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27
조선시대 무안의 읍격과 역대 무안현감의 행적
김희태
조선 왕조는 개국 이후 여러 제도를 정비한다. 태종대에 모든 제도를 개편하고,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여 체제의 완성을 보게 된다. 중앙 행정 조직으로는 의정부와 육조가 있었다.
지방의 행정조직으로 전라도는 57관(官)의 편제였는데, 임진정유왜란의 피해로 진원현이 장성에 합해 지면서 56관 편제가 된다. 무안은 전라도에 속했고 현감이 다스렸다.
<표> 조선시대 무안의 읍격과 전라도의 군현 편제
府尹 (종2품) |
牧使 (정3품) |
都護府使 (종3품) |
郡守 (종4품) |
縣令 (종5품) |
縣監 (종6품) |
계 | 비고 (현) |
나주, 능주(2) | 담양, 장흥. 순천(3) | 영암, 영광, 진도, 낙안, 보성(5) |
창평(1) | 곡성, 옥과, 남평, 광양, 구례, 흥양, 동복, 화순, 장성(진원),함평, 무안, 강진, 해남(13) | 24 | 전남 | |
광주 | 1 | 광주 | |||||
전주 (1) |
남원, 익산(2) | , 김제, 고부, 금산, 진산, 여산, 순창(7) | 용담, 만경, 임피, 금구(4) | 임실, 장수, 운봉, 진안, 무주, 정읍, 흥덕, 부안, 옥구, 용안, 함열, 고산, 태인, 고창, 무장(15) | 28 | 전북 | |
제주(1) | 대정, 정의(2) | 3 | 제주 | ||||
1 | 4 | 5 | 11 | 6 | 30 | 56 |
각 수령은 행정 실무자인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육방관속을 거느리고 사무를 분담케 하였다. 이밖에 향청이 있었는데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이다.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를 감찰하며, 민의를 대변하였다. 이는 유향소에서 변형된 것이었다. 향사당이나 향소라고도 하였다.
무안현의 현감은 문관을 보임하였고 6품직이다. 현감 아래로는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2인, 군관(軍官) 15인, 아전(衙典) 38인, 지인(知印) 11인, 사령(使令) 22인, 관노(官奴) 28인, 관비(官婢) 7인을 두었다.(『여지도서』 무안 관직조)
좌수는 지방의 자치 기구인 향청의 우두머리로 수령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가 향원(鄕員) 인사권과 행정 실무의 일부를 맡아보았는데, 1895년(고종 32)에 향장(鄕長)으로 고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별감은 조선 전기는 좌수를 도와 지방 풍속의 조정과 향리(鄕吏)를 규찰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 행정 관아의 일부로 편입되어 지방 관아가 맡는 각종 제수(祭需)·전곡·형옥(刑獄)·봉수(烽燧)·도로와 교량 보수 등을 담당하였다.
무안현은 계수관(界首官)이 설치된 나주목에 영속되고 있었다. 계수관 체제란 각 도의 가장 큰 고을을 중심으로 몇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서 계수관이 도와 군‧현 사이의 중간적 존재로서 도의 지시를 군‧현에 전달하며 군 현을 통솔하였다. 계수관의 업무는 호패분급, 도량형 관리, 군기 제작 및 보관, 학문의 교육과 시취, 서적의 제작과 보관, 진상물 수합, 예장용 관과 목재확보 등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전라도의 계수관은 전주도‧나주도‧남원도‧장흥도이고 무안현은 나주도 계수관 체제에 들어 있다. 나주도 계수관은 1목(나주), 3군(해진, 영암, 영광), 8현(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등 12개 군현을 거느렸다. 조선초기(1393년, 태조 2) 전라도의 계수관은 완산(完山, 전주)‧나주‧광주였는데, 1430년(세종 12) 광주목에서 강상사건이 있어 무진군으로 강등되고 장흥도호부로 계수관을 옮겨 전주·나주·남원·장흥이 계수관이 되었다.
1895년 윤5월 1일에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8도제가 23부제가 된다. 전라도는 전주부‧남원부‧나주부‧제주부로 개편된다. 무안은 나주부에 속하게 된다. 1895년 9월 5일 전국 336개 군을 5등 군으로 나눌 때 무안군은 3등 군이 된다. 1896년 2월 3일에는 지도군(智島郡)이 신설되면서 무안군 관할 섬지역을 지도군에 넘겨준다.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제가 13도제로 개편된다. 종전 8도제하의 전라‧충청‧경상‧함경‧평안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뉜다. 무안군은 전라남도에 속하게 된다.
