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강진 남강서원, 우암 송시열과 손재 박광일 배향
-송시열 종강지지 기록, 박광일의 백련사어록-
김희태
강진 남강서원(南康書院)은 주자와 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 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 1655~1723)선생을 배향한 서원으로 1804년(순조 4) 건립하였다. 처음에 남강사(南江祠), 남강사(南康祠)라 하다가 1953년에 남강서원이라 하였다.
남강사의 창건 유서는 우암 송시열(1607~1689)과 ‘기사환국(己巳換局)’에서 마련되었다. 기사환국은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송시열은 1689년 (숙종 15) 숙종의 왕세자 책봉 문제로 남인의 이현기(李玄記), 남치훈(南致薰), 윤빈(尹彬), 이익수(李益壽) 등과 대립하다가 결국 2월에 제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유배의 과정과 강진에서의 행적을 살펴보자.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元子)로 세우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이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며 반대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이 산림이므로 귀양은 보내지 않고 삭탈관작하였고, 송시열을 구원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상소에 대해, 집의 박진규(朴鎭圭)ㆍ장령 이윤수(李允修)를 필두로 비판이 이어졌고, 곧 제주로 유배되었다.
유배 행적은 손재 박광일이 정리한 「백련사어록(白蓮社語錄)」을 통해 알 수 있다. 박광일은 2월 18일께 선암(仙巖)에 도착한 우암 송시열을 맞이하여 강진 백련사에서 강론과 수창을 하는 2월 29일까지 기록을 남긴다. 선암은 광주에 있던 역이다. 광산현 서쪽 40리에 있었고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이다.
2월 19일 금성(錦城, 나주)에 도착하였고 영산강을 건너 죽두촌(竹頭村)에서 묵었다. 21일 불수원(不愁院), 22일 석주원(石柱院) 하촌(下村)을 거쳐 저녁때 강진에 당도하였더니 성(城)안이 시끄러우므로 포구 마을에 가서 묵었다. 24일 기해의례(己亥議禮)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이날 오후에는 만덕사로 향한다. 배를 구하여 수리하는 동안 물이 좋은 만덕사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는 고을 수령의 권고를 아우인 송시걸이 전하면서 청하자 이에 따른 것이다.
선생께서 바야흐로 물과 토양을 염려하셨다. 송 서산(宋瑞山)[선생의 아우 송시걸] 이 말하기를 “고을 사또가 ‘이 마을은 낮고 가라앉았으며 물맛도 지극히 좋지 않으니, 결코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다. 물맛은 오직 만덕사(晩德寺)가 좋으니, 배를 구하여 수리하는 동안 그 절에서 머무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는데, 그 말대로 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렇다.”라고 했다.((박광일, 「白蓮社語錄」, 『손재집』 제9권[한국고전종합DB]))
송시열과 박광일 일행은 만덕사로 들어서면서 동백나무가 난만하게 붉은 꽃을 피우고 있어 장춘동(長春洞) 경관을 실감한다. ‘만덕사백련사(萬德寺白蓮社)’, ‘만경루(萬景樓)’ 글씨를 감상하였다. 백련사에서는 강론을 하고 수창(唱酬)을 한다. 송시열은 『주자대전』·『주자어류(朱子語類)』·『격양집(擊壤集)』·「두 선생의 왕복 편지[兩先生往復書]」를 쌓아 놓고 사색에 잠겼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백련사어록」에 나오는 문생들과 수행한 일행을 보면 박광일, 수여 박중회(受汝 朴重繪), 송서구(宋敍九), 나중기(羅重器), 중화 안여회(仲和 安汝諧), 아우 서산 송시걸(瑞山 宋時杰), 손자 수찬(修撰) 송주석(宋疇錫, 1650~1692), 외손 권이진(權以鎭), 외손 윤주교(尹周敎) 등이다. 박광일은 백련사 강론에서 맹자(孟子)의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과 주역(周易)의 괘변설(卦變說)로 우암 송시열의 인정을 받았다.
2월 25일 강론은 「미발지중(未發之中)」, 「태극도설」 『중용』 수장(首章), 『대학』의 격물 등 여러 가지 주제로 하였다.
26일에는 스님이나 문생들에게 직접 글씨를 써 주기도 한다. 『주자어류』의 문구를 큰 글자로 써주었는데, 그 아래에 연월을 써줄 것을 요청하면 일일이 써 주었다.
