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48 - 나주목사 장유의 ‘읍지’ 편찬 논의와 나주목 읍지류

향토학인 2024. 3. 2. 04:25

인지의 즐거움348

 

나주목사 장유의 읍지편찬 논의와 나주목 읍지류

 

김희태

 

역주 금성읍지가 간행(나주문문화원, 원장 윤여정)되었다. 1897년에 편찬된 사찬읍지이다. 앞 부분에 게재한 금성읍지 해제(김희태)을 일부 편집하여 나누어 소개한다.

 

읍지, 연혁인물문화산업의 기록

 

읍지(邑誌)는 조선시대에 기초적인 지방행정구역이었던 부(((() 등 지방 각 고을을 단위로 하여 연혁, 지리, 인물, 산업, 문화, 풍속 따위를 기록한 지리지이다.

 

읍지는 편찬 대상의 범위에 따라 전국읍지(全國邑誌도지(道誌군현지(郡縣誌면지(面誌촌지(村誌동지(洞誌진영지(鎭營誌변방지(邊方誌) 등 여러가지로 나뉘는데, 호남읍지 등 도지와 나주목읍지 등 군현지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읍지는 편찬 주체에 따라 중앙 정부나 지방 관아 등에서 편찬한 관찬읍지(官撰邑誌)와 개인이나 지방의 인사들이 주관하거나 이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사찬읍지(私撰邑誌)로 구분된다. 관찬읍지는 통일적인 체제와 공시적(共時的)이라는 장점이 있고, 사찬읍지는 지역의 필요성에서 편찬이 되었기 때문에 내용이 풍부하고 정확하며 상세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전국지리지의 편찬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다가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각 군현별로 읍지가 편찬되었다.

 

조선시대 나주목의 읍지는 나주목사 장유가 편찬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로 관찬으로 몇차례 간행되었다. 사찬으로는 1897금성읍지가 편찬되었다. 이 가운데 관찬의 나주목여지승람(1815/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국역, 1993)과 사찬의 금성읍지(1897/나주시문화원나주시 국역, 1989) 국역본을 낸 바 있다.

 

이번 증보역주본 금성읍지는 엄찬영나상필님(한국학호남진흥원 연구위원)이 국역 주석을 하였고 윤여정님과 김희태가 자문을 하였다. 이재두님(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자료제공과 함께 도움말을 해주었다.

 

장유목사의 읍지 편찬 논의

 

나주의 읍지에 간행에 대해서는 계곡 장유가 나주목사로 재임 할 때 논의가 있었다. 금성읍지(1897)에 실린 이승욱의 서문에 나주의 읍지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장유가 나주목사 재임할 때에 읍지를 만들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련 자료를 모아 만들려 했다는 것으로 이때 초안 자료가 전해진다면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다음 내용이다. 범례에도 언급이 있다.

 

"우리 고을은 예로부터 읍지(邑誌)가 없었는데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이 이 고을에 수령으로 폄직(貶職)하여 장차 모아 만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이승욱, 錦城邑誌序, 금성읍지)

 

"금성읍지가 옛날 없었던 것은 반드시 병선(兵燹)의 재화 때문이다. 그러나 계곡(磎谷) 장 상국(張相國, 장유)이 이 지역의 수령으로 폄직(貶職)되어 장차 읍지를 보수하려고 하였으나 급히 체직(遞職)되어 돌아가니, 과연 일을 완수하지 못하였다."(凡例, 금성읍지.)

 

장유가 나주목사 재임할 때 나주읍지 편찬에 대한 의욕은 주지(州志)’에 대한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이 일과 관련하여 또 느껴지는 점이 있다. 지난 기사년(1629, 인조 7)에 내가 나주로 좌천되었었는데, 나주는 정말 큰 고을이었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어 태학사(太學士, 홍문관 대제학)를 그만두고 나가게는 되었다 하더라도 저술하는 일만큼은 나의 소임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작부터 주지(州志)를 만들어 볼 생각은 갖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병 치다꺼리를 하느라 그 일을 하지 못하였다. , 나주는 큰 고을인데도 나 때문에 빛이 나지 못하였고, 간성(杆城)은 누추한 고을인데도 여고(汝固, 이식(李植)) 덕분에 영광을 얻게 되었는데, 이것을 어찌 당시의 어쩔 수 없는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余於是又有所感焉往在己巳歲余貶官羅州羅固雄州也余雖不才輟太學士以出其於著述不可謂非其任也然余嘗有意於州志竟以病宂未果爲也以羅而失之於余以杆而得之於汝固是豈可徒諉之於適然而已哉.)”(장유, 水城志序, 계곡선생집7;간성지[관동읍지, 12172])

