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09 - 76년전 남녘풍경, 김주현의 정강일기(1938~1948)

향토학인 2014. 11. 30. 01:49

인지의 즐거움009

76년전의 남녘 풍경

- 근현대 일기를 통해 본 시대풍경, 정강일기(1938~1948)

 

 

일상의 소소한 것도 기록으로 남기다.

 

<작은 어머님의 병을 살피니 어제의 약이 효험이 있었던 듯하다. 또 가감양영탕(加減養榮湯) 두첩을 더 드시게 했다. 마을 앞에 나오니 양복 입은 두세명이 붉은색과 흰색 무늬가 섞인 긴 장대를 갖고 있었는데 길이가 반장(半丈)쯤 되었고 밭 사이에 세워 두었다. 옆사람에게 물으니 ‘이들은 남포선로 측량원’이라 했다. 토지의 침입이 많아 주민 원망이 분분했다. 내가 ‘남포개항을 먼저 주창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본면 직원(本面吏)과 협의원(協議員) 등이 결의하여 출원했다.’고 하였다. 나혼자 마음으로 말하기를 ‘원망이 있으나 어쩔 것이냐’ 했다.>

 

한적한 시골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 옆집에 사는 작은어머님을 살피니 어제 드린 약이 효험이 있었던지 조금 더 말끔해지신 듯하다. 나이가 들면 어른들은 당연히 기가 허해 지는 등 몸이 아플 수 밖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배려하신 것인지 옆집이기는 하지만 조심스럽다. 그래도 어제 보다는 좋아 지셨으니 다행이랄까. 오늘은 또 가감양영탕 두첩을 더 올렸다. 기허혈쇠(氣虛血衰)를 보한다는 가감양영탕. 건지황(乾地黃), 당귀(當歸), 백작약(白芍藥), 오약(烏藥), 천궁(川芎) 들을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선다. 마을 앞 길가에 이르니 양복입은 두세명의 사람들이 손짓 몸짓하면 뭔가를 하고 있다. 길옆에는 구경나온 동네 사람들이 서성이면서 수근대고 있다. 그들이 손짓하는 곳을 보니 긴 장대를 세워 두었는데, 붉은색과 흰색의 무늬가 섞여 있다. 길이는 반장쯤, 6자에서 7자 크기. 옆사람에게 물었다. ‘저들은 무엇하는 사람들인고?’ 동네사람들이 ‘남포선로 측량원’이라 했다. 남포선? 그렇다. 얼마전부터 장흥읍에서 남면[용산면]소재지-관지-상금-풍길을 지나 남포항까지 길을 새로 만들거라는 말이 돌았다. 그것인가 보군. 남포항에서 여러 화물들을 배로 실어내 가기 위해서 길을 놓는 것이리라. 이 길을 개설하면서 대대로 살아 온 터자리의 농토가 많이 편입되어 버려 주민들이 원망이 대단했다.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 이걸 하자 했는지. 그 사람들은 자기들 땅이 들어가도 괜찮은 것인지 궁금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남포 개항을 먼저 주창한 사람이 누구냐’고 따지듯 물었다. ‘면 사무소 직원과 협의원 들이 결의문을 만들어 출원했다’는 답이다. 이런.. 이런.. 누구한테 원망도 못하겠군. 수요자 대표가 자원한 것처럼 해 버렸으니.

 

언제쯤일까? 어느 곳일까? 궁금증이 난다. 60년대나 70년대 개발이나 새마을 사업 분위기가 난다. 그런데 그건 아니다. 1938년 6월 8일, 어느 유생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전남 장흥군 용산면 관지리 ‘황새몰’. 기록을 남긴 이는 정강 김주현(定岡 金冑現, 1890~1950)선생. 당시 마흔 아홉 살. 음력으로 6월이니 한창 더울 때다. 76년전의 남녘 풍경이다.

