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25 - 고생하셨습니다. 광산 근로자들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 -화순광업소 폐광(2023.06.30.)과 “흑토평(黑土坪)’” 기록-

향토학인 2023. 12. 31. 16:31

인지의 즐거움325

 

고생하셨습니다. 광산 근로자들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

-화순광업소 폐광(2023.06.30.)흑토평(黑土坪)’” 기록-

 

김희태

 

고생하셨습니다. 광산 근로자들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

118년 동안이나 화순 경제의 중심이었던 화순광업소 폐광('23.06.30.)”

 

모처럼 화순을 '한바쿠' 하다가 얼핏 현수막이 눈에 들어 온다. 청풍면 신리 삼거리 학포로와 곰치로 갈림길에서 저 현수막을 지나치게 된 것. 202385일이다. 자세히 한번 봐야지. 차를 멈추고 사진에 담는다.

오래전 언젠가 '흑토평(黑土坪)' 땅이름 이 나오는 비문을 보면서, '! 흑토' '석탄' 한번 찾아 봐야지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화순현 산천조에 흑토재는 [화순]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그 땅에서 흑토가 생산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黑土岾 : 在縣東二十五里 其地産黑土 故名]”는 기록 등 일부 자료만 보다가 묵혀 두었는데, 십수년이 지나 저 '화순광업소 폐업' 현수막이 그때의 궁금증을 다시 떠 올리게 한다.

 

먼저, 화순탄광을 살펴본다. 우리나라 첫번째 탄광영업소로 출발한다. 화순군 동면 복암리 소재 대한석탄공사화순광업소. 118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원래 190545일 박현경(朴賢景, 1883~1949)이 발견하여 최초로 광구 등록을 하였으나 채굴에 이르지 못하였다.

 

실질적인 채굴은 1931년 부터이다. 화순 무연탄주식회사가 일부 구역을 개발하여 광주의 종연방직에 석탄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종연방직은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의 전신이다. 광복이 되어 미군정청 시절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을 화순광업소로 통합한다. 1950111일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로 재편한 이래 올해 20236월까지 운영을 한 것이다.

 

화순광업소는 총 3,075면적에 17개의 광구가 있다. 매장된 광량은 3,800만 톤이며 점유율은 전국 매장량의 15%를 차지하였다. 채굴이 가능한 가채량은 1,900만 톤이며 전국 가채량의 25%에 해당한다. 화순광업소는 개광 이래 생산량은 2,4562000[1908~2010]으로 연간 최고 생산은 1989년의 705000톤이었다.

 

화순탄광의 석탄은 화순선 철도를 운송하였다. 화순선은 화순역과 남화순역, 장동역, 탄광 소재 복암역 사이 11.14km 길이이다. 사설 철도로 1942101일 개통되었다. 여객의 이 줄어들어 1974년 여객 업무는 중단되고 무연탄 전용 산업선이 되었다. 석탄산업이 저물게 되자 1984111일 대한 석탄 공사 소속의 전용선이 되었다.

 

1978년 초 함박눈이 내리던 날 복암역을 들를 기회가 있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일에 종사할 때이지만 일종의 공무였다. 광주기관차사무소에 근무하던 시절이다. 광주역에서 출발한 화물차였다. 화순역에서 빈 화물차량을 더 붙여 달고 복암역으로 갔다.

 

복암역에서는 빈 화물차량은 떼어 주고 석탄이 적재된 화물차량을 연결하여 화순역에서 일부를 떼어주고, 효천역으로 와서는 남선연탄 쪽에 떼어 주고 다시 광주역으로 오는 일정이다. 화물차량을 떼고 붙이고 하는 것은 입환(入換)’이라 한 것 같다.

