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257 ; 유달산➂
1899년 기록에서 보이는 ‘儒達山’
김희태
유달산의 현재 표기는 ‘儒達山’이다. 한자의 표기나 뜻에서 보듯이 유학(儒學), 유도(儒道)를 진작시켜 유학의 가르침에 이르도록 하려는 데서 온 이름이라 알려진다.
그 유래나 연원에 대해서 조선 시기의 기록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번 조사를 하면서 1899년 8월 24일 기록을 확인하였다. 지도까지 함께 있는 자료이다.
이 자료는 로국(露國)에 토지를 팔려고 하는 일본인에 대한 신문기사에 관한 건을 보고한 문서로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13권 七. 木浦高下島買收書類)에 나온다. 발신인은 재목포 영사(在木浦 領事) 삼천계사랑(森川季四郞), 수신인은 재경성 특명전권공사(在京城 特命全權公使) 임권조(林權助)이다.
그 토지는 도면에 표시한 바와 같이 거류지 배후의 儒達山 서쪽 기슭에 있는 해안의 작은 한 구역이며, 더구나 그 해안은 干潮 때는 全面이 개펄을 드러내어 군사상은 물론이고, 경제상에서도 특별히 쓸모가 있을 만한 장소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어 『무안보첩(務安報牒)』(규장각 소장, 奎 17864-2)에 1899년 9월 23일의 기록이 보인다. 『무안보첩』은 목포 개항 뒤 1897∼1906년까지 무안감리서와 외부대신 사이에 오고간 보고서와 지령을 연도별로 엮은 사료이다.
목포문화원에서 발간한 있다.(『무안보첩』, 2002) 이 기록은『목포시사』(2018)에서 유달산을 설명[오홍일위원 집필]하면서 소개한 바 있다.
초대 무안감리(務安監理)이던 진상언(秦尙彦)이 1899년(광무 3) 9월 23일, 외부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있는 다음 기록이다.
“본 감리가 그 영사와 회동하여 본 항 유달산(儒達山) 아래 쌍교촌 왼쪽 산기슭에 그 장지(葬地) 64,365㎡를 점정하여 표찰을 세운 바, … 쌍교촌 북쪽, 유달산(儒達山) 동쪽 끝의 북동면에 있는 물가의 크고 작은 2개의 구릉 …(本監理가 會同該領事와 本港儒達山下 雙橋村左麓에 該葬地 六萬四千三百六十五平方米突을 占定立標이온바, … 雙橋村北儒達山東脚之瀕於北東面之大小二個阜丘…)
이어서 ‘유달산(儒達山)’의 표기가 보이는 기록은 초정 김성규(草亭 金星圭, 1863∼1936)의 문집인 『초정집(草亭集)』에 1915(을묘)년 시월 목포 백전회 때의 한시가 보인다.
그리고 1916년 9월 30일자 『매일신보』의 기사 등에서 ‘유달산(儒達山)’ 기록이 보인다. 일본인들이 출판한 기록에서 ‘유달산(諭達山)’을 쓰던 시절[『목포지』, 1914]에 목포 사람들은 ‘유달산(儒達山)’을 썼던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儒達山 표기 (1899.8.24)
『무안보첩』 - 儒達山 표기(1899.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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