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15 - 강진 남강사 주자갈필 목판, 경재잠(敬齋箴)과 대우수전(大禹手篆)

향토학인 2023. 10. 25. 00:05

인지의 즐거움315

 

강진 남강사 주자갈필 목판 일괄

 

김희태

 

강진 남강사 주자갈필 목판 일괄은 모두 43판으로 주자갈필(朱子葛筆) 경재잠 25, 대우수전(大禹手篆) 4, 기타 14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1987.06.01. 지정)되어 있다.

 

이 목판은 1809(순조 9)년 성자포(星子浦, 星子津) 앞에 떠 내려온 목궤에 주자의 경재잠(敬齋箴)목판과 대우수전(大禹手篆)목판이 나와 당시 강진현감이 감영에 보고하고 보내는데 수송 인마가 남강사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남강사에 보존시켰다고 한다. 성자진은 우암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 시에 출항하였던 백련사 인근의 나루이다.

 

유학자들의 일상적인 행동지침, 경재잠

 

<경재잠>440160자로 이루어진 일종의 잠언으로, 유학자들의 일상적인 행동지침을 담고 있다. 서판(書板)은 특별한 판식 없이 한판에 전후면 4자씩 <경재잠> 내용이 판각되어 있다. 서체는 매우 굳세고 엄정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전형적인 주자의 필법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중국에서 입수된 탁본을 번각한 것으로 보인다. 원각판모각판개수판 등으로 3번 정도 개수하였다. 판각상태에 따라 주자갈필서판 25판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正其衣冠 2) 尊其瞻視 3) 潛心以居 4) 對越上帝 5) 足容必重 6) 手容必恭 7) 擇地而蹈 8) 折旋蟻封 9) 出門如賓 10)承事如祭 11)戰戰兢兢 12)罔敢或易 13)守口如甁 14)防意如城 15)洞洞屬屬 16)罔敢或輕 17)不東以西 18)不南以北 19)當事而存 20)靡他其適 21)弗貳以二 22)弗參以三 23)惟精惟一 24)萬變是鑑 25)從事於斯 26)是曰持敬 27)動靜無違 28)表裏交正 29)須臾有間 30)私慾萬端 31)不火而熱 32)不氷而寒 33)毫釐有差 34)天壤易處 35)三綱旣淪 36)九法亦斁 37)於乎小子 38)念哉敬哉 39)墨卿司戒 40)敢告靈臺

 

원각판(10): 성자진에서 1809년 발견되기 전에 새긴 원판

(1,2) (3,10) (4,9) (6,7) (17,×) (18,21) (19,20疑板) (27,28) (31,32) (35,36)

 

전승기록에 따르면, 주자갈필20판과 대우전서판 8판 등 모두 28판이 1809년에 성자진에 래도하여 이를 수습하여 공청(公廳)에 보관해 오다가 남강사에 옮겼다. 이 기록을 따른다면, 원각판은 늦어도 1809년 이전에 판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각판(9): 관노에 의해서 불태워 없어진 것을 1844년에 조철영이 복원한 판.

(8,25) ([11,12],26) ([12,13],29) ([13,14],30) ([14,15],30) (16,34) (22,37) (23,39) (24,40)

 

모각판의 전말은 광주목사 조철영(趙徹永)이 쓴 <우전주잠장판기(禹篆朱箴藏板記)>에 기록이 있다.

 

조철영은 진즉 주자의 <경재잠> 탑본 1부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 탑본이 어느 곳에서 찍어온 것인지를 모른 채 집안에 보장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42(헌종 8)년에 광주목사가 되어 우연하게 남강사의 원이(院貳)를 맡아 서원의 일을 관여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 탑본의 출처가 남강사에 보관되어 있는 서판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 향사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이 목판을 목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30년 전에 관노가 당시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서판 중 9판을 꺼내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던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다른 탑본에서 모각하여 빠진 판을 보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각이 끝나자, 원판과 함께 모두 남강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각판은 장판기(藏板記)가 쓰여진 1844(헌종 10)년에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각판(6): 1904년에 부식된 것을 김영순이 복원한 판.

(2,27) (5,31) (6,32) (20,21) (35,38) (36,)

 

서원철폐령(1868)으로 남강사가 훼철된 이후 1896년에 이르러 철폐령이 완화되자, 남강사 복설에 관한 논의가 유림의 발의로 제기되었다. 강당을 비롯하여 고직사, 내삼문, 영정 등이 중건되어, 1901년에 복원을 맞게 되었다.

 

이런 과정 중에 이곳에 보존되어 있던 서판들도 훼철 이후에 강진의 공청으로 이관되어 방치된 체로 습기에 부식되고, 벌레에 충식되어 대우서판 4판과 주자갈필 6판이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상태가 좋지 않아 개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후 사실은 당시 이일을 주관하였던 김영순(金瑛淳)1904년에 기록한 <갈필판개수기(葛筆板改修記)>에 상세히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개각판은 개수기가 쓰여 진 1904(고종 41)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우수전은 전설적인 황제인 하왕조의 개창자 우왕의 글씨라고 전한다. 우왕이 형산에 비석을 세우고 썼다고 한다. 형산 구루봉에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구루비(岣嶁碑)라고 한다. 전서를 공부하기 위한 법첩으로 많이 이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대우전(大禹篆)이라고 하며 홍수를 막은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평수토찬(平水土贊)이라고 한다.

