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39 - 100년전의 함평경관2 - 1917년의 <함평군청>

향토학인 2016. 5. 30. 12:39

인지의 즐거움 039

 

100년전의 함평경관2 - 1917년의 <함평군청>

 

김희태

   

1917년 <전남사진지> 함평군청 사진([사진 10])을 보면 오른쪽(향우)에는 3칸 팔작지붕 중층 목조 건조물, 노거수가 일부 보인다. 누각의 기둥 하부는 사람키 높이 만큼 석재로 마련하고 그 위로 나무기둥을 올렸다. “咸平郡廳”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누각 건물(왼쪽)과 겹쳐 목조 와가 지붕이 일부 보인다. 왼쪽에는 노거수목이 있고 언덕위에 우산각, 그 아래로는 돌로 쌓은 곳에 사람이 보인다. 공동 우물로 보인다.

 

이 사진에는 모두 다섯명의 사람이 보인다. 맨 오른쪽 사람은 지게를 지고 누각 건물로 들어 서고 있는 뒷 모습이다. 가운데 두 사람 가운데 왼쪽 사람은 검은 모자, 오른쪽 사람은 밝은색 중절모를 썼다. 맨 외쪽에 있는 두 사람은 한사람은 서 있고 한사람은 앉아 있는데, 아마도 사진 촬영하고 있는, 당시로서는 아주 색다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 싶다.

    

사진의 설명문에는 함평의 입지환경과 백제 이래 1914년까지의 연혁 변천, 관할 면 수를 적고 사진에 대한 설명을 적고 있다. 원래 군아(郡衙)인데 사진 촬영 당시 군청의 정문이라는 설명이다.

 

[사진 15] 1917년 함평군청 사진(<전남사진지>)                                      

[사진 16] 전남사진지 함평군청 설명문

함평군청(咸平郡廳)

함평군은 전남의 서부위치로 광주 서쪽 12리 10정 기점에 있다. 서부에 산악이 기복하고 동남쪽은 점점 넓어진다. 읍내 근처는 영산강의 샛강인 함평천 유역에 펄쳐진 들판으로 군의 절반을 헤아릴 정도로 광할하다. 함평은 본디 함풍(咸豊)현과 모평(牟平)현 땅으로 백제 때 굴내(屈乃)이다가 신라 때 함풍현이 되었다. 고려초기에 영광군에 속했다가 명종 2년(1172)감무를 두고 현으로 독립했다. 모평현은 백제 때 다지(多只)현이다가 신라 때 다기(多崎)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 모평현이라 개칭하여 영광군에 소속되었다.

조선 태종 9년(1409) 함풍, 모평 양현을 합하여 옛 고을 이름 가운데 각각 한자씩 따서 비로소 함평(咸平)현이 되었다. 1895년 함평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폐합의 결과 다소 이동이 있어 10개 면을 관할했다. 사진은 원래 함평군아의 누문과 지금(1917년) 군청 정문의 모습이다.

[사진 17] 현재의 함평군청 일원(2015.12)  

[사진 18] 함평읍 기각리 옥천마을 전경(중앙타일 앞 녹색 시설물이 풍성수퍼이다. 트럭 왼쪽 담쪽으로 우물이 있다. 길을 따라 오르면 군청이 있다.(2015.10)

 [사진 19] 함평읍 기각리 옥천마을의 우물(2015.10)

 

사진을 촬영한 위치는, 처음에 함평읍 기각리 옥천마을(중앙길 187-60 풍성수퍼 와 중앙타일 사잇길), 함평리 산성마을 등으로 볼 수 있는데, 현재도 우물이 남아 있는 옥천마을 부근으로 보았다. “우물”에 중점을 두고 탐문하였기 때문이다. 현재의 군청도 조망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함평군청” 편액이 걸린 누각 건물이나 뒤에 일부만 보이는 와가 건물이 옛 함평현 관아 건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 옥천마을의 현재 지형경관과 사진상의 지형이 많이 다르다는 점, 현재의 함평군청 일원이 옛 함평 관아 자리라는 점 등에서 다시 탐문하였다.

