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46 - 영산강 홍수의 형상화, 박화성의 소설 <洪水前後>

향토학인 2024. 2. 17. 05:27

인지의 즐거움346

 

영산강 홍수의 형상화, 박화성의 소설 <洪水前後>

-기록을 통해 보는 재난(災難)5-

김희태

 

소설 속 영산강 홍수를 만나 보자. 박화성(朴花城, 1904~1988, 본명 景順, 아호 素影)<洪水前後>, 삼천리7권 제3(19350301, 223~252)에 실렸다. 글의 끝에 ‘(1934. 8. 8)’ 일자가 있는데 소설을 마무리한 날로 보인다. 단편집홍수전후(백양당, 1948)에 수록되었다. 1934신동아(新東亞)에 발표되었다는 설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있으나, 본고에서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잡지자료의 삼천리자료를 인용한다.

 

1934년에 쓴 소설 속의 영산강 홍수, 이 작품은 그 무렵 호남 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을 때 가장 심한 손해를 입은 나주 영산포에 작가가 직접 현지답사를 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대홍수라는 재난으로 사랑하는 딸과 소중한 집, 그리고 애써 기른 가축과 곡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가난하지만 순박한 농민 송서방 일가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대로 소작을 하는 주인공 송명칠은 농사로는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거룻배로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고 있는데, 해마다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팔자소관으로만 돌리고 체념하며 산다. 아들은 높은 곳에 집을 옮기자고 조르지만 모른 체하다가 30년 만의 대홍수를 당하여 영산강의 둑이 넘치고 온 들판과 전답이 물 속에 잠긴 채 거룻배로 피하려고 하였으나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만다.

 

<洪水前後>, 삼천리7권 제3(1935.03.01.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거룻배와 집과 가축을 잃은 데다 열한 살짜리 딸마저 물결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모든 것을 일시에 잃어버린 주인공 송명칠은 수마(水魔)가 스쳐간 집터에서 죽은 딸이 생전에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수박과 참외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면서 아들의 말대로 이제는 높은 지대에 새 집터를 정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영산강 주변에는 대대로 소작을 하는 가난한 농사꾼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만들어 영산강 일대의 전답을 거의 차지하고 가혹한 소작 조건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이 지방 소작인들은 농사만으로는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현상보다도 더 불행한 현상을 들추어내고 있다.

 

, 주인공 송명칠을 통하여 이러한 조건과 가난을 천명으로 알고 아예 절대 굴종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적인 숙명관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하의 농민들의 참담한 생활을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력으로써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으며, 농민들의 패배적인 숙명관을 비판하고 강인한 의지력과 정신적인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홍수전후>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다. 高飛는 박화성의 <홍수전후>와 중국 작가 띵링(丁玲, 본명 장웨이원[蔣褘文], 1904~1986)<홍수> 두 소설을 중심으로 1930년대 한중 양국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삶을 이 두 여성 작가가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또한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계기로 그들이 어떻게 각성하고 투쟁하는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 두 소설에 드러나는 현실인식의 양상을 살폈다.

 

서승희는 박화성의 <홍수 전후>(1934)를 비롯하여 <한귀(旱鬼)>(1935), <고향 없는 사람들>(1936)을 함께 살펴 보았다. 이 소설은 식민 권력의 구제책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재난 서사로 1933-35년 나주 영산포 지역을 연이어 덮친 홍수와 가뭄을 배경으로 하는 가난한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재난을 묘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남성 작가들의 재난 서사와 달리 가족 서사의 디테일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재난 서사들은 지역의 재난을 증언하고 기억하는 아카이브로 작용 하는 한편, 사회주의적 전망이 불법화된 1930년대 중반에 식민지 통치의 문제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한편, <홍수전후> 작품은 일본어 소설에 나타난 의 미지와 관련하여 <한귀>와 함께 다룬 논고도 있다. 일제 식민지하에 있는 우리 민족의 처절한 생활상과 애환, 사회의 구조적 모순, 빈곤의 문제가 얼마나 절실하고 심각했던가 홍수전후한귀의 두 편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한귀(旱鬼)>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성섭이 영산강 일대에 몰아닥친 대가뭄으로 인해 산지옥과 같은 참상을 경험하면서 오랫동안 길들여 왔던 기독교적 세계관의 비현실성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한귀>朝光(1935.11,)에 발표 되었고, 최재서(崔載瑞)가 일본어로 번역 소개(改造, 1936.10)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소설에서 궁핍의 문제는 당시의 생존현실을 가장 핵심적으로 묘사한 절실하고도 보편적인 제제의 하나였다. 1920-30년대의 우리 문학은 조선의 빈궁한 현실을 구체적 형상화로 묘사한 리얼리즘 소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홍수전후한귀는 박화성이 빈궁의 현실에 접근하여 을 소재로, 피착취자의 궁핍한 삶과 착취자의 기생적인 사회현실을 폭로한 일본어 단편소설이다.”고 하였다.

