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316 - 1881년 돌에 새긴 윤음, 장흥 향교 앞 척사윤음비

향토학인 2023. 12. 3. 19:33

인지의즐거움316

 

1881년 돌에 새긴 윤음, 장흥 향교 앞 척사윤음비 

 

김희태

 

장흥 향교앞에 있는 척사윤음비(斥邪綸音碑) 2023 11 9일자로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예고 되었다.

 

척사윤음비(斥邪綸音碑)는 조선후기 서학을 극복하려는 정책방향을 알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고, 국왕의 윤음이 팔도관찰사-군현 수령으로 하달되어 고을 현지에 세워진 것이 비석으로 세워진 금석문 자료는 매우 희귀하여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였다.

 

장흥 척사윤음비는 장흥향교 입구에 있는 기념비군과 함께 있다. 1881(고종 18)에 장흥도호부사 이학래가 주도하여 세웠다. 비제는 어제 유 대소신료 급 중외민인등 척사윤음비(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碑)’이며, 끝에 통훈대부 행 장흥도호부사 겸 장흥진병마첨절제사 신---(通訓大夫行長興都護府使兼長興鎭兵馬僉節制使臣---)’이라 건립을 주도한 장흥도호부사 직임이 보인다. 당시 장흥도호부사는 이학래(李鶴來)이다. 뒷면에는 성상 즉조 십팔년 신사 시월 일 입(聖上卽阼十八年辛巳十月 日 立)‘이라는 세운 연대를 새겼다. 임금이 즉위한지 18년 신사년으로 고종 18, 1881년이다.

 

윤음(綸音)은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훈유(訓諭)나 명령문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윤음의 반포 대상은 상·, ·, ·(朝野)의 모든 관료와 백성들을 망라하며, 내용도 가장 일반적·의례적인 권농(勸農) 윤음부터, 고을 부로(父老)에 대한 경노(敬老)와 공양(供養), 사학(邪學사교(邪敎사당(邪黨)의 배척, 충효열자(忠孝烈者)에의 포장(褒獎), 재난시의 구휼과 민심 위무 및 그를 위한 부세·요역·군역 탕감, 지방민의 군역·요역 독려, 음주 금령, 과거제도의 폐단 개혁, 수성(守城)의 독려, 역모 진압 및 사후의 민심 수습 방안, 변방민 등용, 계몽 서적 반포와 삼강오륜 장려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사안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아울러 윤음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주자(鑄字)로 간행하였고 언해문도 첨부하였다. 척사윤음은 간행된 인본이 남아 있고, 일괄문서에 포함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사례가 있다. ‘채제공 관련 고문서 일괄’(경기도 유형문화재, 4864)에 수원화성 축성을 감독하는 신하들에게 내린 윤음이 들어 있다.

 

1881(고종 18)의 척사윤음은 515고종실록기사에 나온다. “척사 윤음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려 보냈다.[下 斥邪綸音 于八道四都]”는 내용에 이어 척사윤음문이 나온다. 팔도(八道)는 팔도관찰사, 사도(四都)는 유수(留守)가 관할하는 네 곳의 도읍(都邑)으로, 개성(開城)ㆍ광주(廣州)ㆍ수원(水原)ㆍ강화(江華)를 가리킨다. 이어 516(연기 : 光緖七年五月十六日)에는 문서로 반행(頒行)하는데, 규장각 도서(1555, 一簑古349.1-G561e )에 한문본과 언해본이 함께 실린 척사윤음이 남아있다.

 

장흥향교 앞에 있는 척사윤음비는 18818월에 세워진 것이다. 515일 팔도와 사도에 하교, 516일 한문본과 언해본 반행으로부터 3개월 뒤에 세워진 것이다. 515일 팔도에 하유한 윤음이 전라도 관찰사 등 각도 관찰사를 통하여 관할 군현에 내렸고, 장흥도보호부사는 전라도 관찰사가 내린 국왕 하유의 척사윤음을 현지에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8월에 장흥향교 앞에 세워진 비문은 515일의 고종실록 하유 기사, 516일 반행 한문본과 내용이 같다.

 

장흥 척사윤음비는 조선후기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 전통 문화를 수호할 것을 하유한 것으로 서학의 대두를 극복하려는 정책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국왕의 윤음이 팔도관찰사-군현 수령으로 하달되어 지방 고을 현지에 세워져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경과를 알 수 있는 금석문 실물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고종실록에 실려 있는 원문과 간행 인본과도 내용이 일치하며, 윤음은 문서로서 전해지는데 돌에 새겨 세운 비 형태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여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할만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척사윤음비[국역문]

 

어제 유 대소신료 급 중외민인 등 척사윤음비(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碑)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희들 모든 관리와 온 나라의 백성들은 나의 말을 똑똑히 듣도록 하라. 널리 생각건대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는 현명한 정사와 밝은 교화로 백성들을 잘 다스리어 백성들에게 악행이 없었으며 추향(趨向)이 바르고 풍속이 순박하여 삼대(三代) 때에 비해 손색이 없어서 온 세상에 소문이 났었다.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공맹(孔孟)의 거룩함을 존중할 줄 알았고 마을의 수재(秀才)와 어린 선비들은 정주(程朱)의 학문을 숭상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진 이를 친히 하고 이로움을 즐겨하여 놀면서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백성들아! 내가 외람되게 열성조의 큰 기반을 이어받고 열성조가 물려준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중단 없는 일념으로 어찌 감히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선대 임금들을 계술(繼述)하는 방법으로 삼지 않겠는가?