 

1215년 하치(何致)가 형산을 유람하다가 탁본을 구했다고 한다. 하치는 그 내용을 장사의 악록산의 암벽에 새겨 놓았다. 대우수전 대부분 하치가 악록산에 새겼다는 글자를 탁본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실체가 불분명하여 위작이라는 의심이 많다.

 

비문은 모두 9행이고 글자의 수는 모두 77자이다. 현재 한국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낭선군 이우(李俁)가 가져왔다고 한다. 허균도 1606년 명에서 형산석각첩(衡山石刻帖)을 구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판수는 총 4판이다. 특별한 판식 없이 한 판에 2행으로 4자씩 배자되어 있으며, 판 크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략 가로 30에 세로 56정도이다. 자체는 전서해서체로 쓰여져 있으나, 상당수가 충식이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에 있다. <대우전> 4판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久旅忘家翼輔 2) 承帝勞心營知 3) 袞事興制泰華 4) 之定池瀆其平 5) 處水犇麓魚獸 6) 發形而罔弗亨 7) 伸鬱疏塞明門 8) 與庭永食萬國

 

이밖에 해자서판(楷字書板) 11판이 전존되고 있으나, 역시 충식이 심하여 전체 내용의 판독이 어렵게 되어있다. 또한 어필각(御筆閣)에는 사무사(思無邪)비례부동(非禮不動)어필액판 2판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영조대왕의 발문이 판각된 현판 1판이 걸려 있다.

 

전국적으로 희귀한 목판 출입 규정, 남강사 서판 전수규칙

 

남강사의 서판 전수규칙(南康祠 書板 典守規則)은 어느 서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출납규칙으로 매우 의미있는 자료이다. 당시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서판을 보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정되었다.

 

이 규칙은 당시 이곳 어필각에 보관되어 있는 유묵판을 강진 관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수령방백들의 부탁이라 하여 무시로 출납하는 일이 매우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김영순 등 8인의 원중 유생이 1906년에 공동으로 강진군수에게 건의문을 올리게 되었다.

 

이에 당시 군수는 장판각의 운영을 위한 기본 수칙을 마련한 <입규>를 본원에 내려 보내자, 남강서원의 원장이 원중 유생들이 마련한 세부적인 서원의 시행규칙인 <범규>를 제정하여 실행토록 하였던 것이다. <입규>5조목, <범규>8조목이다.

 

<입규(立規)> - 군수 제술

주자갈필 경재잠 20판과 우전 8판을 본원의 어필각 안의 동벽에 보장(保藏)하여 출납시에 반드시 신중할 것.

어필각의 자물쇠는 본사의 장의(掌議)가 교체할 때는 신임 장의에게 전해주어 타인이 함부로 개폐를 하지 말 것.

본 군이나 혹은 타군 관아 및 신사(紳士)들이 전현(前賢)의 보배로운 글씨를 앙모(仰慕)하여 인쇄를 요구하면 절대로 빌려주지 말고, 반드시 강구인으로 하여금 종이와 먹을 준비하여 장의에게 통지하면 장의가 문을 열고 목판을 꺼내서 인쇄를 허락하되, 반드시 사우 안에서 인쇄케 하고 마음대로 밖으로 들고 나가지 못하게 할 것.

신 장의와 구 장의 간에 자물쇠를 주고 받을 때는 갈필 판수를 반드시 조검(照檢)하여 혹시라도 누실(漏失)된 것이 있으면, 그 당시 장의는 중징계를 면치 못할 것.

매년 715일에는 정례적으로 포쇄(曝曬)하여 혹시라도 습기에 젖지 않게 할 것이며, 만일 장마비가 개지 아니하면, 그 달 안으로 택일하야 포쇄할 것.

 

<범규(凡規)> - 원장 제술

주자(朱子) 및 송자(宋子)의 생일기일과 삭망일(朔望日, 1, 15) 및 사명절(四名節)의 분향 때에 집강 4명 가운데 1명씩 참석한다.

원중에 특별한 공의(公議)가 있은 즉 집강이 향원(鄕員)을 회동케 하여 처리하되 그렇치 못하면, 론의할 사항을 들어 원장에게 품고하여 처분 결정한다.

도임(道任)과 향임(鄕任)이 불미한 일이 있으면, 원장에게 품고하여 교체한다.

원중에 혹시라도 원사 전곡(院祠 錢穀)을 불법 남용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법관에게 보고하여 징계 축출하고 벌칙을 부가하며, 또한 그 후손은 영원히 서원에 출입를 허락치 아니한다.

춘추의 향사 경비와 원사 곡수의 출입 장부는 매년 1212일에 수정한다.

향원 중에 혹 불효불제(不悌)하며 남을 해치는 말과 윤리에 어그러진 말을 한 무리들은 즉시 공론으로 법관에 보고하야 징치토록 한다.

노소 유림 가운데 충효와 학행이 특출한 사람은 별도로 공의를 거쳐 천양(闡揚)하고 포상토록 한다.

재임이라 일컬은 사람이나, 게으름뱅이 놈팽이들과 부동(符同)하여 일없이 무상(無常)으로 원사(院祠)에 출입하면 공론으로 처벌한다.

 

참고자료

전라남도·전남대학교 문헌정보연구소, 전남 서원의 목판, 1998.

전라남도, 남강사 주자갈필 목판 문화재 회의자료, 1987.

김희태·황호균 외, 강진군 문화재 해설도록, 강진군, 2020.

김희태, 전라도 지역의 주자 제향 서원의 현황, 2022년 주자학 학술심포지엄-화순 주자묘와 주자 제향 서원문화-, 2022.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