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326
무안 청계 도림리 입석마을과 현감 선정비명 선돌, 1685년
김희태
縣監金侯日省恤民善政/碑/康熙乙丑六月 日
[무안] 현감 김후일성이 현민을 구휼하고 선정한 것을 [기념해 새긴] 비 / 1685년 6월 일
초가을이라 해야 할진데 더위는 여전하다. 무안 청계면 도림리, 그 ‘선돌’을 다시 찾는다. 2023년 9월 7일 해 떨어질 무렵. 1980년대 초에 보았으니 훌쩍 40년이다. 목포대학교 정문 입구 옛 ‘통대사’ 주변. 지난 해도 그 일대를 두리번 거렸지만 찾지 못했다.
2023년 9월 7일 석양을 등지고 ‘무안현감 선정비명’ 입석을 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길가 담벼락과 맞닿아 사람 키 보다는 훨씬 큰 선돌[입석]’, ‘윗부분은 머리처럼 된 형상’, ‘선돌 면에는 현감의 선정비 암각’, ‘그 현감의 이름은 김일성’. 이 정도는 기억해 냈다.
다시 찾아 보니, 예전의 기억보다는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학가의 상징이라 할 ‘원룸촌’의 한 가운데 보호책을 둘러서. 지상 부분이 사람 키만 하고, 움푹 들어간 부분 1미터 50쯤. 대략 3미터가 넘는다. 머리형상도 보이고 암각자도 있다. 몇 번이고 바라보니 글씨가 읽어진다. 저 내용이다.
무안부읍지(務安府邑誌)(1899년)에 “김일성 : 갑자(1684년, 숙종 10) 7월 일 도임, 무진(1688년 숙종 14) 2월 일 나파(金日省 甲子 七月 日 到任 戊辰 二月 日 拿罷)”의 기록이 있어 1684년 7월~1688년 2월 사이 재임하였고, ‘나파’되었다는 내용이다. ‘나파(拿罷)’는 나문파직(拿問罷職)으로 죄를 범한 관리를 잡아다가 신문하고 파직하는 것을 말한다. 선정(善政)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임명과 재임과정 자료를 찾아 보자. 김일성은 1684년(숙종 10) 2월 9일(을사)에 무안현감에 제수된다. 『일성록』 1월 12일 기록에 예조정랑 김일성의 태거(汰去)를 윤허한다는 기록이 있어, 예조정랑을 지내다 해임되었다가 다시 무안현감이 된 것 같다.
1684년 3월 10일에는 문겸(文兼)에 제수된다. 문겸은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을 말하는데, 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임한 사람의 칭호이다. 6품관으로, 정원 5명 중 2명은 상임(常任), 3명은 다른 관서에 있으면서 이름만 선전관청에 두었다. 선전관은 왕의 시위(侍衛) ·전령(傳令) ·부신(符信)의 출납 등을 맡아 보았다.
1684년 4월 19일 기록에는 낭청(郞廳) 김일성(金日省)과 이세성(李世晟)에게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을 사급하라는 비망기가 있다. 상현궁은 품질 상급의 현궁인데. 현궁은 시위를 얹은 활을 이른다. 무언가 뛰어난 행적이 있어 격려를 받은 듯 싶다.
1684년 5월 25일(경인)에는 사은(謝恩)을 하고 6월 19일(계축)에는 하직(下直)을 한다. 관리들은 하직을 하고 도임하면 임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무안부읍지』(1899년)에는 1684년 7월 도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기의 시작을 도임부터로 본 것이다. 2월 제수받아 5개월만에 부임을 한 것이다.
김일성이 무안현감 재임 시, 보통의 지방관이 그러하듯이 ‘수령칠사’에 힘썼을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행적은 앞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록상으로 두가지가 확인된다. 그 하나는 저 암각 선정비를 새긴 ‘1685년 6월[康熙乙丑六月 日]’ 기록. 다른 하나는 ‘1688년 2월 나파[戊辰二月日拿罷]’ 기록이다.
