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41
제봉 고경명선생의 ‘차(茶)’ 관련 시문
-한 상의 향화로 다신에게 제사하네[一床香火祭茶神]-
김희태
차 한잔 마시니 생각할 틈이 없구나
흥에 겨워 漫興[만흥]
대자리 싸늘하여 잠 못 이루고
竹簟生寒淸未睡[죽점생한청미수]
차 한 잔 마시니 생각할 틈이 없구나
茶甌一啜無餘事[다구일철무여사]
가랑비에 오이 밭 매다 돌아와
南園小雨鋤瓜回[남원소우서과회]
유문의 산수기 한줄 한줄 읽는다
細讀柳文山水記[세독류문산수기]
대자리를 편 것을 보면 초여름쯤일까. 한숨 하려 했는데, 아직은 봄기운이 남아 있는 듯 싸늘하다. 문득 일어나 차를 다려 마시니 그 여유로움, 다른 일일랑은 생각할 틈이 없다. 가랑비 흩뿌리니 오이밭을 돌아 본다. 사랑으로 들어 유종원의 문집(柳文)을 들춰 산수기를 한 줄 한 줄 익는다.
대자리와 차 한잔. 가랑비와 오이 밭. 산수기의 세독(細讀). 여유가 있는 향촌 경관이다. 선비들의 일상일 것이다. 거기에 차와 책이 있다. 인문학의 기본이랄까
제봉 고경명(1533~1592)선생. 삼부자 순절과 포충사.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절의(節義)”는 오늘날 광주의 상징어가 된 의향(義鄕) 연원의 한 갈래로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절의는 어느날 갑자기 형성된 것은 아닐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추구했던 유교정신을 학문으로 익히고 생활화하였고, 이게 왜적으로 침입에 대항하여 절의로 나타난 것이리라. 인문정신의 실천이 절의이고, 이의 상징성이 의향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고경명 선생의 의(義)와 충(忠)은 그 뿌리에 문(文)과 학(學), 그리고 도(道)가 있다는 것이 늘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경명선생과 ‘차(茶)’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 보게 되었다.
1617년 남원에서 처음 간행한 『제봉집(霽峯集)』에는 『유집(遺集)』과 『속집(續集)』이 들어 있다. 이 문집을 한국고전종합DB에서 “茶” 글자로 검색을 해보니 16건이 확인된다. 산다(山茶, 동백나무) 등 다른 의미를 제외한 것이다.
앞의 시 ‘만흥(漫興)’은『제봉집』 권1에 나온다. 찬찬히 보니 차를 마시면 다른 일들을 생각할 틈조차 없이 여유롭다 하였다. 생활화 되었음이라. 또 하나는 산수기를 세밀하게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경명은 마흔 두살 때인 1574년(선조 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을 등정하고 유산기를 짓는다. 「유서석록(遊瑞石錄)」이다. 이 글은 유산기 문학 작품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시에는 차를 마시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명문으로 잘 알려진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산수기[柳州山水記]를 꼼꼼히 읽는 것이 보인다. 이때 이것 저것 비교하고 검토했을 것이다. 일종의 사전 조사이다. 이를 바탕으로 길을 나서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명문이 나왔을 것 같다.
「유서석록」에도 차를 마신 기록이 있다. 4월 21일 증각사에 들렀을 때이다. 증각사는 무등산 북서쪽 신림골 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21일. 을축…정오에 증각사에 당도했는데, 이날 뿌연 기운과 흙비가 내려 멀리 바라볼 수는 없었으나, 대나무 정자와 넓은 벌판과 비단결 같은 시냇물을 역력히 볼 수 있었으니, 높은 데 오를수록 보는 바가 더욱 넓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증각사의 북쪽에는 분죽(粉竹)과 오죽(烏竹) 두 가지 대가 있는데, 분죽은 불에 쪼여 진을 빼고 지팡이를 만들면 매우 윤기가 있다. 차를 마신 후에 곧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으로 향하니…”
증심사-취백루-사인암을 거쳐 증각사에서 차를 마신 뒤 이정을 거쳐 중령으로 가는 일정이다. 어쩌면 증각사에서 마신 ‘차’를 덖었던 차잎을 땄던 차나무는 근세들어 ‘춘설차’로 명명한 그 차나무와 같을성 싶다.