 

장흥 용산면은 당시에는 남면이라 했다. ‘관지리’는 그 전에는 남상면에 속했는데 1932년 11월 11일 남하면과 남상면이 합해져 남면이 된다. 이 남면은 다시 1940년에 용산면이 된다. 면 직원과 면협의원은 정확히 표기하자면 전라남도 장흥군 남면의 면직원과 협의원인 셈이다. 일본강점기에 부군면협의회가 있었는데 주민 직선제였지만 지역의 명망 높은 인사를 선출하는 일종의 천거 형식이었고,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민의 뜻인냥 도로개설을 출원하였던 것이다.

 

 

장흥 유생 정강 김주현의 생활일기, 1938년~1948년

 

이처럼 시골의 한적한 경관과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 개발을 적은 짧은 기록이지만, 이 일기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 지역상, 생활상을 읽을 수 있다.

 

『정강일기』는 정강 김주현(1890.5.23~1950.3.12)이 1938년 5월부터 1948년 12월 까지 10년 7개월 동안 기록한 것이다. 산면 관지리 김동홍선생(1929년생, 정강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다. 김주현의 할아버지 양이재 김병린선생(怡養齋 金柄璘, 1833~1888)은 남파 이희석선생(南坡 李喜錫, 1804~1889)과 다암 위영복선생(茶嵒 魏榮馥, 1832~1884) 등과 교류하였고 1876년에 기근이 나자 구휼하는 등 향촌에서 활동을 하였다. 정강은 김병린의 차남 국사 김민환선생(菊史 金珉煥, 1872~1930)과 전주이씨 이광양(李光陽, 1870~1960) 할머니의 7남 4녀 가운데 장남으로 관지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는 완도 금일에서 보냈다.

 

김주현의 호는 정강, 자는 명규(命圭) 또는 형구(亨九), 본관은 김해이다. 학문에 힘썼고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강진의 경회 김영근선생(景晦 金永根, 1865~1934)과 이웃마을 상금의 일곡 백형택선생(一谷 白亨澤, 1878~1962), 잠계 백형기선생(潛溪 白亨幾, 1881~1948) 등에게 학문을 연마하면서 교류하였다. 마을 뒤에 주곡정사(舟谷精舍)란 3칸 초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정강이 남긴 글은 『유고시집』과 『일기』등 15권에 이른다.

 

『정강일기』는 김주현의 나이 49세 생일날인 1938년 5월 23일(음력)부터 시작하여 59세때인 1948년 12월 30일까지 기록이다. 양력으로 1938년 6월 20일부터 1949년 1월 28일까지이다. 모두 10책인데 처음 1책은 1938년 5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1년간, 2책과 3책은 1년 2개월에서 1년 4개월간의 기록이고 4책부터는 그해의 1월에서 12월까지 각각 1년간의 기록이다. 본문은 1면에 10행, 1행은 20자이며 작은글씨로 주(註)를 달았다. 모두 1,043면인데, 출타 등 특별한 경우 외에는 거의 거르지 않고 있다.

 

저자는 생일날부터 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처음에 선친이 세상을 뜬지 9년이 되는 해이며 어머니는 69세라는 점을 적고, 배우지 못한채 세월만 흘러 입신하지 못하고 곤궁한 오두막집에서 뉘우쳐 한탄한다는 소회를 적고나서 ‘금년부터 음력을 폐하고 양력을 쓴다고 하니 오래지 않아 날짜마저 잃어버릴까 한탄스러운 탓에 이 날로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는 동기를 적고 있다. 이 탓에 일기의 전 내용이 음력으로 표기되고 있으며 양력은 ‘신(新)’ ‘양(陽)’ ‘피(彼)’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정강일기』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의 많은 부분이 향촌 생활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사의 파종과 이앙시기, 노동력과 품삯, 전토매매, 위선활동, 자녀교육과 질병치료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유생으로서 인근의 문사동료들과 담론하고 교류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거주지인 남면[용산면]은 물론 장흥 관산과 대덕, 완도군, 구례와 강진 등 원근 지역의 인물들과 서로 내방 유숙하면서 시문을 짓고 서화를 감상하며 문중과 향촌의 대소사를 논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기록이다. 다음으로는 중앙이나 지방관서에서 추진했던 제반 제도를 말단 향촌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시행되는 시기와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도로개설, 일지개전 기념일, 동방요배식, 신민서사, 출정 징용, 해방소식, 좌우익활동, 국회의원선거, 남선정부 수립 등 주로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하나 외부의 소식을 듣는대로 적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징용이나 징병에 갔다가 탈출해 돌아온 사람이 말하는 국제정황, 전쟁 현황 등에 대한 것 등이다. 몇군데 살펴 보자.