불행하게도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식이 있으니, 양편 사이에서 처음 보는 일종의 사교(邪敎)가 태서(泰西)로부터 들어와 세상을 미혹시키고 사람들을 속여 백성들이 더러 물든 지가 이제 100년쯤 되었다. 이전에 정묘(正廟)의 융성할 때 그 기미를 막고 그 침잠하는 것을 막은 것이 실로 이미 뿌리를 없애고 덩굴풀을 제거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종자에서 또 종자가 생겨나고 소멸하였다가는 이내 성해졌다. 중간에 크게 징계한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형상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므로 보이지 않는 근심은 언제나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추향이 점점 어그러지고 백성들의 풍속도 점점 물들게 된 것이 일찍이 이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아! 저것이 종교가 되어 말로는 하늘을 공경한다 하지만 그 귀결은 신을 업신여기고, 말로는 선()을 권장한다 하지만 결국은 악()을 전파시키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금수(禽獸)만도 못하고 독사와 같은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성품을 가진 자라면 누가 그것이 짐독(鴆毒)과 같아 가까이 할 수 없고 쏘는 물여우와 같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저 너절한 것들은 언제나 머뭇거리며 도사리고 있으며 근래의 무뢰배들은 때를 타서 몰래 발동한다. 어두운 밤에 담을 뚫고 곳곳에서 사건을 자주 일으키며 대낮에 약탈하여 왕왕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뜬소문을 퍼뜨려 민심이 편치 못하다. 또 인심이 점점 어그러지고 점점 오염될 뿐만이 아니니, 어찌 사당(邪黨)을 모조리 제거하지 못한 탓으로 말미암아 그러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대체로 이것을 반복하여 생각해볼 때 오늘날 거짓을 없애고 도적을 없애 우리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방도는 진실로 사당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데 있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청산해버리는 방도는 옛날에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지금이라 해서 어떻게 더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또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할 뿐이다. 병이 침노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람은 원기(元氣)를 보충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더러운 때를 없애려는 사람은 몸을 깨끗이 씻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지금 사교(邪敎)의 오염을 씻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의 유술(儒術)을 더 잘 닦는 것만 같은 것이 없다.

무릇 선비의 갓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고 공맹의 가르침을 강론하고 정주의 학설을 외우는 사람이 진실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성인의 훈계를 떠나지 않고 급한 때나 위태로운 때에도 반드시 성현의 경전(經傳)을 따르며 정도(正道)를 행하고 좋은 풍습을 일으킨다면, 이른바 사교에 물든 무리들을 비록 적발해내고 소굴을 파괴하지 않더라도 머리를 쳐들고 지나가지 못할 것이고 올빼미 같은 소리도 변할 것이며 짐승 같은 마음도 고쳐질 것이다. 도적질하는 무리와 같은 이들도 본래는 모두 선량한 백성들이니 토벌하지 않아도 그만둘 것이고, 민심을 소란 시키는 거짓말도 원래는 근거 없는 말이니 반드시 꼬치꼬치 따지지 않아도 없어질 것이다. 이에 민심은 스스로 안정되어 편안해지고 순박한 풍속이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맹자(孟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여 마침내 원칙으로 돌아오게 했을 뿐이다. 원칙이 바로잡히면 백성들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일어나면 사특한 것이 없어지는 것이니, 의미가 있지 않은가?

아아! 나의 대소 신하들과 백성들은 위를 향하는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아 나를 도우려고 생각 하면서, 어찌 원칙을 바로잡아 백성들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모든 말의 으뜸으로 삼지 않는가? 이후로부터 만약 다시 사교에 깊이 물들어서 자기 습성을 고치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유인하여 깨끗한 것을 더럽히는 자가 있다면 가족과 종족을 멸살시키는 처벌이 또한 부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법을 쓰는 것은 가라지를 제거하여 곡식의 싹을 보호하듯이 악을 제거하여 덕을 심는 것이 곧 우리 열성조의 유민(遺民)을 보호하는 지극한 뜻이다. 이에 분명히 하유(下諭)하니, 모두가 나의 애통한 마음을 잘 알아주기 바란다.

통훈대부 행장흥도호부사 겸 장흥진 병마첨절제사 신----(通訓大夫行長興都護府使兼長興鎭兵馬僉節制使臣)

1881(고종 18, 辛巳) 10월 일 세우다.(聖上卽阼十八年辛巳十月 日 立)

 

장흥 척사윤음비

문화재명 : 장흥 척사윤음비(長興 斥邪綸音碑)

소재지 : 장흥군 장흥읍 교촌리4(교촌남외길 33) 장흥향교

규 격 : 높이 186cm, 너비 74cm, 두께 18cm

연 대 : 조선(1881)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고시 ; 2023년 12월 23일

척사윤음비 탁영문(탁본 정선종 김희태, 곽유석, 서인석, 김상찬, 2022.11.02)

1881516일 반행 척사윤음(御製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규장각 一簑古349.1-G561e)/첫 면과 마지막 면

1881년 5월 16일 반행 척사윤음 언해본 첫 면과 마지막 면
고종실록 척사윤음 기사 『고종실록』 18권, 고종 18년(1881) 5월 15일 丙子.(https://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