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45
영산교(榮山橋) 1년에 한 번씩 수리, 행주(行舟) 석장(石檣)과 내목성, 남평 십리송
-기록을 통해 보는 재난(災難)4-
김희태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교량조에 세곳의 다리 기록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30년 간행됨으로 조선초기의 역사 현장을 알 수 있다.
학교(鶴橋) : [나주읍]성 안에 있다.
영산교(榮山橋) : 금강진에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수리한다.
고막교(古幕橋) : 고막포(古幕浦)에 있다
*橋梁 : 鶴橋 在城中 榮山橋 在錦江津 歲一修葺 古幕橋 在古幕浦(『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全羅道 羅州牧 橋梁)
학교, 내목성, 외목성, 석장, 목장, 동수문, 수문, 여제, 광탄진(나주목 지도, 1872년, 규장각)
학교(鶴橋)는 나주읍성에서 나주천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연결되는 교량이다. 흙다리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고막교(古幕橋)는 함평 무안과 연결되는 다리로 고막포(古幕浦)에 있다. 지금도 석교가 남아 있는데,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지정 보물이다.
영산교(榮山橋)는 금강진(錦江津, 일명 錦川, 木浦, 南浦)에 있는데, 1년에 한 번씩 수리한다고 하였다. 지금의 영산대교와 같은 구실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1년에 한번 수리한다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홍수라는 재난과 관련이 있고 그 재난 극복의 산물로서 수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매년 여름철 큰 물이 지면 다리는 가거나 파손되기 십상이다. 주요 교통로이기 때문에 해마다 수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노동형식이었을 것이고 주민들에게는 말못할 부담이었을 것이다.
장흥 예양강(현 탐진강)의 경우, “해마다 9월이면 (부동)방 사람과 부내(방) 사람들이 말뚝과 대나무로 만든다.(歲九月 坊民與府內 楗竹成之)”고 <장흥읍지>(정묘지, 1747년)에 기록이 있다.
부내방은 당시 읍치 읍성이 있는 지금의 동동리 남도리 기양리 지역이다. 부동방은 읍성의 동쪽 건산리 벽사리 지역이다. 이는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오면 변화가 오기 때문에 장마철이 끝나는 9월에 공동노동으로 수리한 것을 말한다.
큰 강의 다리는 처음에는 흙다리였다가 차츰 석교로 하게 된다. 많은 물자와 인력이 들지만, 그만큼 견고성이 있어 자주 손보는 폐단은 줄어 들기 때문이다.
장흥 예양강의 만수재 이민기(晩守齋 李敏琦, 1646~1704)의 「예강석교권선문(汭江石橋勸善文)」, 보성 박사형(朴士亨, 1635~1706)의 <청광집>에 실린 「마천석교권선문(磨川石橋勸善文) 등이 재난을 극복하려는 귀중한 건축기록유산이다.
마천석교는 현재의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에 있었던 다리로 1674년(현종 15) 7월에 세운 마천석교비가 득량면사무소 뜰로 옮겨져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333호이다.
방재림, 남평의 십리송, 나주의 외목성, 내목성
조선시대 후기 1872년의 군현 지도에서 나무숲 기록을 볼 수 있다. 1872년 채색 지방지도에 나타난 남평현 지석강가의 십리송(十里松), 함평현 교촌리 향교 앞의 비보숲[林藪], 광주목 공북루 건너편의 유림수(柳林藪), 광양현 읍성 밖의 서수(西藪)와 남수(南藪), 나주목 동점문 밖의 내목성(內木城)과 외목성(外木城).
비보숲이라 칭하지만, 방풍림이고 방재림이라 할 것이다. 앞서 나주의 홍수 기록 가운데 나주 동문에서 남령현까지 늪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로 남평 십리송, 나주의 내목성과 외목성도 이해 볼만하다.
