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43 - 1929년, 나주 신청(神廳) 화재 – 본정 29번지, 국악명인 박판석

향토학인 2024. 2. 17. 04:12

인지의 즐거움343

 

1929, 나주 신청(神廳) 화재 본정 29번지, 국악명인 박판석

-기록을 통해 보는 재난(災難)2-

 

김희태

 

羅州 신청 火災/<동아일보> 19291222일자. 0309-10.

라주전남 라주 본정(全南羅州本町) 이십구번지 박판식(朴判石)의 집(俗稱 神廳) 접방에 잇는 백룡조(白龍祚)(二一)는 지난 십팔일 오후 다섯시경에 저녁밥을 지어먹고 부엌을 깨끗히 소재한 후 근처에 가서 놀다가 일곱시 오십분 경에 돌아온즉 방() 뒤에서 불이 탐으로 즉시 근처 사람들과 소방대의 응원으로 여듧시 오분경에 진화되었다는데 조사하여 본 결과 손해는 별로 큰 것은 업다하며 원인은 부엌으로부터 불이 일어난 것이라더라.

 

나주 신청 화재 - 본정 29번지/동아일보 19291222

 

19291218일 오후에 나주 본정 29번지에서 불이 났다는 동아일보 기사이다. 기사의 제목이 羅州 신청 火災이다. 본문에서는 속칭 신청이라 하였고, 소유자는 박판석. 접방 세입자는 백룡조이다. 오후 5시경 저녁밥을 먹고 나가 놀다가 750분경에 돌아오니 불이 탐으로 근처 사람들과 소방대 응원으로 85분경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별로 크지 않고 부엌에서 일어난 불이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羅州” “火災로 검색하니 50여 건이 떴다. 이 가운데 연속간행물 신문기사류가 20여 건이었다. 동아일보 기사가 16건인데, 저 기사가 맨 처음 기사이다. 제목의 신청”, 내용 중의 속칭 신청과 관련하여 자료 찾기에 들어갔다. 어디쯤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다. 저 시기에도 신청(神廳)을 기능을 하고 있었을까. 짧은 기사를 통하여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강의 주제인 재난 기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넘나들어 본다.

 

우선은 근처 사람들의 응원. 어려운 이웃 일, 동네 일에는 누구든 나서는 것이 인지상정일게다.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음이리라. 우리 전래의 습속으로 촌계와 향약의 전통이 있다. 향약은 상부상조, 환난상휼의 정신이 깃든 것인데, 성리학의 전래와 함께 영향을 입었고 조선 초기에는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된다. 성리학 도입 이전에도 우리 전통적인 상부상조의 전통은 있었으니 보통 촌계로 칭한다. 이같은 습속이 면면히 전승되었고, 불이 난 이웃집을 보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진화에 나섰을 것 같다. 어쩌면 옷이 탄 사람도 다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웃의 재난에는 너나 없이 나섰다.

 

소방대 응원 - 소방조와 소방출초식, 소방연합경기

 

다음은 소방대 응원. 현대사회에서는 불이 나면 당연히 소방대가 필수이다. 그런데 그 소방대 조직은 언제쯤부터 유래 할까. 1929년 저 기사에 소방대라 했으니, 나주에도 일정한 조직이 있었을 것 같다.

 

1924124일 동아일보 기사에 나주소방 출초식(出初式)’ 기사가 보인다. 예년과 같이 14일에 나주경찰서에서 회집하였다. 이로 보아 나주 소방대는 1924년 이전에 조직되어 있었고, 나주경찰서 관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초식(出初式, 또는 소방출초식)소방관계자가 1월 초순에 수행하는 시무식 행사다. 출초식을 일본인들은 데조메시키(でぞめしき)’ 또는 쇼보데조메시키(しょうぼうでぞめしき)라고 했는데 매년 14일에 하였디. ’데조메시키의 기원은 일본에서 거행되었던 일 년의 시작을 알리는 소방의 시무식이었다. 일본에서는 1659(萬治2) 14江戶에서 시작한 데조메시키上野東熙宮 앞에서 거행된 이래 관습화되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소방조를 조직한 이후에는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출초식이 이루어졌다. 출초식에서는 일제방수대피구조 등 소방훈련, 사다리타기나무끌이 등 전통기예 등이 진행된다. 새롭게 도입한 자동차 펌프에서 내뿜는 물줄기는 화염을 순식간에 진화하여 군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고 한다.