 

 

파종과 이앙, 노동력과 품삯 등 일상사 기록

 

○ 동평 논[水田]에서 모내기를 했는데 가동 외에 21명의 일꾼이 9마지기 심기를 마쳤다.(1938.5.25)

○ 앙고리 앙답(鞅古里 秧畓) 2마지기, 용두평 1마지기 3되지기, 마을 앞 전작답 3마지기를 일꾼 20명이 이식을 마쳤다.(1938. 5. 29)

○ 작은 어머님이 병이 들어 누우셨다는 말을 듣고 가서 문병했고, 막내 동생 주해(冑海)가 일곡에게 작약탕(芍藥湯) 2첩을 조제해 와 썼다.(1938. 6.7)

○ 신심이 번울하고 복중에 후성(吼聲)이 있어 갈증이 생겼다. 더위가 범한 줄 알고 칠성단(七聖丹)을 복용하고 결명자와 미삼(尾蔘)을 조금씩 섞어 구워 한잔을 마시니 조금 안정되었다.(1938. 6. 24)

○ 집안 사람 병렬(炳烈)이 와서 둘째 아들 동봉(東鳳)에게 부탁해 말하기를 보류된 전조(田租)는 이미 작미(作米)한 즉 한포는 14원 50전씩이니 사려는 자가 있은 즉 이를 방매하고 그렇지 않은 즉 오는 11일 대흥장으로 옮겨 가라고 하였다.(1938. 윤 7.8)

○ 갓고치는 이[笠工]가 와서 갓[笠子] 수선을 청하였고 수공료를 물으니 5량이라 해 바로 주었다.(1938. 8.1 ; 신력 彼 9월 24일)

○ 새벽 2시[丑正時]께 아들 동린(東麟)이 복통이 매우 심하여 칠선단(七仙丹), 통명환(通明丸) 등의 약을 써 봤으나 모두 효과가 없어 연소화농(燕巢和濃)을 취해 온수로 마시게 하니 그쳤다.(1938.8.6)

○ 정일섭이 와서 말하기를 ‘곡정 가대(家垈)를 방매한다’는 풍문이 있는데 ‘과연 그런가요’ 하자, 이르기를 ‘그렇소. 매수할 뜻이 있소’ 하니 일섭이 말하기를 ‘같은 값(2백원)으로 사고자 한다’ 하고, 이에 계약금(3십원)을 내면서 ‘매매계약서를 만들자’고 했다. 관산의 임야를 침범한 자가 불복한 사건에 대해 다음에는 아들 동봉에게 장흥읍으로 가도록 했다.(1938.9.14)

○ 면리가 출장와서 금년중의 잡부(雜賦) 4종 102원 30전, 둘째 집 42원 26전을 징색해 가버리니 가용금은 어찌할거나(1945. 6. 10)

 

 

강학과 교류, 시문창작, 서화 감상 등 유생활동

 

○ 잡동 책자 중에서 연천 홍석주상공이 지은 농아재기(聾啞齋記)와 청풍정기(淸風亭記), 그리고 해부시고서(海夫詩稿序) 등 3편을 펼쳐 세번이나 읽었는데 문미(文味)가 진진했다. 잡동책자는 일전에 외종조인 고 진사 오산 이승태공(梧山 李承台)의 서궤에서 얻어 가져온 것이다.(1938. 5.24)

○ 일곡과 함께 월정(月汀)에 가서 야은 백형일어른(野隱 白亨一)을 뵜는데 진신의 첩자를 꺼내 보여주니 이광사(李匡師)의 유묵이었다.(1938 .6.7)