 

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으며 일종의 연작으로 볼 수 있는 홍수전후한귀는 형상화의 탁월성이 주목되어 그해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홍수전후는 작년 중의 최역작이었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상상력은 크다. 화성의 사상을 보건대 그는 사회적으로 내지 정치적으로 막스주의에 가담한다. 그래서 이 의미에 있어서 머릿속이 확실하고 틀이 잡히고 좀처럼 변하지 아니할 것 같은 미덤성은 여성 작가 중 제일인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작가의 누구에게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김팔봉), “한귀는 어떤 의미로 보아서는 일구삼오년도 창작의 최고봉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더구나 전라도 지방의 방언인 그 대화는 살아 있었다,”고 평가하였다.(이청)

 

1930년대 여성작가의 일본어 소설을 연구한 논고에서는 박화성의 <홍수전후> 7편의 작품을 다루었다.(박경수) <홍수전후>大阪毎日新聞朝鮮女流作家集19364.21~4.26 8회 연재하였고 삽화가 9컷이었다. <홍수전후><한귀>를 함께 분석했는데, “‘천리신의 의지로 형상화 되는 식민지 현실에 순응하는 주인공에 대응하는 인물이 매사 도발적이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있는 것은, 소극적이나마 체제강화로 갈수록 옥죄어오는 현실에 대한 박화성의 민족의식의 토로인 듯하다.”, “‘대홍수유례없는 가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재해의 의지(혹은 국가신도를 기조로 한 황민화정책)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승화시킨 홍수전후한귀가 부각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수용반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하였다.

 

洪水前後 (박화성)(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전문을 열람할 수 있다. 몇부분 옮긴다.)

 

어제 한나절과 지난 밤새도록 작대기처럼 솟아지던 비도 날이 새면서부터는 미친 듯이 날뛰던 빗발들을 잠간 걷고 검은 구름장 속에서 무슨 의논들을 하였는지 떨어지지 않을 듯이 굳게 엉거붙었던 구름덩이들이 이쪽 저쪽으로 슬슬 헤어지기 시작한다.

 

<인제는 비도 그만 와야지. 오늘 종일 퍼부섰다가는 또 무슨 일이 날것인데. 원 하늘이 하시는 노릇이라 알 수가 있어사제...> 하고 하늘을 처다 본다. 움즉이고 있는 큰 하늘은 무서운 비밀이나 꾸미고 있는 듯이 명칠의 눈에 두렵게 보였다.

 

그는 천문학을 배우지는 않었다. 그러나 14년 동안 영산리(榮山里) 이 깊은 곳에 살면서 해마다 당해오는 물난리를 조히 격어오는 만큼 하늘의 모양과 구름덩이의 가고 오는 방향을 따라 대개 날씨는 어떻게 변하며 비오는 낄세를 보아 비가 얼마큼이나 올 모양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 이만한 것 쯤은 산간 농부나 어항 어부나 아니 도회지의 유복하다는 노인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다시 소작인의 아들을 가지고 있는 명칠이 더구나 한 편으로 조고마한 배 두개를 가지고 영산강의 어부노릇을 하며 살어가는 이 송서방은 나이는 지금 45세이건만 다른 60노인보다도 더 많은 천기에 대한 경험지식과 선견의 밝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는 잠시도 그치지 않고 퍼붓기만 하였다. 금성산(錦城山)맥으로부터 멀리 나주 영산포의 넓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경계로 컴컴한 하늘은 물에 싸여 허덕이고 있는 대지(大地)를 무겁게 눌르고 비를 솟고만 있었다. 하늘과 땅은 비ㅅ줄기로 연하여졌고 나리는 비ㅅ발 마다에서 튀어나는 가는 물방울이 보-얏게 물연기를 내고 있다.

 

점점 험악해가는 검은 하눌은 더욱 악착스럽게 폭우를 내리솟는다. 하늘도 나려앉을 듯하고 땅도 푹 꺼질듯하게 오직 두려운 비소리만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가는 평시에 재주와 용기를 자랑하던 급행열차들도 이 위대한 대자연의 무서운 기세와 위엄 아래에서는 물우에 기어가는 적은 버레에 지나지 못하였다.

 

강 연안과 낮은 지대에 있는 동리는 물에 잠기고 지붕까지 잠긴 집은 둥우리가 떠나려가고 헐어지고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물을 피하야 올라가며 목을 놓고 울었다.

 

장성(長城), 능주(凌州), 남평(南平), 화순(和順), 옥과(玉果), 곡성(谷城), 순창(順昌), 담양(潭陽), 창평(昌平), 나주(羅州), 송정리(松汀里), 광주(光州), 등의 열두골 물*이 한대로 합하야 나려가는 길이 되있는 영산강의 물은 시시각각으로 불어만 갔다. 각처에서 드리 밀리는 물이 영산강으로 몰려 들어가서 연상강물은 불완전한 연안을 쿵쿵 헐어가며 철철 넘어 흘렀다. 논을 삼키고 들을 삼키고 집을 삼키며 나려가다가 영산포 물길의 길 어구인 개산(犬山)의 구비에 닥치어 많고 많은 물이 좁은 어구로 빠저 나갈 수 없으매 용감한 기세로 앞을 향하야 전진하던 영산강물의 연합진군은 갑작이 뒤로뒤로 퇴군할 수밖에 없었다.