함께 차를 마시며 유산을 했던 이들은 광주목사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 신형(愼衡, 1510~?), 이억인(李億仁), 김성원(金成遠, 1525~1597), 정용(鄭庸), 박천정(朴天挺, 1544~?), 이진(李傎), 안극지(安克智, 1550~?), 증심사 조선(祖禪) 등이다.
고경명은 스물여섯에 과거에 장원 급제(1558년)하여 벼슬길에 나섰다가 서른한살 때인 1563년(명종 18) 울산군수에서 물러나 고향 광주에서 생활하였다. 아마도 저 ‘만흥’ 시는 마흔살 전후일듯 싶다.
한 상의 향화로 다신에게 제사하네
봄 천둥 어젯밤에 안개를 거둬가니
蟄雷前夜破山巾[칩뢰전야파산건]
들 빛 시냇물 맑고도 고요하구나
野色川容淑且眞[야색천용숙차진]
소갈증 들린 장경은 사업이 무엇이런가
消渴長卿何事業[소갈장경하사업]
한 상의 향화로 다신에게 제사하네
一床香火祭茶神[일상향화제다신]
"우생에게 줌 贈友生"이라는 시. 어제 저물녘 안개가 자욱했다. 문득 봄날인데 천둥이 치더니만 씻은 듯 안개도 걷힌다. 들 빛은 푸르다. 시냇물은 맑아 소리없이 흘러 고요하다. 소갈증이 들린 내 자신 탓해 무엇하리. 할 일을 없는 건가. 아니다 향화를 다신께 올려야지. 이 시의 끝에 “이 때 내가 소갈병이 들어 차를 마셨기에 이른 것이다.[時余病渴飮茶故及之]”라는 세주가 있다.
소갈(消渴)은 음식을 자주 먹고, 갈증이 나며, 오줌을 자주 누는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오늘날의 당뇨와 비슷하다. 보통 소갈은 7, 8월에 생겨 11, 12월에 심해지고 2, 3월에 덜해진다고 한다. 『동의보감』 '소갈(消渴)'문(門)에도 나온다.
제봉의 시에서는 “칩뢰(蟄雷)”라 하여 봄이라는 계절을 알 수 있다. 칩뢰는 매년 제일 처음 일어나는 봄의 천둥을 말한다. 동면하고 있는 동물이나 벌레를 깨운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그 봄에 맑은 시내 굽어 보면서 세상사 돌아 보려했던 것 같다.
그런데 천지만물이 약동한다는 봄인데 내 몸은 묵직하고 소갈증이 난다. 소갈증은 2, 3월 봄이면 우선한다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 정성을 다해 차를 다린다. 생활속에서 음용하는 차. 때로는 약용으로 마시지만, 그 차 한잔에 온 마음을 담아 다린다. 시인은 “신에게 제사하듯 한상의 향화“라 형상화 한다. 분명 시이지만 생활사 일기라 할 수 있다. 행간을 읽어 보면 ”어느해 봄에는 소갈증이 심했고 약용으로 차를 마셨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차도 끓이지
고제봉의 시어(詩語)를 보면 차에 대한 표기가 많다. 어느 날은 “다경이 없는 것만이 한스럽다[唯恨欠茶經 유한흠다경]”하여 차에 대한 글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나무 밑에 차 향기가 맑게 풍긴다[茶煙竹日淸酣 다연죽일청감]”고 하여 차나무를 살피는 모습도 보인다.