재임중에 선정비 암각문을 새겼고, 1688년 2월에는 나문 파직되었다는 것이다. ‘나문 파직’은 무언가 죄가 있었던 것을 말한 것 같고, 시기로 보아 재임중 파직되어 ‘선정(善政)’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 ‘나문 파직’의 전말은 『비변사등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비변사등록』에 어린이를 군역에 보충[兒弱充定]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영암[이태룡(李台龍)]·무안[김일성(金日省)]·함평 등 3읍의 수령을 구속 조사하여 죄를 무겁게 처단할 것을 청하는 비변사(備邊司)의 계(啓)를 윤허하는 기사가 있다.[1688년(숙종 14년) 02월 20일(음)조] 그 일부를 보자.
“아뢰기를 "어제 조보(朝報)에 난 병조의 계사를 보니, 삼남의 수령들이 어린이를 군역에 보충한 일 때문에 각도 병사(兵使)의 점검(點檢)을 거쳐 보고한 뒤 장형(杖刑)을 집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암군수 이태룡(李台龍)과 무안현감 김일성(金日省)은 본 고을에 원래 어린이로 보충한 사실이 없다고 하여 병사가 순회할 때에 한정(閑丁)으로서 군역에 보충이 된 자를 모아 대기시키지 않았고, 함평현의 경우는 장부로 보고된 것 가운데 1백 5명이 점검에서 빠졌습니다.”
『승정원일기』 에도 아약충군역(兒弱充軍役)을 조사하기 위해 병사(兵使)가 순행할 때 아역충정(兒弱充定)이 없다고 정역자(定役者)를 모아 대기하지 않은 영암·무안·함평 등의 수령을 나문 정죄(拿問定罪)할 것을 청하는 승정원과 비변사의 계가 있다.[1688년 02월 20일과 21일(음)조]
아약(兒弱)은 6세 이상 14세 이하의 아이를 말한다. 아약을 군역에 충정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각 읍의 수령들이 불법으로 충정하여 폐단이 되었다.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어린 아이를 충정[兒弱充定] 한 경우 수령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하고, 색리(色吏)는 도년(徒年)으로 정배한다. 충정한 인원이 10명 이상이면 수령은 도년으로 정배하고, 감관과 색리는 전가사변[全家入居]에 처한다.”고 하였다. 1681(숙종 7)부터 적용하는 조항이다
이처럼 무안 현감 김일성은 1684년 7월 도임하였다가 4년째가 되던 1688년 2월에 “어린 아이를 충정[兒弱充定] 한 죄”로 파직이 된다. 재임기간은 3년 7개월이다. 김일성은 무안 현감 부임 전인 1684년 4월에 낭청(郞廳) 직임으로 상현궁(上弦弓) 1장을 사급받는 기록이 있고, 지방관의 본분이 ‘수령칠사’ 장려임을 고려한다면 무안현감 재임 때의 ‘선정’과 관련한 사항이 있을 법도 하다. 앞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따로 빗돌을 마련하지 않고 입석에 새긴 점, 무안현 읍치와 떨어진 일서면 지역인 점 등도 탐구해 볼 일이다.
다만, 선정비명의 연기가 1685년 6월임으로 부임 1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다. 재임중에 선정비명이 새겨진 것이다. 수령의 선정비 건립은 그 이전부터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1560년(명종 15 경신) 10월 4일(병신) 조강에서 대사헌 오겸이 뇌물 등으로 고관의 환심을 사서 선정비를 세우는 수령의 폐단을 아뢰기도 한다. 다음 내용이다.