 

개산 시령산이며 운곡리 뒷산등 높은 곳에는 애기들을 업고 안고 울며 부르짖는 사람들의 힌옷 그림자가 사나웁게 솟아지는 비ㅅ발속에서 처참한 광경을 곳곳이 나타내고 있었다.

 

나주 정거장은 물에 잠기고 기차선노는 끈이저 문명의 빛난 무기도 누르고 붉은 물결만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삼도리, 길목구, 옥정, 신기촌, 광볼, 덕치, 강경골, 가마테, 영산리, 새올, 톳게리, 도총, 돌고개, 원촌이며, 금천면, 신가리** 등의 이재민들은 전부가 다 농민 인중에 가난한 상인들도 끼어있었다.

 

왕곡면 옥곡리와 다시면 죽산리는 아주 전멸하여 버리고 말았다.

 

물에 잠긴 영산포 시가를 경계하느라고 경종(警鐘)은 밤새도록 울고 울었으나 그릇 몇 개와 옷보통이 하나씩을 들고 어린애들을 업고 안고서 높은 곳에서 물결에 삼켜진 집터들을 나려다보며 비에 푹 젖은 옷을 입고 울고 떨고 섰는 이재민들과 한 집 속에 칠팔가족의 식구들이 웅게중게 모여 비맞은 병아리들처럼 우둘우둘 떨며있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구원도 되지 못하는 차디찬 시끄러운 고동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었다. 영산교 높은 다리 밑에는 탁낭(濁浪)이 석자의 거리를 남기고 흉뎡한 손길을 넘실거리고 있었으며 시가 중에 있는 2층 집웅에는 발동선이 다어 있었으며 34년전 신축년 대홍수 이래로 처음 당하는 그때보다 석자가 무자라는 대홍수이었다. 보통 장마 때에도 홍수의 재난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되는 우리 주인공 송서방은 이 적파 속에서 어찌되었는가.

 

*장성, 능주 등 열두골 물 : 12곳의 고을 가운데 옥과, 곡성, 순창은 영산간 수계와는 거리가 있다. 작자가 방문했던 지역이거나 무언가 연고가 있어 언급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개산, 시령산, 운곡리, 뒷산등, 삼도리, 길목구, 옥정, 신기촌, 광볼, 덕치, 강경골, 가마테, 영산리, 새올, 톳게리, 도총, 돌고개, 원촌, 금천면, 신가리, 왕곡면 옥곡리, 다시면 죽산리 등의 입지와 땅이름 유래도 살펴본다면 당시의 재난 현장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것이다.

 

- <한귀(旱鬼)>(박화성)는 1935년 영산포-금성산 마을 일원의 가뭄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박화성이 영산포를 오가게 된 것은 언니(박희영, 부군 김재섭이 금천면 소재 광암교회 집사)가 나주에 살았던 것이 연고가 된 것 같다.(선영란님 제보)

*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최종심에 오른 이석성의  소설 <홍수 전후>가 있는데, "조선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5.01.10) 박화성의 소설과 같은 제목이다. 더 찾아 볼 일이다. 이석성의 본명은 이창신(1914~1948)으로  2019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참고

高飛, 1930년대 한ㆍ중 여성소설에 나타난 현실 인식 양상-박화성의 <홍수전후>와 띵링(丁玲)<홍수>를 중심으로-, 한중인문학연구38, 한중인문학회, 2013., 245-266(22).

서승희, 식민지 재난과 통치, 그리고 재현의 역학 : 박화성의 홍수 전후, 한귀(旱鬼), 고향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화어문논집54, 이화어문학회, 2021., 89-118(30).

장미경김순전, 박화성 일본어 소설에 나타난 의 이미지단편 홍수전후한귀를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31, 2009., 동아시아일본학회, 315-336(22).

박경수, 1930년대 여성작가의 일본어소설 연구 -大阪毎日新聞朝鮮女流作家集을 중심으로-, 일본연구41, 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2016., 7-26.

신춘자, 朴花城旱鬼에 나타난 기독교 의식 연구, 한국문예비평연구1,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1997., 95-110.

이명희, 박화성의 일본어소설한귀(旱鬼)연구 -원본과 최재서 번역본의 비교를 통한 다층성 분석-, 일본어문학68, 한국일본어문학회, 2016., 235-253.

최강민, 일제 강점기의 가뭄 소재 재난소설에 나타난 재난의 양상, 우리文學硏究55, 우리문학회, 2017., 377-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