 글을 보자.
이 때문에 동비(東匪)가 멋대로 날뜀에 고을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성을 지켜 남방을 보장함에 당시 쇠퇴한 세상의 지주(砥柱)라고 칭송되었으니, 이에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까지 이어짐을 오히려 증험할 수 있었다. 훗날 국가가 일이 있음에 이미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중흥의 사업을 도와주니, 사수(死綏)하고 적에게 분개하는 사람이 어찌 금성에 있지 아니하리오.(이승욱, 「錦城邑誌序」 , 『금성읍지』)
나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1895년 의병항쟁 등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겪는다. 이처럼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중흥하려는 한 방편으로 『금성읍지』를 편찬하려 했음이 드러난다. 이는 선원세계(璿源世系)를 권수에 편차한 『금성읍지』의 편제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1차 국역본 발간 당시에는 나주시청 향토문화회관 소장본을 저본으로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전남대학교서관,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日本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 등 국내외 여러 기관에서도 소장이 확인된다.
<표 1> 금성읍지 소장처 현황(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문헌종합목록)
연번 | 표제 | 편저자 | 발행년 | 소장처 |
1 | 금성읍지. 1-2 | 이인상 [등편] | [간사년미상] | 국립중앙도서관 |
2 | 금성읍지. 권2-3 | [발행년불명] | 원광대학교 도서관 | |
3 | 금성읍지 | 이인상 편; 나도우 편 | 광주(光武) 1(1897) | 日本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 |
4 | 금성읍지 | 이승욱 편 | 1987 | 국립중앙도서관(영인;원본 상동) |
5 | 금성읍지 | 이승욱 편 | [광무1년(1897)서] | 고려대학교 도서관 |
6 | 금성읍지. 책1 책2 | 이인상, 나도우 공편 | 광무 1(1897)서 | 전남대학교 도서관 |
7 | 금성읍지 | 이인상 등편 | 1897(광무1) | 계명대학교동산도서관 |
8 | 금성읍지 | 이인상 등편 | 광무1(1897)간 | 성균관대학교존경각 |
9 | 금성읍지. 전(全) | 정구현 등편 | [간년미상] | 한국학중앙연구원 |
금성읍지의 내용과 특징
표제/책임표시사항 : 錦城邑誌. 1-2 / 李麟相...[等編]
판사항 : 木活字本
발행사항 : [나주]: [刊寫者未詳], [1897]
형태사항 : 3卷2冊: 四周單邊 半郭 22.8 x 16.8 cm, 有界, 10行20字 注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31.5 x 24.5 cm
주기사항 :
序: 完山李承旭謹書峕五月下弦也, 歲丁酉(1897)季秋嘉義大夫全羅南道觀察使尹雄烈(1840-1911)謹書
서문은 2종이 실려 있다. 이승욱의 서문은 1897년 5월, 전라도관찰사 윤웅열의 서문은 9월(季秋)에 썼다. 1897년 봄에 이승욱(1840~1911)이 전라남북도 암행어사로 나주에 왔을 때 이인상과 나도우 등이 군지의 일을 부탁하였다. 윤웅열은 1896년(고종 33) 8월부터 1898년(고종 35) 5월 상이에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1897년 나주를 관찰할 때 진사 정구현, 감찰 김영규의 청에 따라 서문을 썼다. 나주의 인물로 사암 박순과 건재 김천일 두 선생을 들었고, 훈공이 200명, 효행 330명, 열부 8~90명이라 하면서 나주의 충효열행을 높이 쳤다. 읍지 편찬이 인물의 현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범례는 11항목을 열거하고 있다. 계곡 장상국이 수령을 읍지를 보수하렸으나 급히 체직되어 이루지 못했다 고면서 그 이후의 읍지를 어늑나고 와전된 것을 바로 고친다고 하였다. 〈선생안(先生案)〉과 〈주사 일기(州司日記)〉는 글대로 옮겨 썼고, 사마재 연계안(司馬齋蓮桂案)은 고증을 덧붙였다. 인물, 과환(科宦), 문학, 충효, 명절(名節)은 고을의 공의를 수렴하였고, 산천, 형승, 교원(校院) 사묘(祠廟), 정려, 명사(名榭), 성시(城市), 관방, 전부(田賦), 호액(戶額), 물산, 풍속, 관할은 예전대로 하였다.
선원세계(璿源世系)는 조선 시대 왕실의 세보로 일반적으로 태조의 사조(四祖)부터 세계를 기록한 보책이다. 『금성읍지』 선원세계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로부터 고종과 비 민씨까지 기록하였다. 고종은 주상전하(主上殿下)라 표기하였다.