“근래에 공도가 날로 없어져 허위가 풍조를 이루었습니다. 일찍이 수령(守令)들이 선정을 베푼 것 때문에 비를 세우는 일을 보았습니다. 선정을 베푼 수령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혹은 품관(品官)과 교제를 맺고 술로 환심을 사서 드디어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되며 심지어 부역(賦役)을 면제해주고 관물을 뇌물로 주어 은혜를 파는 곳으로 삼는데 품관은 은혜에 감격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부려서 비를 세워줍니다. 과연 잘 다스린 실효가 있다면 감사가 계문하고 해조가 핵실한 연후에 비록 한마디 칭찬하는 말로 유시하더라도 역시 은총이 되는 것인데 교묘한 꾀로 이름을 낚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선정비는 건립이 결정되면 유림과 각 면(面) 약정(約正) 회의를 통해 감관(監官)‧도정(都監) 선정, 경비 확보, 석수‧각수 고용, 비문 내용 및 찬자(撰者) 지정, 제막 등 제반 절차를 논의한다. 가장 중요한 입비전(立碑錢) 마련과 석재 운반은 각 면에 분정하였다. 그런데 입비전 마련과 각 면 분정이 또 다른 폐단을 낳기 때문에 선정비 금지령까지 내려지기도 한다. 김일성 무안현감 선정비명은 선돌에 새겼고 글자 수가 많지 않음으로 조금 다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준비에서 건립까지는 인력과 물자가 들어 갔을 것이다.
수령칠사는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현감 재임중 선정비 건립은 부역균(賦役均), 아역충군역(兒弱充軍役)은 군정수(軍政修)를 각각 어긋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1640~?)의 자는 척연(惕然), 본관은 안동(安東[舊]), 거주지는 니산(尼山), 생년은 1642년 (인조 20)이다. 부친은 김적(金績), 조부는 김삼함(金三緘), 증조부는 김덕재(金德載), 외조부는 황정구(黃廷耉), 처부(妻父)는 조공식(趙公湜)이다. 1666년(현종 7 병오) 생원시에 합격하고 1675년(숙종 1 을묘)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다. 병과 9위[19/34]이다. 괴산군수, 병조정랑, 예조정랑 등의 관직이 확인된다.
이 선정비명은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무안군의 문화유적』(목포대박물관, 1986),『문화유적분포지도』(목포대박물관, 2006), 『무안의 문화유적』(무안문화원, 2006) 등에 입석[선돌], 칠성바우, 미륵바우, 현감 선정비로 소개되고 있다.
이 선정비명은 『문화유적총람』(문화재관리국, 1977), 『무안군의 문화유적』(목포대박물관, 1986),『문화유적분포지도』(목포대박물관, 2006), 『무안의 문화유적』(무안문화원, 2006) 등에 입석[선돌]. 칠성바우, 미륵바우, 현감 선정비로 소개되고 있다.
『문화유적총람』(1977)에는 “도림리 입석 - 높이 3m로 옛날에 관직(官職)에 있었던 사람이 마을 경계선(線)을 표시하려는 목적으로 세웠다고 전한다.”는 내용이고 소재지는 도림리 433번지로 나온다. ‘입석’은 형태를, ‘관직’ 운운은 선정비명과 관련있어 보인다.
청계면은 1914년부터 사용한 지명이다. 일서면(一西面)과 이서면(二西面)을 합하여 청계면이라 하였는데, 일서면에 있던 청계리(淸溪里)의 지명에서 따서 면 이름을 삼은 것 같다. 1914년 당시 일서면과 이서면은 목포부에 속했는데,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무안현 지역이었다. 1895년 윤5월에는 나주부 무안군, 1896년 8월에는 전라남도 무안군, 1897년 9월에는 전라남도 무안부가 된다. 1903년 무안군이 되었다가 1906년 무안부,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무안군 청계면이 된 것이다.
지금의 입석마을은 일서면에 속했는데, 『호구총수』 무안 일서면조에는 45개 마을 땅이름이 나온다. 1914년에 일서면의 도림동(道林洞) 청림리(靑林里) 양치촌(良芝村) 삼덕리(三德里) 대흥리(大興里) 대암동(大菴洞)과 격양동(格良洞) 일부 등 7개 마을이 합해져 도림리(道林里)가 된다.
‘입석(立石)’ 지명은 1928년부터 쓴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목포대학교 정문 옆에는 승달산 자락의 안골과 물맞이고랑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었는데,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다리를 놓게 되어 ‘입석교’라 했고, 이후 그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입석마을’ 또는 ‘선돌마을’로 불려졌다(『무안이야기』).