 

출초식에는 신사참배, 시가행진 및 저녁에는 기관장들이 소방조원을 격려하는 연회가 있었다. 출초식을 통하여 소방조는 지역의 단합을 유도하고 일체감을 이끌어 내는 매개역할을 하였다.(김상욱, 일제강점기 호남지역 소방조 연구, 목포대대학원 한국지방사학과 박사논문, 180~181.)

消防出初式/동아 240112
소방연합경기 / 동아일보 19250426

 

1925년 기사에는 420일 나주청년회 광장에서 의용소방경기대회가 열렸다. 출전인원은 나주소방조 90, 영산포소방조 68, 남평소방조는 71명이 참여하였다. 모두 229명이었다. 금천과 노안, 함평 학교면에서도 견학을 하였고 관광객은 6천명에 달했다. 경기는 방수(放水) 산개(傘開) 구비(鳩飛), 소화(消火) 판압(板押) 등이었다.

 

이 소방조는 의용으로 조직 운영되었는데, 정책을 집행하는데 일선에 서기도 하며, 보험회사와 연결되기도 한다. 소방조가 화재진압이라는 소방 활동의 본질적 업무를 벗어난 사례로 한국인의 항일운동 현장에 소방조가 동원 된 점과 소방조간부들이 보험대리점 운영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기는 상황 등이 있었다. 나주의 소방조 조직관 활동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의 나주소방서는 19821216일 금성소방서로 개서했다. 202373일 기준 정원은 249(현원 228)이다. 조직은 3(소방행정과, 대응구조과, 예방안전과), 1(현장대응단)119안전센터와 구조대로 구성되었다.(나주소방서 누리집) 1925년 당시의 소방조직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119안전센터가 경현센터, 이창센터, 남평센터, 빛가람센터인데, 당시는 나주, 영산포, 남평소방조인 것과 비교해 보면 권역별로는 빛가람센터만 더 늘어난 셈이다.

 

 

속칭 신청과 나주 국악 명인 박판석

 

192912월에 불이 난 장소를 보면 본정 29번지는 지금의 중앙동 29번지일 것 같다. 그 행정지명의 변화상을 살펴본다.

 

1759 전 라 도 羅州牧 東部面 紙砧里 /호구총수(戶口總數), 조선 8도제

1895 나 주 부 羅州郡 東部面 紙砧里 /23부제. 1895.05.01.

1896 전라남도 나주군東部面 紙砧里 / 13도제. 1896.08.04.

1912 전라남도 나주군東部面 紙砧里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

1914 전라남도 나주군東部面 本町 / 행정구역 개편. 1914.04.01.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29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面 本町 / 행정구역 개편. 1929.04.01. 나주+羅新(영산강 북). *榮山 (나신,영산강 남)

1931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邑 本町 / 행정구역 개편. 승격. 1931.11.01.

1981 전라남도 금성시 中央洞(城北洞관할) / 행정구역 개편. 1981.07.01. 나주읍+영산포읍

1986 전라남도 나주시 中央洞(성북동관할)/ 행정구역 개편. 개칭. 1986.01.01.

1995 전라남도 나주시 中央洞(성북동관할) / 행정구역 개편. 도농통합. 1995.01.01.

 

본정 29번지 속칭 신청은 조선시대에는 악공 등의 근무처이라 할 것이다. 근대기에 들어서는 국악인들을 길러내는 교습소 구실을 한다. 집 주인 박판석은 나주의 국안 명인으로 유명한 분이다. 나주 삼현육각의 명인 임동선, 그 부친 임봉삼(삼봉) 이 박판석에게 배웠다.

 

1986년 나주 삼현육각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자료를 보면, 육각 가운데 피리[대금, 가야금] 박판석(朴判錫, 1863~1939[1942])-임봉삼(林奉三[三奉], 1873~1962)-임동선(林東先, 1915~1987, 보유자 인정 1986.11.13.~1987.02.15) 계보만 전승되고, 다른 분야(대금 유창근, 피리 오진석, 해금 전학근, 북 박채홍, 장고 강용규)는 단절이 되어 있었다. ‘재난관련 기사 이기는 하지만, ‘속칭 신청이라 한 것을 보면 나주 국악의 전승 공간으로서의 역사성도 알 수 있다.

 

신청과 관련하여 조금 소급하여 검토해 볼 부분도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을 학살하러 온 일본토벌군 가운데 한 장병이 남긴 일기에 잔혹한 동학군 토벌기록이 있다. 680명의 유해가 널부러져 있다는 표현도 있다. 그런데 장흥이나 해남까지 토벌을 하고 돌아 온 일본군이 인천항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송별회를 한 기록 부분이 있다. 여기에 한인 경예자(韓人軽芸者)”가 참여했다고 하였다. 189526일 기록이다. 박판석(朴判錫, 1863~1939[1942]의 재세 시기로 보아 조선 말기의 악공 출신이라면 관련이 있을까 자료를 더 찾아 볼 일이다.