 

이 글은 수성지(水城志)서문에 있다. 수성지는 강원도 간성현(杆城縣)의 읍지이다. 친구인 이식(李植, 15841647)이 간성현감으로 나가 일년 남짓 재임하면서 읍지를 간행하자, 서문을 쓰면서 나주목사 재임시 읍지 간행을 못 마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간성은 벽지의 누추한 고을이지만 여고(汝固, 이식) 덕택에 멋지게 치장되어 성명(聲名)과 문물(文物)이 장차 사방에 유포(流布)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서문을 쓴 시기는 1633(인조 11) 7월로 이임 후 3년이 지났지만 읍지 간행을 못하여 나주는 큰 고을인데도 나 때문에 빛이 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계곡 장유(張維, 15871638)1629(인조 7) 915일부터 1630(인조 8) 8월 사이 나주목사에 재임한다. 장유는 좌천되기는 했지만 수령으로써 숭유흥학(崇儒興學)에 힘썼다. 특히 읍지 간행을 추진하였지만, 목사 재임 때 간행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모으려 했던 자료가 혹 전해 오지는 않을까 찾아 볼 일이다.

 

장유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 또는 묵소(默所)이다. 아버지는 판서 장운익(張雲翼)이며,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1609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호당에 들어갔다.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장유 목사는 읍지 간행 논의와 함께 1630(인조 8) 417(병인)에는 금성산의 기우제 제문을 짓고, 423일에는 남해사의 기우제 제문을 짓는다. 그리고 김천일 정열사비문을 짓는다.

 

이같은 선정으로 1630(인조 8) 11월에 선정비를 세웠는데 숭유흥학이라 새겼다. 금성관 경내에 있는데 비제와 연기는 <자헌대부 행 목사 신풍군 장공유 숭유흥학 청덕선정비(資憲大夫行牧使新豐君張公維崇儒興學淸德善政碑/崇禎三年十一月 日)>이다.

 

시서 김선의 여지승람시문

 

나주의 선비로 많은 시를 남긴 시서 김선(市西 金璇, 1568~1642)제 여지승람 후(題輿地勝覽後)라는 시가 있다.

 

3백 조의 비평을 한 눈에 보면서 三百啄評歸一瞥

산천과 풍토 어떠한 지 묻노라 山川風土問如何

이것이 그저 노쇠한 나그네 피곤하게 하니 阿堵謾令衰客困

높이 베개를 베고 오사모를 쓰는 게 나으리 不如高枕岸烏紗

 

이 시제에 나오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300300여 개 고을로 생각해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한다. 1611, 1623년 전라도에서 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 '번각을 하고 있어서이다.(박은희 논문)

 

다른 하나는, 뒤에 편찬된 나주목읍지나주목여지승람(羅州牧輿地勝覽)’(12175)이라 하는 점이나, 김선이 나주목사 장유와 관련된 시 상자를 열어서 보다가 정자용[정홍명]과 장계곡이 함께 지은 수련당에서의 희우'라는 작품을 얻어, 뒤늦게 차운하여 쓴다(披閣憲中, 得鄭子容與谿谷共作睡蓮堂喜雨一篇, 追次以記) (국역 시서유고, 296)를 짓는 등 교류를 하고 있어 혹여라도 시제의 '여지승람'이 장유목사 편찬 나주읍지초본과 연관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점이다.

