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22
나주목사 정지호의 선정-治道古梁, 새로 확인된 금학헌(琴鶴軒) 장서인
김희태
나주 지방관으로서 글을 남긴 정지호(鄭之虎, 1605~1678)는 현감으로 부임하여 목사로 재임하는데 「금강에서 배를 타다[舟錦江]」, 「고막원[古幕院]」, 「빗속에 배를 타고 금강을 내려가다[雨中舟下錦江]」는 시를 남긴다.( 『무은선생문집』)
「금강에서 배를 타다[舟錦江]」는 시에서는 “우연히 나그네로서 성 시장에 들어와서[偶然爲客來城市]”라 하여 실제로 성시(城市)를 방문하는 내용이 보인다. 현장 확인과 여론 수렴, 나주인과의 소통이 아닐까 싶다. 이어 “늙은이는 즐겁게 해변가에서 농사를 짓고[白首甘爲海畔耕]”라 한 구절은 수령칠사 가운데 ‘농상성(農桑盛)’과 연관될 것도 같다.
정지호는 1650년(효종 1) 12월 금성현감으로 부임한다. 나주목이 금성현으로 강등된 때는 1645년이다. "나주의 주리(州吏) 등이 목사에게 중상을 입혀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錦城)이라 하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 하였다.”(『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 7월 11일 경신)
정지호는 현감시절 전라감사의 계문에 따라 국왕의 돈유문(敦諭文)을 받고 표리일습을 하사받는다. 돈유문의 내용이다.
지금 본도 감사 심택의 장계를 보니 네가 부임한 뒤로 직무에 전념하고 청렴결백으로 자처하며 아랫사람을 대함에 성의로 대하고 여러 가지의 오래된 폐습을 적의 조치하여 이속과 백성들이 스스로 두려워하고 감히 속이지 못하며 지금까지 삼년, 온 고을이 태평하고 옛날의 문란한 습속이 지금은 착한 땅속으로 변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반근이인(盤根利刃)의 분별이라 하겠다. 또한 학교와 군정(軍政)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의하여 권장하고 전세(田稅)와 공급(貢物)은 비록 바루어졌다고는 하나 일정하게 바치는 공물이 허다한데도 상납하는 물품을 하나 흠궐한 것이 없었다. 금년 봄의 빈민구호에 있어서도 스스로 비축하였다가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며, 크고 작은 행정을 다 잘 처리하여 백성들이 칭송하고 명성이 자자하니 나라를 위하여 직무를 다한 것 매우 가상하다. 특별히 표리 일습을 하사하니 수령하라.(「돈유문」, 임진[효종 3, 1652] 7월 12일, 『무은선생문집』)
내용에 “반근이인(盤根利刃)의 분별”이라 하였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은 예리한 칼날처럼 높은 경륜과 명석한 지혜로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정지호는 수령칠사를 잘 처리하였고, 결국은 나주목으로 다시 승격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이 보다 앞선 1650년(경인) 연보에도 “문장을 권장하고 문학이 성취되었고, 흉년이 들어 주리는 백성이 많음에 월봉을 덜어 구제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1652년(임진) 연보에 “금성임지에 있으면서 흉년으로 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니 감사가 조정에 진달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돈유문을 내리고 표리 일습을 하사하였다.”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선정의 결과인지, 1654년(효종 5) 1월 6일 금성현이 나주목으로 승격 복호되었고 전남도는 다시 전라도가 되었다.
금성현감 정지호를 승격하여 나주목사로 삼았다. 전남도 관찰사 심택은 전라도 관찰사로 하였다. 전남도 도사 구음은 전라도도사로 하였다.[陞錦城縣監鄭之虎爲羅州牧使, 全南道觀察使沈澤爲全羅道觀察使, 全南道都事具崟爲全羅道都事](『승정원일기』 130책 (탈초본 7책) 효종 5년[1654] 1월 6일 )
정지호 재임시 세운 사마교비(駟馬橋碑)는 앞면에 ‘駟馬橋’ 세 글자가 상단에 횡서되고 그 아래 작은 글자가 종으로 새겨져 있으나 일부만 판독이 된다. 뒷면은 가운데에 ‘聖壽天長 鴻圖地久’가 있고, 첫줄에 ‘…行縣監鄭公諱之虎…’라 새기고 다음 줄부터 4언의 찬문이 있다. 오랜 세월 탓에 일부 글자만 확인되는데, ‘使君之功[사군의 공덕이요]’, ‘伐石銘德[돌을 깎아 덕을 기리고]’, ‘治道古梁[도로와 옛다리를 수리하고]’, ‘重修[다시 고치고]’ 등이 보인다. 정지호의 치적과 사마교 수리 등에 대한 내용이다. 끝줄에 1653년(효종 4) 8월 15일의 연기[順治十年 八月 十五 日立]가 새겨 있다. 그리고 호장(戶長) 임재□(任在□) 등이 새겨져 있다. 건립을 주도한 이들로 보인다. 탁본조사(나주문화원, 『나주의 금석문』)를 하여 몇 글자는 더 읽어냈다. 디지털 판독, 3D조사 등 보다 확장된 조사가 필요하다.