 

나홍채님의 제보에 따르면, 조선시대 함평현 관아 누각으로 희우루(喜雨樓)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향토사학계의 전설 성원 리현석선생님(星園 李炫石, 1937~2008, 전 함평향토문화연구회장)”과 희우루의 위치와 자료를 오랫동안 찾았던 적이 있었다는 것. 희우루는 관정루 인근에 있었고 경내에 측우기가 설치되어 있어 “희우루”라는 이름도 이 측우기에서 연유한 것. 일본 강점기 초의 보고서에 측우기가 현존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그 측우기 행방은 찾을 길이 없다는 것. 아마도 함평현 관아 누각이 맞을 것 같고 위치도 옥천마을 보다는 현재의 함평 군청 앞이라는 것. 지형경관도 그렇고 노거수도 있었고..... 1872년 지도를 보면 동헌과 객사 앞에 누각형 건물 그림도 보인다. 다시 한달음, 군청 앞 경관 탐문. 그리고 기록찾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36권 전라도 함평 누정조에 “희우루(喜雨樓)는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1480년에 편찬되고 1530년에 신증본이 나온다. 신증조에 나오기 때문에 16세기 초반에는 관아 건물로 희우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응시(辛應時, 1532~ 1585)선생이 지은 ‘함평 희우루운(咸平 喜雨樓韻) 오언율시가가 문집(<白麓遺稿>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a041집 403면)에 있다. 이 또한 16세기이다. 미루어 보면, 조선 초기에 관아 누각으로 희우루가 있었고, 교류 공간이었는데 후기에 들면서 건물의 명칭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공공 용도의 누각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1872년 함평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객사와 동헌 앞의 누각으로 남았을 것이고, 1917년 사진상의 누각 건물도 그 가운데 하나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

咸平 喜雨樓韻 함평 희우루 운(백록 신응시)

湖海遊將遍 호해유장편 호남 해읍을 장차 두루 유람하려 하니

薰風客袂輕 훈풍객몌경 첫여름 훈훈한 바람에 소매끝이 가볍구나

柳花官道晩 류화관도만 버드나무 꽃 늘어진 길 따라 해 저무는데

荷葉野塘晴 하엽야당청 성문 밖 방죽에는 연꽃잎만 개운하구나

節物端陽近 절물단양근 철따라 나는 산물 보니 단오절 다가오지만

塵埃白髮生 진애백발생 티끌 먼지 쌓이니 백발이 생긴 듯 하구나

羈愁無處着 기수무처착 객지살이 수심에 머물러 정착할 곳 없는데

鶯語縣樓淸 앵어현루청 깃 고운 새들 소리만 희우루에 청아하구나

<백록유고>(신응시)의 '함평 희우루운' 원문(한국고전번역원 자료)

 

함평 현루(縣樓)인 희우루 시는 언제적일까? 백록 신응시는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홍문관부제학에 이른다. 그가 경연에 임할 때면 고금의 사례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지방관으로 재직시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청렴하여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호남과의 인연은, 1572년(선조 5) 호남순무어사순무(巡撫御史), 1575년(선조 8)에는 전라도 관찰사, 1580년(선조 13) 광주 목사 등이다.

 

시의 첫 구절에 호해(湖海)라 한 것을 보면 호남순무어사 시절 우도 지역의 해읍을 순무할 때 함평을 들린 듯 싶다. 때는 첫여름 단오절이 가까울 때 인가 보다. 훈훈한 바람에 소매 끝도 가볍게 유람에 나서, 버드나무 꽃 늘어진 길을 따라 재촉했건만 황혼녘. 그래도 성밖 방죽에 잠긴 연꽃잎을 본 마음은 개운하고. 제철 산물을 보니 단오절이 가까운데 티끌먼지 쌓여 백발이 나는듯하고 객지살이 근심은 갈수록 다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는데, 함평현 희우루에 다다르니 깃이 고운 새들 지저귐만 청아한 모습.

 

* 김희태, 100년 전의 함평 경관, 읽기와 쓰기-<전남사진지>(1917)와 사진 향토사-, <함향>10, 함평향토문화연구회, 2015. 112~15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