또 “대나무 화로와 차 솥으로 연단이나 해야겠네[竹爐茶鼎鍊丹丘 죽로다정연단구]”라 하여 차를 연단의 방편으로 삼는 모습도 보인다. ‘연단’이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드는 술법(術法)을 이른다. 차를 선약으로 친 것이다. 죽방사(竹房寺)의 운상인이 보내온 둥근 부채(白團扇)를 읊은 시에는 “달밤에 차 끓일 때 쓸 만도 하고[窓欞小月圓茶夢 창령소월원다몽]”라 한다.
『제봉집』 권3에는 백록 신응시(白麓 辛應時, 1532~1585)를 만나 지은 시가 여러 수 있다. 그 가운데 “앞의 운을 따라서 군망에게 드린다[再疊前韻 錄奉君望]”는 칠언율시 네수가 있다. 군망은 신응시의 자이다. 그 가운데 한 구절.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차를 끓인다고 했다.
가끔 약으로 근력을 유지하면서
靑囊服餌强扶衰[청낭복이강부쇠]
문 닫고 고요히 드러누웠네
恬泊棲神獨守雌[염박서신독수자]
두루미에 술 부어 목을 적시고
甕撥夜雲澆芥蔕[옹발야운요개체]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차도 끓이지
茶煎雪水試槍旗[다전설수시창기]
신응시는 1575년(선조 8) 전라도관찰사, 1581년(선조 14)~1582년 9월 사이 광주목사를 지낸다. 고경명은 1563년(명종 18)부터 1581년(선조 14)까지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에서 은거를 한다. 『제봉집』에는 군망(君望)과 나눈 시가 아홉수가 보인다. 백록(白麓)으로 표기된 시는 십여수이다.
광주 포충사에는 제봉집 목판(246판)과 백록유고 목판(121판)이 있는데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함께 지정되어 있다. 백록유고는 1660년 10월 판각본이다. 48판은 신응시의 백록유고, 73판은 백록의 아들인 신경진(辛慶晉, 1554∼1619)의 녹아속집(麓丫續集)이다.
신응시는 휴암 백인걸(休菴 白仁傑, 1497~1579)의 문인이다. 백인걸은 남평현감(1541년 3월~1545년 4월 재임)을 지낸 바 있다.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 1537~1616)가 지은 고경명의 신도비명에는 “공(고경명)은 어린 시절부터 어른처럼 의연하였는데, 참찬 백인걸 공이 한번 보고는 중하게 여겨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아보았다.[公自髫年 儼若成人 參贊白公仁傑一見稱重 知公爲遠器]”는 내용이 있다.
이같은 여러 인연들로 남도 곳곳의 정자와 누원에는 고경명과 신응시의 시가 많다. 그 시회 자리는 늘 ‘차(茶)’와 함께 했을 것이다.
*이 글은 「한 상의 향화로 다신에게 제사하네[一床香火祭茶神] - 忠烈公 고경명선생과 차(茶)」(인지의 즐거움237, https://kht1215.tistory.com/774, 2021.06.05.)를 보완하였다.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를 통해 검색하였고, 국역문은 『국역 제봉전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를 참고하였다.
*김희태, 제봉 고경면선생의 차 관련 시문, <제석문화> 5호, 광주광역시남구문화원, 2023.7~11쪽.
'인지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지의 즐거움343 - 1929년, 나주 신청(神廳) 화재 – 본정 29번지, 국악명인 박판석 (2) | 2024.02.17 |
---|---|
인지의 즐거움342 - 1932년 영산포 화재, 3호 전소 - 삼영리 17번지-기록을 통해 보는 재난(災難)1- (1) | 2024.02.17 |
인지의 즐거움340 - 사진으로 본 영암군 근현대사2 -교육, 생활, 산업, 개발, 체육, 재해- (3) | 2024.01.31 |
인지의 즐거움339 - 사진으로 본 영암군 근현대사1 -기관, 읍면, 문화- (3) | 2024.01.31 |
인지의 즐거움338 - 역사 속의 행정편제와 땅이름의 유래-영암, 목포, 해남, 진도, 완도- (2) | 2024.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