승려 한 사람이 종이 두 장을 올리자 ‘서암의 승려가 또렷하도다[瑞巖僧惺惺]’, ‘그대는 큰 스님이 되지 말고, 큰 도둑이 되라[汝不爲大僧, 爲大盜]’고 쓰고 “이것은 『주자어류』의 말이다.”라고 했다. 박수여(朴受汝)에게는 승려의 붓을 자기의 붓에다 합쳐 묶어서 큰 글씨로 ‘고금의 역사 속에 한가롭고, 하늘과 땅 사이에 취했노라[閒中今古, 醉裏乾坤]’ 여덟 자를 썼다.
절 이름이 ‘萬德寺(만덕사)’인데 ‘晩德寺(만덕사)’로 쓰는 연유를 묻자 나라에서 휘(諱)하는 글자라고 하였다. 또 제주도를 유람한 노승을 불러 제주의 풍토와 경치를 자세하게 물어보고, 만덕사의 주봉 금산(金山)에 오르면 제주도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박광일이 이별 시 두 수를 써 올리니 송시열은 차운하여 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괴안국(槐安國)에 관한 고사를 아는가? 옛사람이 꿈에 개미를 따라 괴화나무 속으로 들어가서 40년 간 부귀를 누렸다는 것이 괴안국에 관한 이야기일세. 이것은 대체로 인간 만사가 모두 허사라는 말이네.”라고 했다. 안여회의 시에도 차운하였다.
백련사에서 우암 노 선생과 헤어지다[白蓮寺奉別尤菴老先生]( 『손재집』 제1권)/ 박광일
장기의 가시울타리 속에서 처음 제자 되어
蓬山棘裏始摳衣
이때부터 소생은 가르침을 받았지요
從此愚蒙荷指揮
오늘 뗏목 타고 바다로 떠나시는 자리에
此日乘桴浮海處
책 싸 들고 함께 가지 못해 한스럽네요
携書恨不得同歸
만덕사에서 박생[광일]의 시에 차운하다[萬德寺次朴生[光一]韻]( 『송자대전』 제2권)/ 송시열
당년의 장한 뜻은 갑옷 차림하고서
當年壯志鐵爲衣
쇠창 잡고 해를 향해 휘두르려 했거늘
擬把金戈向日揮
임금수레 홀연 하늘나라로 떠났으니
龍馭忽然天上去
울면서 남긴 편지 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네
泣將遺札故山歸
만덕사에서 안생 여해 의 시에 차운하다〔萬德寺次安生 汝諧 韻〕/송시열
음은 탁하고 양은 맑아 함께할 수 없고
陰濁陽淸莫與俱
구름 속의 용과 진흙 속의 돼지 어찌 길이 같을 수 있겠는가
雲龍塗豕豈同途
선방의 창문 아래서 하룻밤 꿈 깨고 나니
禪窓一夢居然罷
가소롭구나 괴안이 수도가 되었네
可笑槐安作上都
이후 강진은 송시열의 ‘종강지지(終講之地)’로서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강진지역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남강사 건립의 단초가 되었다.
송시열은 1689년에 6월 7일 정읍에 도착하여 8일 후명(後命,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신원되었다. 갑술환국은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 민씨(인현 왕후) 복위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그 뒤 1744년(영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정조는 <어제전심록(御製傳心錄)>을 지어 송자대전에 편입시켜 간행케하였다. 이로서 송시열의 학덕과 업적에 대한 대대적인 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강학했던 강진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송시열이 사사된 뒤 문인들은 백련사에 수 칸의 옥우(屋宇)를 건립하고 정읍 고암서원(考巖岩院)의 송시열 진상을 이안하여 제향하게 된다. 1803년 6월 강진 유학 김봉채(金鳳采)를 비롯한 노론계 강진 유생들이 사우 건립을 상소하고 곧이어 태학과 경재(京宰)에 통문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전라관찰사 한용구(韓用龜, 1747~1828, 1802년 2월~1804년 4월 재임)를 비롯한 절도사 이응운((李膺運), 대학유사 어용구(大學有司 魚用九), 해남현감 이유수(李惟秀), 영암군수 겸 강진현감 조운영(趙運永, 成造有司), 남평현감 김세연(金世淵), 남원부사 박돈호(朴敦浩) 등의 수령들도 적극 협조하였다. 강진읍 평동리(속칭 영댕이)의 사우로 옮겨 봉안하게 된다.
남강사 건립 당시 지방관의 등의 부조액을 기록한 「도내 진신 예부기(道內縉紳例扶記)」를 보면 관찰사(한용구), 병사(이용운), 우수사(오재광), 강진 등 전라도 56개 군현 가운데 39개 군현 수령, 3개소 영장(순천, 나주, 전주)과 찰방(제원)등 43개소가 참여하였다. 이들의 지원경비 총액은 2,135량(兩), 고초(藁草) 2000속(束), 백지 20속에 이른다.