 

백설은 펄펄내려 천지는 하얀데, 그곳 복암역은 왼 통 흑색’.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몇 번을 더 복암역을 드나드니 그 복암역 직원은 물론이고 몇 번인가 스쳤던 광업소 관계자들과도 인사를 했던 기억도 새롭다. 1988년에서 1992년 사이 지산동과 서동에서 신접살이 할 무렵 연탄재처리를 담당했는데 제 때에 맞추지 못해 쩔쩔거리던 기억도 난다.

 

이제 흑토평(黑土坪)’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2007년의 일이다. 장성에 있는 고경명(高敬命, 1533~1592)선생의 신도비 문화재 지정조사를 할 때이다. 비문 가운데 흑토평이 나온다. 이 흑토평은 고경명선생이 임진왜란 때 육십 노구로 의병장으로 나서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뒤 첫 장례를 했던 곳이다. 장례 당일 무지개가 뜬 것 같다. 비문의 표기를 보자.

 

10월 경인일에 화순현(和順縣) 흑토평(黑土坪) 언덕에 장사 지냈다. 장사 지낸 다음날 풍설(風雪)이 번갈아 일어나고, 긴 무지개가 무덤 왼쪽부터 묘역을 가로질러 수십 리까지 뻗쳐 특이한 광채가 하루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공의 충분(忠憤)에 감응한 것이라 여겼다. 뒷날 묏자리가 좋지 못하여 모년 모월 모일에 모읍 모지 모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윤근수 찬, 고경명 신도비명)

 

10월 경인일이면 104일이다. 당시는 음력이니 초겨울이라 풍설이 일었던 모양이다. 수십리 뻗친 무지개의 광채. 충분에 감응한 것이라 여겼다 했으니 과장은 아니리라. 이곳으로 모시게 된 것도 아린 사연이 있다. 제봉은 7월 정묘일(10)에 순국을 한다. 석달만에 화순 흑토평에 모신 것이다.

 

공의 시신은 금산 산중에 암매장되어 있었는데, 적병이 가로막고 있어서 즉시 거두지 못하다가 공의 아들 고종후 등이 의병(義兵)과 승군(僧軍)에게 부탁하여 8월 모 갑일에 시신을 찾아 왔다. 대략 40여일 만에 염습하였는데, 여러 날 무더위와 비를 겪고도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기 있어 보는 자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고향으로 시신을 받들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였는데 더러 정신없이 울부짖는 자들도 있었다.(고경명신도비명)

 

순국한 뒤 금산 산중에 매장되어 있다가 아들 고종후 등이 의병과 승군에게 부탁하여 8월 하순께 시신을 찾아 염습을 하였다. 한 여름철 무더위와 비를 겪고도 안색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있다 했으니, 어쩌면 절의 정신이 온 얼굴에 밴 모습이었을 것 같다.

 

장성 고경명 신도비는 200891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41호로 지정하였다.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오동촌)에 있다. 윤근수(1537~1616)가 지은 비문을 새겼는데, 글씨는 제봉의 7대손 고정봉(1743~1842)이 썼고, 전서는 고정헌(高廷憲, 1735~1811)의 글씨이다. 신도비 위치는 장성 오동촌 묘소 입구이다.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번지. 묘소는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산 183-1번지에 있다.

 

윤근수선생의 문집에 실린 비문은 모년 모월 모일에 모읍 모지 모좌의 언덕언덕으로 이장하였다.[某年月日 改葬于某邑某地某坐之原]”라고 하였는데, 실제 현지의 비에는 기유(1609)3월 경인(9)에 장성현 오동리(梧桐里) 오좌(午坐) 자향(子向)의 벌에 이장하였다.[己酉年三月庚寅 改葬于 長城縣梧桐里午坐子向之原]라 하여, 화순에서 장성으로 이장한 시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이 지은 증 의정부 좌찬성 제봉 고공시장(贈議政府左贊成霽峯高公諡狀)기유년 3월 경인일에 장성현(長城縣) 오동리(梧桐里)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언덕에 다시 장사 지냈다.”라는 기록 등을 참고한 것이리라. 이명한이 지은 시장은 그의 문집인 백주집(白洲集)(18)(한국문집총간 97)에 실려 있다.