1권의 항목은 건치연혁(建置沿革), 읍호승강(邑號陞降), 관원, 진관(鎭管), 도리(道里), 형승(形勝), 산천(山川), 성곽(城廓), 궁실(宮室), 관사(官舍), 공해(公廨), 진영(鎭營), 창고(倉庫), 호액(戶額), 인구(人口), 군액(軍額), 결부(結賦), 진공(進貢), 봉름(俸廩), 봉수(烽燧), 역원(驛院), 교량(橋梁), 도서(島嶼), 물산(物産), 균세(均稅), 방곡(坊曲), 장시(場市), 제언(堤堰), 진장(陳場), 전선소(戰船所), 진도(津渡), 풍속(風俗), 단묘(壇廟, 사묘(祠廟), 부조묘(不祧廟), 영당(影堂), 어서각(御書閣), 학교(學校, 토거성씨(土居姓氏), 제영(題詠), 형승제영(形勝題詠), 사찰(寺刹), 명기(名基), 명묘(名墓), 고적(古蹟), 금성별곡(錦城別曲), 나주전예문(羅州戰藝文), 광주답통(光州答通), 광주재답(光州再答), 나주목선생별안(羅州先生別案), 사마안(司馬案)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2권 2책에는 문과안(文科案), 무과안(武科案), 음사(蔭仕), 인물(人物), 학행(學行), 일덕(逸德), 문장(文章)이, 3권 2책에는 충절(忠節), 절의(節義), 효행(孝行), 열녀(烈女), 증직(贈職), 가자(加資), 유우(流寓), 신증건영사적(新增建營事蹟) 및 당시의 주사(主事)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2책에 수록되어 있는 ‘금성별곡’은 박성건(朴成乾)이 금성교수로 있던 성종 11년(1480)에 그의 생도 열 사람이 한꺼번에 과거의 소과에 급제한 것을 경사하여 부른 노래이다.
이제 『금성읍지』의 특징을 정리해 보자. 『금성읍지』는 1897년에 간행된 사찬 읍지이다. 앞에 2종이 서문이 있는 점이나 범례를 명시한 점도 특징이라 하겠다. 범례에 의하면, “이전에 나주목에는 읍지가 없었고 나주 목사 계곡 장유(張維)가 자료를 모아 읍지를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교체되어 편찬되지 못한 읍지를 이제야 간행한다.”고 편찬 동기를 밝히고 있다.
『금성읍지』의 내용은 기존 읍지를 그대로 따른 것도 있고, 편찬 당시의 사항도 포함되었다. 범례에서 지금까지 편찬된 읍지의 경우 과환(科宦)과 인물이 착오가 있고, 연대에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므로 옛 읍지에 기록된 내용을 정정 기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금성읍지』의 본문 구성은 『여지도서(輿地圖書)』(1760)의 형태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여지도서』(1760), 『나주목여지승람』(1790), 『나주목읍지』(1793) 등보다는 분량이 많고, 수록내용이 풍부하다. 그리고 몇 항목은 새로 수록되었고 전통적인 순서가 아니라 섞여 있거나 인물이나 시문 등 특정 항목이 크게 부각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나주는 지금의 나주권역을 포함하여 신안군 일원의 도서 지역도 포함하였다. 1895년 윤5월 1일에 지방제도개편으로 8도제가 23부제가 되는데 전라도 나주목은 나주부 나주군이 된다. 1896년 2월에 지도군(智島郡)이 신설되면서 나주 관할 섬을 넘겨 준다.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제는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남도 나주군이 된다. 『금성읍지』 편찬 당시는 전라남도 나주군에 속하던 때이다. 그런데 『금성읍지』는 1897년에 편찬되지만 도서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나주목의 역사성을 고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금성읍지』는 나주 지역을 선양하기 위해 만들어 지역의 대표 인물과 시문(詩文), 제영(題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 중앙정부에서 전국 군현에 일괄적으로 명을 내려 제작하게 하였던 ‘읍지상송령(邑誌上送令)’ 등에 의한 ‘관찬읍지’의 체제와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금성읍지』는 시문 부분에서는 각 명승고적에 대한 시가 첨부되어 있으며, 「금성별곡(錦城別曲)」과 같은 문학작품이 별도 항목으로 등재된 것도 한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지리지에 수록되는 지역개관의 지도가 『금성읍지』에는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나주의 읍지류는 국가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었던 영조연간의 『여지도서』나 1900년대 후반~1800년대에 걸친 몇 차례 읍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읍지류는 국가의 조세와 지역정보 파악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간략하고 통계위주라는 특징을 가진다. 반면 『금성읍지』는 나주 지역민들이 필요에 의하여 간행한 읍지로 인물부터 시작하여 나주의 문화정보를 상세하게 수록하고 있어 지역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김희태, 「『금성읍지』 해제」, 『역주 나주읍지』, 나주문화원, 2023.
금성읍지 호구기록(인구는 남 13,327명, 여 13,339명 으로 합하면 26,666명인데, 『금성읍지』 기록에는 23,666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뒤이은 『나주군읍지』(1899)와 비교해 보면 여 10,339명이 맞을 듯하네, 13,399명으로 오기한 것이다.하다. 이처럼 비교하다보면 읍지 자체의 오기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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