이처럼 지방관의 적극 참여가 돋보이는 것은 남강사가 송시열을 제향하는 사우였고,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당시 중앙의 노론계와 연계되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남강사의 건립 과정에 각 지역의 유생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1804년 남평의 운흥사(雲興寺)에서 모여 남강사의 건립기금을 모금하기로 한 바 있다.
강진 군내의 부조기록[鄕內例扶記](계해 1803년 11월)을 보면 관(官, 강진현감) 200량, 도사(都事)(金麟采) 30량을 비롯하여 현내면(縣內面) 등 16개면 000명 932량 6전(錢), 향교 170량 등 교원(校院) 8개소(덕호사, 서봉, 금강사, 월강, 양사재, 향교집강, 교임)와 향사당(鄕射堂) 11명 등 375량 등 1,307량 6전이었다. 각 군현 향교와 원사, 문중의 부조기[各邑校院及各門例扶記]를 보면, 33개 향교, 13개 원사, 48개 문중 등 97개소 515량이다.(『남강서원지』, 1994)
1809년에는 성자포(星子浦) 앞바다에 「주자경재잠(朱子敬齋箴)」 목판 20매와 「대우수전(大禹手篆)」 8매가 들어있는 목궤가 떠밀려왔다고 한다. 당시 강진현감은 전라감영에 이를 보고하고, 목판을 감영으로 수송하게 되었는데, 기이하게도 목판을 실은 인마(人馬)가 남강사 영당 앞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이 목판을 남강사에 보관하기로 하였다.
1836년 향유들의 발의로 1838년에는 남강사에 주자의 영정(함평 자양서원에 있던 주자상)을 이안하여 주자를 주향으로, 우암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南江祠’(남강사)도 주자의 치군지였던 ‘南康(남강)’에서 유래된 ‘‘南康祠(남강사)’로 바뀌게 된다.
결국 목판의 발견은 남강사의 지위를 보강하는데 이용되었던 것이고, 우암 송시열의 ‘종강지지’나 「주자갈필목판」의 출현은 이에 관계되는 강진지역 노론계 가문들의 지위보강과 관련되었고 노론의 지방기반 확대 과정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강사의 양사재 건립이나 별고계(別庫契, 1842년) 등에 참여하는 30개 문중의 성격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30개 중중 가운데 『여지도서』 강진 성씨조에 보이는 성씨로는 창령조, 죽산안, 함양박, 탐진최씨 등 4개 성씨이다. 이렇게 보면 남강사 건립에 힘을 보탠 성씨는 기존 강진의 세족, 혹은 토착 가문세력과는 다른 성향으로 보이고, 이들은 바로 새롭게 부상한 성씨들(新鄕)이고, 이들과 노론세력이 연대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남강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96년 이후로 강당・고직사・내삼문 등이 중건되면서 1901년에 지역 유림의 발의로 복설을 추진하여 1904년에 완성되었다. 어필각을 지어 목판과 중국 명나라 의종의 어필을 보관하였다. 1933년에 중건되었으며, 1945년에는 강당이 중수되었고, 1953년에 남강서원으로 개칭 중수되었다. 1958년 우암 송시열을 백련사까지 수행했던 문인 손재 박광일을 종향하였다. 1960년에 <남강서원지(南康書院誌)>가 간행되었으며, 1994년에 증보 번역한 중간본 <남강서원지>가 출판되었다. 1987년에는 남강사 소장 목판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154호)로 지정되었다.
참고
이해준 , 『조선후기 문중서원 연구』. 경인문화사, 2008, 170~174쪽
김희태, 전라도 지역의 주자 제향 서원의 현황, 『2022년 주자학 학술심포지엄-화순 주자묘와 주자 제향 서원문화-』, 2022.12.02.
백련사에서 우암 노 선생과 헤어지다[白蓮寺奉別尤菴老先生](박광일)(손재집)(위 오른 쪽)
차운시 - 만덕사에서 박생[광일]의 시에 차운하다[萬德寺次朴生[光一]韻](송시열)(손재집[위 왼쪽], 송자대전[아래 오른쪽])
차운시 - 만덕사에서 안생 여해 의 시에 차운하다[萬德寺次安生[汝諧]韻] (송시열)(송자대전[아래 왼쪽])
백련사어록(박광일, 손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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