 

이처럼 화순 흑토평에는 159210월에서 16093월 사이 18여년을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의 유택이 있었다. 당대 문장가 윤근수선생이 이 비문을 지을 무렵에 이미 땅이름으로 지리잡고 있었던게다. 그러면 언제부터 기록이 나올까. 화순을 택한 사연, 장성으로 이장한 사연 또 찾아 봐야겠다.

 

고경명선생의 아들이자 고인후선생의 동생인 청사 고용후의 문집에 <과흑토평 회백씨(過黑土坪 懷伯氏, 흑토평을 지나면서 백씨를 회고하다)>는 시가 있다. 저 시의 흑토평은 어쩌면 화순 흑토평을 말한 것일듯 싶다. '백씨(伯氏)'는 누구일까. 국난에 순절한 고종후선생과 고인후선생 두분 중에 한분일까. 언제적에 지었을까. 하여 기록찾기는 이어진다.

 

*2014년 그 흑토평을 위치를 알아보고자 보낸 글이 남아 있다. 화순군청 심홍섭 문화재전문위과 오고 간 전자우편 내용이다.(2014.03.28.) 또 나서야겠다. ‘국시집도 들르고....

 

전에 한번 말한 고경명선생 신도비에 있는 화순 흑토평 기록. 지금 어디쯤일까 찾아 봐. 고경명신도비명 : 159210월 경인(庚寅, 4)에 화순(和順)현 흑토평(黑土坪)의 벌에 장사했는데, 장사한 다음날에 풍설이 몰아치고 긴 무지개가 무덤 왼편에서 일어나 영역(瑩域)을 빙둘러 수십리를 벋쳐 광채가 이상하여 하루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충분의 감동이라고 여겼다. (十月庚寅(4) 葬于和順縣 黑土坪之原 葬之翌日 風雪交作 長虹起於墓左 橫跨塋域竟數十里 光彩異常 逾日不滅 人爲忠憤所感)”

 

반갑네요. 역시 책 읽고 조사하고 연구하고 글쓰는 분이라.. 흑토재는 동면 구암리 천운장 마을에 있어요.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바로 석탄공사 화순광업소가 있어요. 저도 기록을 보고 가 봤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근데 왜 화순에다 초장을 했을까요. 등등 넘 궁금해요. 언제 같이 가보게요... 근처에 맛난 국시집이 있는디..”

화순 곰치로와 학포로 갈림길에서 만난 현수막(2023.08.05)

-곰치로는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장동교차로에서 화순군 청풍면 신리삼거리를 잇는 도로이다. 전라남도 지방도 제839호선의 일부로 주요 교차도로는 지방도 제820호선, 지방도 제835호선이다.

-학포로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에서 화순군 화순읍를 잇는 도로이다. 전라남도 지방도 제839호선의 일부로 주요 교차도로는 국도 제29호선, 지방도 제822호선, 지방도 제843호선이다.

대동여지도 흑토재 부근도(규장각)
호남지도 화순현지도 흑토치 부근도(규장각)
여지도서 화순지도 흑토치
흑토재 기록(신증동국여지승람 화순현 토산조)
충렬공 제봉 고경명선생의 화순현 흑토평 장례 기록(윤근수 찬, 고경명신도비명, 월정집)
화순탄광과 화순선 복암역(전라남도 사진)
조선지지자료(1911년, 국립중앙도서관) 능주군 동면의 흑토치 기록, 비고란에 구암리 부근이라고 하였다. 1911년경의 능주군 동면 구암리는 지금의 화순군 동면 복암리 구암마을이다. 화순군은 1908년 10월 15일 폐지되어 능주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능주군, 동복군, 남평군 일부가 합해져 다시 화순군이라 한다. 이 때 능주군 동면(東面) 복림촌(福林村)과 구암리(龜巖里)가 합해져 화순군 동면 복암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