1897년 9월 12일에는 무안군이 무안부(務安府)로 승격된다. 1897년 10월 1일에는 목포항이 개항하고 일본 영사관과 해관이 들어 선다.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수립 선포된다.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은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국이다.
무안현의 현감은 185명이 확인된다. 지방 수령의 명단은 선생안이라 읍지류에 도임과 이임일, 이임사유, 문무관 여부 등이 기록된다. 무안현 선생안은 『전라남도 무안부읍지』(1899년, 奎10808)에 선생안이 있다. “허계영 계해년(1623년) 4월에 도임하여 동년 12월에 장계로 파직되었다(許啓榮 癸亥四月日到任同年十二月日啓罷)”는 기록이 처음에 나온다.
이처럼 무안현의 수령은 1623년 이후부터 확인이 된다. 『면성지』(1924년)에는 1623년 허계영 현감 이전의 현감으로 나자강(羅自康), 나창(羅昶), 서옥(徐沃), 전응정(全應禎, 1578년(선조 11) 2월), 채우령(蔡禹齡, 1598년(선조 31) 3월), 백홍남(白弘南)을 추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을 포함하면 조선시대에는 175명, 대한제국기에는 10명이 된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1474년(성종 5) 4월 권열(權挒), 1476년(성종 7) 7월 최여정(崔汝貞), 1485년(성종 16) 10월 유천(柳阡), 1510년(중중 5) 10월 유옥(柳沃), 1544년( 중종 39) 7월 이의번(李依蕃), 1573년(선조 6) 4월 금응하(琴應夏), 1597년(선조 30) 정홍록(丁弘祿), 1599년(선조 32) 9월 홍제(洪霽), 1604년(선조 37) 4월 이직(李稷), 1607년(선조 40) 4월 이정경(李禎慶), 권경중(權景中), 1610년(광해군 2) 12월 백흥남(白興南), 1614년(광해군 6) 9월 안용(安瑢), 윤보벽(尹輔璧) 등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안현 명환조에는 권렬(權挒)과 유옥(柳沃)이 나온다.
문집류 기록을 보면 1522년(임오) 김애(金璦)(이현일, 「고조고 울진현령 부군 갈음기(碣陰記)」, 『갈암집(葛庵集)』), 박유(朴榴)(허목, 「박평산(朴平山) 묘갈」, 『기언』 제19권)가 무안현감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1623년 이후 기록에 나오는 무안현감 가운데 1626년(인조 4) 1월 이익(李益)은 『전라남도 무안부읍지』(1899년) 선생안에는 나오지 않는다.
무안현감 가운데 행적이 드러난 이들을 살펴 보자. 권렬(權挒)은『신증동국여지승람』 무안현 명환조에 “성화(成化) 연간 초기에 정사를 잘 하기로 이름났으며, 지평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실록』(1474년(성종 5) 4월 3일(정사))에는 “원상(院相)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 무안현감 권열(權挒)은 신진 인물이어서 신(臣)은 사실 그 사람됨을 모르오나 다만 들으니 고을을 다스린 업적은 전 도(道)에서 제일이라고 합니다.”라 하여 재임시의 뛰어나 행적을 평가하는 기사가 있다.
다음 날 기사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게 하서하기를, ‘도내의 무안 현감 권열과 화순 현감 권철영은 전세(田稅)를 감수(監收)하면서 공리(貢吏)의 비행을 금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그 직위(職位)를 파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들으니 정치를 잘해서 읍민(邑民)들이 혜택을 입고 있다 하므로, 특별히 관대하게 처리하여 파직하지 않는 것이니, 경(卿)은 이 뜻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욱 노력하도록 하게 하라.”고 하였다.
권열은 1476년(성종 7) 7월 1일(임인)에 통덕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는데, “권열은 무안 현감으로 치적이 뛰어나기 때문에 차서를 뛰어넘어 제수되었다.”고 하였다.
유옥(柳沃, 1487~1519)은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09년 홍문관 수찬을 거쳐 1510년에 무안현감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무안현 명환 신증조에 “유옥은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무안현감 재임 때 담양부사 박상(朴祥, 1474~1530), 순창군수 김정(金淨, 1486~1521) 등과 연명으로 단경왕후(端敬王后 : 中宗妃)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고, 아울러 신씨를 폐위시킨 훈신(勳臣)들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작성했던 곳은 지금의 전북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산에 있는 삼인대(三印臺)이다. 세 사람이 각자의 관인(官印)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삼인대는 대의를 지키려는 선비 정신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 뜻을 기리고자 1744년(영조 20)에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 등 순창의 선비들이 주도하여 삼인대비를 세웠다. 비문은 도암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썼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제27호)이다.