입석마을은 행정 편제로 도림6리인데 2000년에 도림1리에서 나뉜 것이다. 그런데 이 ‘입석’이나 ‘입석교’ 지명은 저 선정비명이 있는 ‘입석’에서 유래한 것 같다. 1928년 입석교 건립 이전에도 ‘입석’ 땅이름은 확인된다. 1911년께 정리한 것으로 보고 있는 『조선지자자료』 목포부 일서면조에도 주막명(酒幕名)으로 입석점(立石店)이 보인다. 승달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을 건너 목포로 이어지는 길목에 사람이 오가면서 쉬었고, 주막이 생겼고, 그 길로 신작로 국도1호선이 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주막 ‘입석점’은 어쩌면 조선후기 무안현지도(1872년) 일서면의 대로 가에 있는 ‘주점(酒店)’이 아닌가 싶다.
이 ‘선정비명’을 자세히 본 것은 9월 7일이다. 2학기 시작하여 오전에 1강을 마치고 장흥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개강에 맞춰 사학과 교수와 강사 간담회 겸 식사를 한다는 모임이 있다기에 다시 학교로 왔는데 1시간여 여유가 있어 석양을 등지고 읽어 본 것이다. 그리고 ‘마을’과 ‘시군-군현’ 관련 글을 엮어 보려 했다. 그 하나가 무안 청계면 도림리 선돌마을의 무안현감 선정비명 입석이다.
그날 모임에서는 ‘사학과’가 2024년부터는 ‘인문콘텐츠학부 역사콘텐츠전공’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대한 논의가 오갔다. ‘인터넷’과 ‘콘텐츠’ 시대. 사학과 출신의 학인으로서는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가 많다. 앞서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시대적응’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이라.
2학기 맡은 과목은 ‘마을사와 시군단위 역사’. 목포대학교 대학원 한국지방사학과 박사과정. 네분 학우들과 마을사, 시군지, 향촌사, 군현, 영진보 등 관련 논문 36편을 읽고 토론했고 전북 부안군의 부안현감의 글씨라는 암각문을 답사하였다. 일정을 서로 맞춰가면서 나주 고려 어향 학술대회(10.20), 부안 홍재일기와 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10.26), 고흥 월파 서민호와 죽산재 학술대회(11.23), 중세바다에서 펼쳐진 남도인의 위대한 여정 학생 학술심포지움(11.09), 강진 영모당과 추원당 학술대회(11.23)를 참관하였고, 발표문 중 일부는 읽고 토론도 하였다. 모두에게 감사한다.
지나는 학생에게 부탁하여 크기를 맞추어 보다. 지상으로 드러난 부분이 180cm 가량, 밑부분은 150cm 내외인데 왼쪽 편에 3행의 명문이 있다.
선돌마을 칠성바우(무안군의 문화유적, 1985)
지금의 무안군 청계면은 조선시대의 무안현 일서면과 이서면이 1914년 합해지면서 부르게 된 합성지명이다. ‘현감선정비명’ 선돌이 있는 도림리 6리 입석마을은 일서면에 속했다. 굵은 붉은색 선은 목포에서 무안을 잇는 도로이며 가운데쯤 삼거리 길의 집 모양 건물이 보이는데 '주막(酒幕)'이라 표기하였다. ‘선정비명’ 입석이 있고 승달산 물길이 흘러내리는 곳이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쉬어가는 '주막'이 들어 섰고, 이 길이 국도 1호선이 된다.(무안현지도, 1872년, 규장각 소장)
조선지지자료(1911년, 국립중앙도서관) 목포부 일서면의 주막명 ‘입석점(立石店’.
부안현감 박시수의 글씨로 알려진 봉래동천(蓬萊洞天) 암각서. 박시수(朴蓍壽, 1767~?)는 1784년(정조 8)에 실시된 갑진 정시(甲辰庭試)에 급제하였고, 1810년(순조 10) 12월 18일~1813년(순조 13) 4월 14일 사이 부안 현감을 지냈다. 재임 중 부안 관아 앞 진석루(鎭石樓) 반석에 초서체로 남긴 한 글자당 200㎝ 정도의 초대형 글씨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239-10번지 부안군청사 뒤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
부안현감 선생안(박시수 - 경오 12월 18일 부임,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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