○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 박창주(朴昌柱)에게 답서 했다. 옥마리는 본군 장평면 두봉리와 구역이 경계인데 지난해에 겨울 12월 15일에 선고묘를 두봉 구역으로 이안하여 창주로 하여금 수호케 했는데 지난날 그 글 중에 묘소는 별일 없다고 한 바 감사하다는 답이다.(1938. 6.25)

○ 사람이 곡정을 갔다 왔는데 어제 본면의 모모 모임이 곡정관에서 부용산 기우제에 대한 의논을 하였다고 했다.(1938. 6. 29)

○ 친구 백형달(白亨達)이 와서 말하기를 읍지 편집일로서 수단유사가 각 리를 편행하는데 마을앞 가게에 있다고 하였다. 내가 묻기를 ‘10여년전 고 사과 위모씨가 모 향중을 돌면서 돈을 거둬 인쇄 간행했는데 이제 또 다시 확장하려 함은 어째서인가’. 형달이 말하기를 ‘넘쳐 기록된 것도 있고 빠진 부분도 있어 이제 다시 삭제하고 바로 잡으려 함이다’ 고 했다. 돈을 거두어 이를 하려 한즉 어찌 이제 하려는 것이 전날과 다르지 않을까. 읍지란 읍의 역사인데 金[돈]을 들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니 이는 ‘金史’이다.(1938. 7.15)

○ 백잠계가 와서 기호간첩서(畿湖簡帖序)를 논하다가 한두 글자만 고쳤을 뿐이다. 기호간첩이란 것은 외종조인 오산 이승태공의 경락(京洛) 사우간에 왕복 서찰로 내가 일찌기 편집했고 잠계가 서문을 썼다.(1938 .윤.7.20)

○ 족숙인 두환 사극(斗煥 士極)이 오셔서 오동(五洞) 족숙 병규(柄規)씨가 사현(四賢) 선조단(사우는 훼철된 뒤로 땅이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는데 후손과 사림이 단을 세워 향사했다.)에 임시 거처하면서 몇년간 봉단(奉壇)했고 ‘이제 가을 완성 뒤에 다른 곳으로 이안하려 하니 어떻게 생각하고 가능한지’ 물었다. 나는 ‘단을 설치한 것은 좋은 일이고 우리 종중에서 이미 전토를 갖추지 못했고 또 금전을 저축한 것도 없으니 종회를 하는 날에 족인 중에서 성실한 자를 가려 거주하면서 받들고 지키도록 함이 가하다’ 하였다.(1938. 8.4)

 

 

동방요배, 신민서사, 창씨, 공출, 제헌 선거, 정부수립 등 제도

 

○ 어떤 이가 면사무소에 갔다 돌아와서 이르기를 ‘이제부터 매호 호별세(戶別稅) 10전(錢) 1인당(頭) 50전씩 저금을 실행하고, 금액의 다소는 그 호세 등급에 따른다고 했다.’(1938. 6.2)

○ 관리가 와서 주민으로 하여금 매호당 생초 1짐(負)씩을 1시간 내로 베어 오라고 재촉하였다. 물은 즉 이날은 소위 일지개전(日支開戰) 기념일이라 했다. 공동작업으로 국방헌금에 보충하고자 함이었다.(1938. 6. 10)

○ 매달 초하루에 관공청으로부터 정리원 1명이 1구역을 관할하여 구민을 소집하고 소위 동방요배식(東方遙拜式)을 행하고 끝난 뒤 호수인구를 계산하여 1명에 1전씩(舊 5分) 수합하여 국방헌금으로 쓴다고 했다.(1938. 7. 6 ; 彼 8. 1)

○ 용강보거(龍江洑渠)를 수선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지로 가서 곧 용마산 하록 석벽 위로 올라가니 바람이 불었다. 멀리 바라보니 수백명이 곡정 대로 우측에 줄을 서 있어 물어보니 ‘대덕면 거주 일본인이 모집한 출정군에 들어간 자이며 오후에 차로 지나갈 것이며 해당 면 관공리 및 유지란 자들이 학교에 이르러 남녀 학생을 환송 축복하기 위해 차례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과연 대덕선로에서 차가 당도하여 3창 만세를 소리 지르면서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갔다.(1938.7.18)