이의번(李依蕃)은 무안 현감 재임 때 “구언(求言)하는 분부에 따라 상소하였는데, 첫째는 변방을 채우는 데에는 장정이 많은 집으로 하지 말고 죄가 있는 자로 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수ㆍ육군(水陸軍)의 경중을 고르게 하라는 것이었다.”는 기록이 『중종실록』(1544년(중종 39) 7월 14일(신해))에 있다.
백흥남(白興南)은 전라도관찰사 윤휘(尹暉)가 포상할 것을 아뢰어 옷감 한 벌을 하사받았다.
유계(兪棨, 1607~1664)는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46년 무안현감이 되었다. 유계는 당대의 명사로 무안현감 재임동안 사기를 진작시켰고 교유했던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졸탄(拙灘) 김권(金權, 1549~1622)을 제향하는 송림서원을 건립하였다.
김권은 1617년 광해군의 폐모를 반대하는 상소를 울렸다가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송림서원은 1682년(숙동 8) 사액되었고 1706년(숙종 32)에는 유계가 배향된다.
유계는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여사제강(麗史提綱)』, 『가례원류(家禮源流)』, 『강호문답(江湖問答)』 등의 저술이 있다.
황익재(黃翼再, 1682~1747)는 상주에서 출생하여 옥천에서 성장하여 1701년(숙종 2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예조좌랑을 지냈다. 전라도도사, 무안현감, 순천부사 시절에는 위정자로서 빈민들을 구휼하고 훌륭한 교육정책을 펼쳐 관민(官民)으로부터 공통된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1709년(숙종 35) 전라도사에 재임 때 조세의 조운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엄격히 단속하였다.
1711년(숙종 37) 1월 무안현감으로 도임하여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전라도 감진어사 홍석보(洪錫輔)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주달하여 포상이 내려지고, 나주 조군의 통솔권을 받았다.
1712년에는 양사재(養士齋)를 세워 과거 응시자의 교육에 힘썼다. 양사재는 숙종대부터 각 군현에 건립되기 시작한 교육기관이다. 이 무렵 증가하기 시작한 교생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는 향교와 서원의 대안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황익재 현감의 양사재 건립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양사재 절목(養士齋節目)」, 「논 읍폐 구조[又論邑弊九條]」 등이 그의 문집인 『화재집(華齋集)』에 실려 있다.
* 무안군사(2023) 역사편 조선시대에 실린 글
무안현 선생안 - 『전라남도 무안부읍지』(1899년, 奎10808)
1587년 10월 16일에 선조가 최호를 중직대부 행무안현감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고신[교지]. [敎旨/崔湖爲中直大/夫行務安縣/監者/萬曆十五年十月十六日/[印]] 고신은 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자격, 토지 및 노비 등을 하사하면서 그 증표로 내려주는 문서이다. 현감은 동반 종육품 외관직이고 중직대부는 종3품 상계이다. 이처럼 관직보다 품계가 높을 때 행(行)을 앞에 붙인다. (집필자 : 유연성,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 / 원소장처 : 군산 개정 경주최씨 최환식, 현소장처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1588년 4월 13일에 선조가 최호를 통훈대부 행무안현감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고신[교지]. 최호는 1587년에 이미 행무안현감에 임명되었고 이 교지는 품계를 올려주는 교지이다. 통훈대부는 정삼품 동반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며, 정삼품의 하계로서 통정대부보다 아래 자리이다. 승급의 사유는 사가(仕加)이다. 사가는 조선시대의 인사관리의 한 방법으로 관원이 근무한 일수인 사(仕)를 계산하여 그 자급(資級)을 올려주거나 자리를 옮기도록 할 때 일정한 공로 등에 의해 그 사를 더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황익재의 양사재절목(부분)(『화재집』 권6 ; 한국고전종합DB)
『무안군사』 5권[3,324쪽], 2019.11~2013.12. 역사와 지리(1권, 848쪽), 문화유산과 관광자원(2권, 440쪽), 삶과 문화(3권, 640쪽), 무안을 빛낸 인물(4권, 456쪽), 무안의 자료(5권, 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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