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58 ; 유달산➃
유달산의 여러 표기들 , 楡達山, 靈達山, 諭達山, 輸達山, 儒山, 達山
김희태
유달산은 1448년 ‘유달산(鍮達山)’으로 처음 기록이 나온 이래 1454년 ‘유달이(鍮達伊)’로도 표기되었다. 지금 쓰고 있는 ‘유달산(儒達山)’은 1899년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후 기록이나 구전되는 내용을 보면 ‘楡達山’, ‘靈達山’, ‘諭達山’, ‘輸達山’ 등이 나온다.
‘유달산(楡達山)’은『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19 여지고7, 1903∼1908)에 “(해남) 옥천산의 한 기슭은…, 일성봉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등산의 포구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유달산(楡達山)을 사강(沙江, 영산강 이칭)의 남쪽에서 바라본다.[玉泉山一麓西 至金剛山…自日星西北 至登山之浦東北 望楡達山於沙江之南…]”라 한데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고지도에서도 ‘유달산(楡達山)’ 표기가 확인된다. 『여지도(輿地圖)』(규장각 소장, 古4709-78, 조선후기), 『팔도분도(八道分圖)』(규장각 소장, 古915.1-P173, 19세기 중반), 팔도지도(八道地圖)(규장각 소장, 古4709-14, 18세기 초중반), 팔도지도(八道地圖)(규장각 소장, 奎10331 ; 古4709-23, 조선후기), 좌해지도(左海地圖)(규장각 소장, 奎12229, 18세기 후반) 등이다.
‘영달산(靈達山)’은 『유달산』(목포시범시민유달산공원화추진위원회, 1990)에 유래담이 전하고 있다. 옛 기록에서는 찾아지지 않고 다분히 무속 신앙에 뿌리를 두고 거기에 불교적인 요소가 곁들어져 근래에 형성된 구전설화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유달산(諭達山)’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편찬한 기록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자연 경관을 땅이름에 담았던 아름다운 이름 ‘유달산(鍮達山)’의 ‘놋그릇 鍮’자에서 ‘金’을 ‘言’을 바꾸어 표기한 것이다. 우리의 발음상으로는 동일하지만, 뜻으로는 교묘함이 숨어 있다. ‘諭’에 내포된 ‘깨우칠 유’의 의미와 연관해서이다.
‘유달산(諭達山)’이 처음 나오는 기록은 『목포지(木浦誌)』(1914)이다. “특히 목포 시가는 그 방향에 따라 북쪽 아니면 서쪽에 유달산(諭達山)을 등지고(殊に木浦市街は其方面に依り北又は西に諭達山を負ひ)”, “또한 유달산봉수(諭達山烽燧)에 관해 덧붙여 이르기를(尙ほ諭達山烽燧のことを附記して曰く)”, “뼈만 남은 민둥한 유달산(諭達山) 봉우리에서 오리, 기러기 떼가 내려와 벼논을 망치는 외에(“禿骨たる諭達山頂より雁鴨群の降下して稻田を害するの外)” 등을 볼 수 있다.
‘수달산(輸達山)’이라는 표기는『보고 전남(寶庫の全南)』(1913)에서 보인다. 그리고 ‘유산(儒山)’ 또는 ‘달산(達山)’으로 약칭 표기되기도 한다.
‘楡達山’ 표기 지도, 여지도(輿地圖)(규장각 소장, 古4709-78, 조선후기)
팔도분도(八道分圖)(규장각 소장, 古915.1-P173, 19세기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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