 

조선후기의 나주읍지 사례

 

장유 목사에 의한 나주읍지편찬 논의 이후, 나주에서는 다양한 읍지류 편찬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1>은 조선후기~근대기의 역대 나주읍지를 개략적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1> 조선후기~근대기 나주읍지

연번 읍지 편찬자 연대 소장처
1 輿地圖書-羅州牧 영조명찬 1760(영조 36) 한국교회사연구소
2 羅州牧輿地勝覽
(호남읍지 11/1-2)
전라감영 1790(정조 14) 토지주택박물관
3 邑誌-羅州牧(74/31) 전라도 1793(정조 17) 국립고궁박물관
4 羅州牧邑誌 미상 1815(순조 15) 규장각 (17422)
5 羅州牧輿地勝覽
(호남읍지 10/2-1)
전라감영 1847(헌종 13)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6 羅州牧輿地勝覽
(호남읍지 8/1-2)
전라감영 1859(철종 10) 일본 도쿄대학 아가와 문고(국립중앙도서관 복사본 소장)
7 羅州牧輿地勝覽
(湖南圖誌 10/2-1)
전라감영 1862(철종 13)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8 羅州牧邑誌(羅州牧輿地勝覽)(호남읍지 10/1) 미상 1871(고종 8) 규장각 (12175)
9 羅州牧輿地勝覽
(호남읍지 16/7-2)
전라감영 1874(고종 1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4336)
10 羅州牧邑誌
(호남읍지 18/8-2)
미상 1895(開國504) 규장각 (12181)
11 錦城邑誌 李麟相, 羅燾佑 1897(光武 1) 나주문화원 등
12 羅州牧場邑誌事例成冊
(호남읍지 18/12)
미상 1895(開國504) 규장각 (12181)
13 羅州郡邑誌 미상 1899([光武 3]) 규장각 (10781)
14 羅州牧邑誌 미상 미상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5 續修羅州誌 張維原, 羅政集 1920 국립중앙도서관(古朝62-47)
16 朝鮮寰輿勝覽 : 羅州郡 李秉延 纂 1938 전남대도서관(OC 2G2 53)
17 羅州郡誌 羅燾線 등 편 1955(을미) 국립중앙도서관(2748-18)

 

나주 읍지류 집성과 비교 연구 필요

 

나주 읍지와 관련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읍지지리지류 집성 작업이다. 이 자료는 지역학의 기초자료가 된다. 담양(1980/2004), 순천(승주)(1986), 해남(1989), 강진(1991), 장흥(1992), 함평(1993), 장성(2019) 등은 오래전에 집성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비겨 본다면 전남의 수부 '나주'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같은 필요성은 이미 제시한 바 있다. 2022임진왜란과 거북선, 나대용 구국정신의 재조명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읍지류의 나대용장군 관련 기록을 검토하면서이다.

 

왕명으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 인용된 나주목지에는 나대용장군의 행적에 종이순신(從李舜臣, 이순신을 따라)”이라 하였다. 그런데 규장각 등에 소장된 나주군읍지(10781), 나주목여지승람(12175), 나주목읍지(17422) 등에는 여이순신(與李舜臣, 이순신과 함께)”으로 표기하고 있다.

 

()’()’는 글자만 다른게 아니라, 의미상의 차이도 있다. 왕명 편찬에 인용한 나주목지()()-()’의 개념인듯하고, 나주군읍지 등은 -공동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순신장군과 나대용장군이 함께라고 나주지역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표기상의 차이인지, 이충무공전서에 인용된 다른 읍지가 있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읍지류를 전수조사하고 집성하여 비교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읍지류 기록의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금성읍지해제편에서는 각 읍지 기록 가운데 호구수의 기록을 정리해 비교해 보았다. (<2> 참조) 금성읍지에는 호액(戶額)7,044, 인구(人口)23,666, 남자 13,327, 여자 13,339[10,339]명으로 나온다.

 

금성읍지의 남 13,327, 13,339명 기록을 합하면 26,666명인데, 금성읍지기록에는 23,666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오류가 있어 보인다. 나주군읍지(1899)와 비교해 보면 여 10,339명이 맞을 듯하다. 이처럼 비교하다 보면 읍지 자체의 오기도 확인할 수 있다.

 

금성읍지(1897) 이전의 나주목여지승람(1871)에는 편호가 16,697호이고 인구는 남 25,806, 30,089명으로 모두 55,895명이다. 금성읍지의 호구수는 1896년 신설된 지도군으로 이관된 도서지역의 호구수를 제외한 수치이다.