그리고 나주의 석장(石檣, 돌돛대)과 목장(木檣)도 형국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지만, 그 형국이 배형국, 즉 물과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수해 재난 방재의 염원을 담고 있을 것도 같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관련의 석당으로 세워졌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나주인의 의식에서는 지형 지세 형국 수해 등과 연계되었을 것이다. ‘재난’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환경과 생활속에서 보면 원래의 기능에 다른 인식이 덧대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습합된 인식이 오히려 원 가능과는 다르게 기록되고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석장(石檣)이라 한 사례가 그렇다. 담양은 석도(石棹)로 표기하고 있고, 담양부사의 주도로 관방재림을 조성하였다.
◎석장(石檣) 동문 밖에 있다. 전설에, “이 주를 처음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이것을 세워 행주(行舟)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한다. 문 안에도 목장(木檣 나무 돛대)이 있다.(石檣。在東門外。世傳初設州時,術者建此以表行舟之勢。門內亦有木檣。(『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 고적)
신최(申最, 1619∼1658)는 석장을 지나며 칠언율(七言律)을 읊는다. '천년세월 바람과 안개의 돌봄'. 자연으로부터의 돌봄, 저 풍연( 風烟 )은 물도 포함하는 의미일 것이다.
앞의 시에 첩운하여 금성을 읊다[疊前韻 詠錦城]
금성 고을 형승은 그림을 그린 듯하고
점점히 아득한 산봉우리에 큰 들녘 일세
바다에서 배 올 때 소금보다 땅을 업수여기고
마을의 메벼로 기름진 곳에서 술로 잔치여네
매화나무 대나무숲 그늘 좁은 길 서리에 집은 닫히고
유자와 귤 소반에 오르고 하늘에는 안개 가득하네
성문밖에 우뚝 솟은 석장을 지나며 바라보니
천년세월 넘어지지 않음은 바람과 안개의 돌봄이라
錦官形勝畫啚然 點點遙岑大野邊
海舶歸時鹺賤土 村秔肥處酒爲年
梅篁翳逕霜封戶 柚橘登盤霧噀天
更看石檣門外矗 千秋不仆護風烟
( <춘소자집(春沼子集)> 권2)
앞의 시 시제는 '次伯氏次柳子厚贈弟韻'이다. 신최의 백씨[형] 신면(申冕, 1607∼1652)은 1646년 11월 26일 금성현감에 임명되어 12월 10일 하직 인사를 하고 1647년 1월에 부임하여 11월 21일 이임하였다. 이 시는 1647년의 석장 경관이다.
광양현의 남문 밖의 서수(西藪)와 남수(南藪)는 일부가 유존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1971년 광양 유당고원 이팝나무로 지정하였는데, 2007년에 유당공원 지역과 인서리 숲을 포함해 확대지정하면서 문화재명칭도 광양읍수(光陽邑藪)와 이팝나무로 변경하였다. 읍수(邑藪) 용어가 문화재 명칭에 들어간 유일한 사례이다.
광양읍수(光陽邑藪)는 조선 명종 2년(1547년) 광양현감 박세후(朴世煦)가 읍성을 쌓은 뒤 바다에서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마을의 허한 부분(칠성리 당산은 호랑이 엎드린 형국, 읍내는 학이 나는 형국으로 남쪽이 허함)을 보호하려고 늪에 못을 파고 수양버들과 이팝나무 등을 심은 것으로, 풍수상의 결함을 보완하는 비보림 성격의 전통 마을숲이다. 유당공원지역과 인서리 숲을 포함하는 광양읍수는 각종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숲으로 기존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와 함께 보존하기 위해 확대 지정한 것이다.
참고
김희태, 「해마다 9월이면 말뚝과 대나무로 만든다, 장흥 예양강다리」, 인지의 즐거움147 [https://kht1215.tistory.com/325, 2018.03.13.]
김희태, 「보성 마천석교비, 173인의 시주로 13인의 석수가 만들다, 1674년」, 인지의 즐거움209[https://kht1215.tistory.com/671, 2020.07.18.]
김희태, 「수면 위로 우뚝히 채색 무지개가 솟았네, 벌교 홍교(虹橋)」, 인지의 즐거움211[https://kht1215.tistory.com/673. 2020.08.08.]
영포교, 영강진(1872년, 나주지도,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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