 

[18952] 6 : 이날은 완전히 동도가 진정이 되었으므로 장교, 각 병사 및 한병(韓兵) 등이 나주목사와 송별회를 하였다. 술과 안주, 그리고 한인 경예자(軽芸者) 등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또 인천병참감부로부터 명령이 왔는데 귀 부대는 동, , 서의 세 길로 나누어 가능한 한 남은 무리의 적을 수색하여 동학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서둘러 행군해 용산으로 집합하라고 하였다.(同月六日, 滞在, 此日, 東徒鎮定, 将校, 各兵及韓兵等, 羅州牧使離別会ヲナス, 酒肴及韓人軽芸者, 沢山アリ, , 仁川兵站監部ヨリ命令来, , 貴隊, 東学党討伐隊兵士従軍日誌(井上)東中西分別, , 残党索捜(ママ), 東学ヲシテ再起セサル様致, 急行龍山集合スベシトアリ.(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일청교전 종군일지[明治二十七年日清交戦従軍日誌]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14-, 520))

 

일본 토벌군은 27일에는 나주에 체재하고 8일 오전 8시 출발하여 북문을 나와 오후에 광중[ 도착헤 숙박, 98시 광주 출발 오후 담양 도착 숙박, 10830분 출발해 오후 135분에 순창에 도착해 숙박했는데, “이날은 큰비가 내려 몸과 옷이 물에 빠진 것 같았다. 신탄(薪炭) 불로 말렸다.”고 하였다.

 

한편 해남에서 나주로 도착한 24일조의 일기에서는 동학농민군을 날마다 12명 이상 103명을 죽였고, 시체로 버려진 자가 680명에 이른다는 참혹한 내용이 있다.

 

[18952] 4 : 오전 830[영암] 출발, 오후 5시 나주부에 도착했다. 행정은 7. 나주부는 지성(地城)으로 서남쪽은 산이 둘러싸고 있다. 30여 척의 석벽을 주위에 쌓았고 4대문에는 돌로 터널을 만들어 요해(要害) 견고한 곳이다. 성채 안에는 민가 4만 호가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남문으로부터 4() 정도의 거리에 작은 산이 있었는데, 사람 시체가 겹겹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었다. 이것은 지난번 장흥부의 전투 후 엄하게 수색하였으므로 동도가 거처가 곤란해져 연일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가 포획하여 심문한 다음 중죄인은 죽였다. 날마다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곳에 시체로 버려진 자는 680명에 달했다. 근방에는 냄새가 심했고 토지는 백은(白銀)과 같았고 사람 기름이 얼어붙었다. 이와 같은 사체를 본 것은 전쟁 중에도 없었던 바이다. 이 동학당의 시체는 개와 새의 먹잇감이 되었다.(同四日, 午前八時三十分出発, 午后五時羅洲府, 行程七里, 羅洲府, 昔時任那セシナリ, 地城ニシテ, 西南ラス, 三十余尺石壁周囲, 四大門, ノ トンネル , 要害堅固ナリ, 砦内, 町家四万余戸有, 当地スルヤ, 南門ヨリ四丁計山有, 人骸累重, セリ, 前日, 長興府戦後, 捜索厳シキ, 東徒居所困難, 追日我家毎ラントセシヲ, 民兵, 隊兵捕獲セラレ, 責問, 重罪人, 拾二名 以上, 百三名, 此所テシ, 六百八十名セリ, 近方, 嗅気強, 土地白銀, 人油結氷セリ, 如斯死体シハ, 戦争中ニモ次第ナリ, 此東学党, 犬鳥喰所トナレリ.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일청교전 종군일지 외, 519))

 

차마 눈 뜨고는 읽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일기에서 또 한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4대문에는 돌로 터널을 만들어[ノ トンネル ]라 한 부분이다. 나주 읍성 사대문의 형식을 말해 주는 것이고, 북망문 복원시 홍예식으로 하는데 참고로 삼기도 하였다. 참혹한 학살현장을 기록한 일기이지만 역사 현장 복원의 참고자료로 인용도 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김희태, 나주읍성 북문(북망문)과 기록-문화유산 원형 찾기3-, 인지의 즐거움093[https://kht1215.tistory.com/199, 2017.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