 

나주군읍지(1899)에는 지도군 이관 전후의 두가지 호구수를 함께 기록하면서 갑오경장 뒤 각 섬은 지도군에 이속하여 이에 따라 호구는 감소하여 지금은 모두 7,064, 인구 24,863명 내에 남 13,810명 여 11,051이라 기록하고 있다. 금성읍지호구수와 비교해 보면 호수는 24, 인구는 1,197명이 증가되었다.

 

참고로 세종실록지리지(1452) 기록은 1,089, 4,026, 호구총수(1789)17,633, 57,782(28,591, 29,191), 대동지지(1864)11,650, 32,680명이다.

 

<2> 나주읍지의 호구수 비교(연번은 <1>의 번호임)

연번 읍지 연대 () ()
1 여지도서-나주목 1760 17,858 [55,994] 26,341 29,653
3 읍지-나주목 1793 17,613 57,782 28,229 29,583
4 나주목읍지 1815 17,613 57,782 28,229 29,583
8 나주목여지승람 1871 16,697 [55,895] 25,806 30,089
11 금성읍지 1897 7,044 23,666 13,327 13,339
[10,339]
8 나주목장읍지 사례성책 1897 1,277 - - -
10 나주목읍지 1895 13,518 - - -
13 나주군읍지 1899 16,697 [55,895] 25,806 30,089
7,064 24,863 13,810 11,051
15 속수나주지 1920 7,044 23,666 13,327 13,339

 

3읍지-나주목의 호수는 읍내(邑內) 1,506, 외면(外面 島陸僧戶幷) 16,104호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인구는 읍내 인구 4,987, 2,478, 2,509, 외면 인구 52,7982, 25,721, 27,074구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8나주목장읍지 사례성책호구기록은 호총(戶摠) 목사부(牧四部) 242, 본장면(本場面) 206, 고기면(古機面) 196, 압해도(押海島_ 255, 자은도(慈恩島) 192, 장산도(長山島) 186호 합 1,277호이다.

 

10 나주목읍지호 기록은 호총 각면 원호 9,218, 각도(各島) 원호 4,300호이다. 13 나주군읍지기록은 호구 16,697호 내 남 25,806, 30,089, ‘甲午更張後 各島移屬智島郡 戶口隨以減 摠今爲(갑오경장 뒤 각 도서는 지도군에 이속되어 호구가 감소됨에 따라 지금 총수가 되었다)’ 7,064, 인구 24,863구 내 남 13,810구 여 11,051구이다.

 

나주학의 기초자료, 나주읍지와 남평읍지

 

이상에서 개략적인 나주 읍지 현황을 정리해 보았다. 보다 자세한 비교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엇 보다도 읍지와 지리지의 전수 조사와 함께 자료집성의 발간, 역주 작업의 추진 등이 이루어진다면 나주학의 기초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 독자적인 행정편제를 유지하였던 남평 지역의 읍지류 기록도 함께 조사되고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로서 확인이 되는 남평읍지 현황을 정리해 본다.

 

<3> 조선후기~근대기 남평읍지

읍지 편찬자 연대 소장처
輿地圖書-南平 영조명찬 1760(영조 36) 한국교회사연구소
南平邑誌 남평현 1789년경 규장각 (17420)
南平邑誌(표제 海南邑誌) 미상 1791년경(정조15) 규장각(想白古 915.14-H118)
邑誌-南平縣(74/28)   1793(정조 17) 국립고궁박물관
南平縣邑誌
(호남읍지 10/2)
미상 1871(고종 8) 규장각 (12175)
南平縣邑誌
(호남읍지 18/9)
미상 1895(開國504) 규장각 (12181)
南平郡邑誌 남평군 1899(光武 3) 규장각 (10776)
南平邑誌 徐鳳烈 等編 1929 국립중앙도서관(2748-6)
朝鮮寰輿勝覽 : 南平郡 李秉延 纂 1938 전남대도서관(OC 2G2 53)

 

우리는 서둘러, 나주 목사 장유 때 논의했던 나주읍지의 편찬 초본과 이충무공전서에 인용된 나주목지원본을 찾는 일, 그리고 나주(남평현 포함) 지리지 읍지류 전수조사와 집성, 역주하는 일, 비교 연구하는 일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김희태, 「『금성읍지해제, 역주 나주읍지, 나주문화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