미수 허목이 지은 정지호의 묘비명에 “이듬해인 효종 원년(1650)에 나주 목사로 나갔다. 5년 동안 치적이 뛰어나 상이 이를 가상히 여겨 표리(表裏)를 두 번 하사하였고 구마(廐馬)를 한 번 하사하였다. 임지에서 돌아오게 되자 백성들이 공을 그리워하여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 유애비는 현재 나주목 객관 금성관 경내에 있는 <목사 정후지호 자혜선정비(牧使鄭侯之虎慈惠善政碑)>를 말한 것이리라.
한편, 정지호 소장인이 있는 『황산곡집(黃山谷集)』이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금학헌(琴鶴軒)”이라는 소장인도 함께 있어 주목된다. 금학헌은 나주목의 내아인데, 정지호가 나주목사로 재임시 소장한 도서이고 “금학헌”이라는 소장인이 그 당시인지,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난 뒤 일종의 아호로 금학헌을 썼는지 등 검토가 필요하다.
이 책의 산곡내집시주(山谷內集詩註) 2책 제2권 수제면에 “동래세계(東萊世係)”, “정지호인(鄭之虎印)”, “자피(子皮)”, “무은(霧隱)”, “금학헌(琴鶴軒)” 5개 소장인이 있다. 동래는 정지호의 본관이며 자피는 자, 무은 호이다. 금학헌은 별호로 보인다.
『황산곡집』은 중국 북송의 시인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문집이다. 『황산곡집』은 39권 15책으로 卷首題는 山谷內集詩註, 山谷外集詩註, 山谷別集詩註이다. 1155년(紹興乙亥) 許尹의 서문이 있다.[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정지호가 받은 「돈유문」은 “선현들의 시문속에서 나주를 읽다(나주문화원, 2021)” 조사 목록에서는 빠져 있다. ‘나주’나 ‘금성’, ‘벽오헌’ 등 지명이나 용어로 검색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실제 현장 자료가 남아 있는가 더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만영(金萬英, 1624~1671)의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에 칠언율시 ‘酬鄭使君(之虎)見寄’, 나위소(羅緯素, 1582~1666)의 『송암유집(松岩遺集)』에 ‘與龍洞書齋鄭子皮(之虎)共吟’ 등 나주인과의 교류시가 보인다. 하여 자료찾기는 이어진다.
<무은 정지호 금성현감-나주목사 연보>(무은선생문집))
〇경인(1650) 선생 46세. 10월 18일 금성현감에 임명되었다.[이에 앞서 나주목사가 강등되어 금성현감이 되었다.] 나주는 암읍이라 옛날부터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왔다. 선생이 부임한 뒤 문장을 권장하여 문학이 많이 성취하였다. 또 흉년이 들어 주리는 백성이 많음에 월봉을 덜어 구제하니 아전이 왜경하고 온 고을이 안도되었다. 감사가 조정에 진달하여 임금이 표리 일습과 말을 하사하였다. 이해에 아들 행일이 사마사에 합격하였다. [庚寅 先生四十六歲 十月十八日 拜錦城縣監(先時羅州牧使降爲錦城縣監)羅爲巖邑素稱難治先生勸獎文學多所成就歲大饑損月廩賑救活吏畏民愛一境安[案]堵道臣 啓達 上賞賜表裏一襲及廐馬 是歲行一中司馬榜.]
〇신묘(1651) 선생 47세. 금성 임지에 있었으며 이해에 또 큰 흉년이 들었다. [辛卯 先生四十七歲 在錦城任所 是歲又大饑.]
〇임진(1652) 선생 48세. 금성임지에 있으면서 흉년으로 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니 감사가 조정에 진달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돈유문[관리들을 권면하는 임금의 말/문집 소재 임진.7.25]을 내리고 표리 일습을 하사하였다. [壬辰 先生四十八歲 在錦城任所 竭力賑恤道臣 啓達 上甚嘉之下敦諭文又 賜表裏一襲.]
〇계사년(1653) 선생 49세. 가을에 외구 봉사 박공의 상고를 당하였다. [癸巳 先生四十九歲 秋遭外舅奉事朴公之喪.]
〇갑오년(1654) 선생 50세. 정월 초6일 나주목사로 승진하였다.[이때에 나주목으로 복귀되었음] 12일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甲午(1654) 先生五十歲 正月初六日 陞羅州牧使(至是羅州牧復號) 十二日解官歸.]
사마교비 - 治道古梁(도로와 옛 다리를 수리하고) ‘古梁’은 사마교일 듯
돈유문(무은선생집)
정지호 연보(무은집)
정지호 자혜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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