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256 ; 유달산➁ - 1454년, 유달산의 또 다른 이름 ‘鍮達伊’와 봉수

향토학인 2021. 12. 23. 22:58

인지의 즐거움256 ; 유달산➁

 

1454년, 유달산의 또 다른 이름 ‘鍮達伊’와 봉수

 

김희태

 

호남정맥의 끝맺음, 영산강이 바다와 입지 여건은 봉수(烽燧, 烽火)라는 국가 관방 시설이 유달산에 설치되면서 바로 연결된다. 『세종실록』 권151, 지리지(1454년) 전라도 무안현조에는 ‘유달이(鍮達伊)’ 봉화가 나온다. 유달산 봉수와 관련하여 최초 기록은 ‘유달이(鍮達伊)’인데 유달산의 또 다른 이름인 셈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봉화가 2곳이니 유달이(鍮達伊)가 [무안]현의 남쪽에 있고, [남쪽으로 영광 황원(黃原)에 응하고, 북쪽으로 나주(羅州) 군산(群山)에 응한다.] 고림(高林)이 [무안]현의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함평(咸平) 땅 옹산(甕山)에 응한다.] (烽火二處, 鍮達伊在縣南, [南準靈光 黃原, 北準羅州 群山。] 高林在縣西。[北準咸平 地瓮山。])”

 

봉수는 군사․통신제도의 하나로, 주연야화(晝煙夜火)의 신호체계를 이용해 변경의 군사정보를 중앙과 주변지역에 신속히 알림으로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왕조의 봉수제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르러 봉수제가 시행되고 있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447년(세종 29년)경에 확립되고『경국대전』상의 규정으로 확정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해안의 경우 평시에 봉화를 1거, 적의 모습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거, 병선이 접근하면 4거, 육지에 상륙하면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렸다.

 

이에 따라 봉수노선을 5로까지 두었는데 ‘유달이 봉수’는 제5거(炬)로서 순천[현 여수] 돌산도봉수(突山島烽燧)에서 초기하여 전라도∼충청도∼경기도 양천 개화산봉수~한양 목멱산(木覓山) 제5봉(第五烽)에 이르는 노선이다. 직봉(直烽) 61개소, 간봉(間烽) 24개소 등 모두 85개소이다.

 

유달산[유달이] 봉수는 진도 여귀산-첨찰산-해남 황원성-나주 군산-무안 고림산-함평 옹산봉수로 연결되었다. 현재의 행정 편제와는 다른데 이들 지역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제5로 직봉(直烽) 봉수의 유달산 봉수 노선

봉수명 위치[현] 해발고도 산명 봉수유형 소속군현
여귀산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 산40 458 여귀산 연변 珍島
첨찰산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산1 485.2 첨찰산 연변 珍島
황원성 해남군 화원면 성산리 산51-2 335.1 일성산 연변 海南
유달산 목포시 죽교동 산42-2 228 유달산 연변 務安
군산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산96-6 207 봉수산 연변 羅州
고림산 무안군 청계면 강정리 산27 180 도대봉 연변 務安
옹산 무안군 현경면 용정리 산143 82 봉대산 연변 咸平

유달산 봉수 전후의 봉수를 현재의 거리로 보면 해남 황원 봉수는 16.3km, 나주[현 무안] 군산 봉수는 8.4km 거리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유달이(鍮達伊)’ 봉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다른 기록에서는 ‘유달산(鍮達山)’ 봉수로 표기된다.

 

유달산 봉수의 운영은『호남봉대장졸총록(湖南烽臺將卒摠錄)』(규장각 소장, 奎4482)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무안의 유달산(鍮達山)봉수는 목포진 소관이다. 남쪽의 해남 황원봉수에서 육로로 대략 40리쯤 와서 나루를 건너서 있다. 북쪽으로는 나주 군산봉수에 응한다. (무안) 관아로부터는 남쪽으로 60리이고 목포진에서는 북쪽으로 3리이다. 별장 6인, 군사 25명, 보인(保人) 48명으로 매달 초하루에 별장 2인과 군사 8명씩이 돌아가며 수직을 한다.’고 하였다. 유달산 봉수를 운영하는데 79명이 있었던 것이다.

 

유달산 봉수(무안현지도, 1872년, 규장각)

유달산 기록 - 『신증동국여지승람』36권 무안현 산천조 ; 무안현 남쪽 66리(1481년 초판, 1530년 신증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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