○ 면리원이 나와서 구역내의 남여노소를 소집하여 소위 동방요배식을 행하도록 했고 신민서사(臣民誓詞)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한 뒤에 총동원연맹 결성, 보국대 성립, 국방헌금 등에 관한 일을 선언했다. 또 축우가(畜牛家)로 하여금 소 기르는 솥을 깨서 화식(火食)을 폐하도록 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 운운 했는데 그대로 이 영이 강행 될 경우 겨울 갈이와 내년 봄 갈이는 우력(牛力)으로 불가하니 저들의 소위 행정이 이처럼 번잡하고 가혹한가.(1938. 윤 7.3)

○ 관공청에서 창씨(創氏)할 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하게 독촉한 탓에 부득이 12년전(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집의 상인방에 붙여 두었던 선친의 당호(堂號) ‘菊史’자로 적어주니 저들이 갔다.(내가 처음에는 고쳐서 새로 하는 것을 관공청에서 정한 것으로 일임하려 했는데....) (1940. 5.10 ; 양력 6.15)

○ 어제 본면 조선인 자제로 나이 22세인 자들이 저들의 징병령에 의해 소집되어 오늘 출두한 자가 50여명이었다. 오후에 갑자기 전쟁이 끝났다고 하여 해산해 돌아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영국과 미국이 전쟁 중지하는 것을 서로 허락했을리 만무하고 하물며 소련이 노여움이 다년간 쌓여 선전포고한지가 오래지 않았으니 그 사유를 알 수 없다.(1945. 7. 10 ; 양 8.15)

○ 변종훈(邊鍾勛)이 와서 말하기를 ‘저들 일본이 10일전에 미국에게 항복했는데 본군은 오늘에야 발포했다’고 하였다. 들어보니 기분이 쾌활해지는데 우리 조선인 자제로서 군대로 잡혀간 자와 역부로 징용된 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할 터이고 왜노(倭奴)들로 우리나라에 있는 자는 본토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미곡이나 각종 물품의 강제 공출에 어찌 불쾌한 마음이 없겠는가만은.(1945. 7. 10 ; 8.15)

○ 본리의 남녀노소가 함께 비를 무릎 쓰고 국회의원 선거소[수확평 천변에 있다.]에 가서 투표[저들 관공리 지시중에 불응한 자는 엄중히 법에 따라 처리한다 하니 어쩔 수 없이 갔다.]하고 돌아 왔는데 처세하기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1948.4.2 ; 5.10)

소위 남선(南鮮政府)가 오늘 건립하고 피선거자 이승만이 취임식을 거행한다고 한다.(1948.7.11 ; 8.15)

 

 

東京 물난리, 소련 출병, 漢口 함락, 징용 탈출 등 외부정세

 

○ 이웃사람이 일본에 들어가 생업을 구했는데 그 서간이 우편으로 와서 그 아버지가 나에게 글을 보여주었는데 그 글의 끝에 ‘근일에 東京의 절반이 수재(水災)를 당했고 내를 이루어 인구 사장자가 20여만’이라 했으니 얼마나 참혹한가. 상상컨데 반드시 그 속에는 우리 조선인(鮮人) 또한 많을 것이니 더욱 측연함을 누를 수 없다.(1938.6.17)

○ 어떤 이가 와서 말하기를 근일에 소련(로서아)이 출병하여 조선과 만주를 공격한다고 했다. 가장 근심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저들에게 강제 징용되어 저들과 같이 죽는 것 뿐이니 한탄스러움을 어찌할까(1945. 7. 7 ; 8.14)

○ 일본병이 중국 漢口를 함락시켰다고 하는데 각 구역으로 하여금 면사무소에 금고(金鼓) 회합을 하여 개선가[凱歌]를 대신하도록 했는데 이때는 추수 시기로 분망하여 틈이 없는 때이다. 또 비가 오려함이 하늘에 가득하고 곡식을 거둬 들이지 못할 지경인데 어찌 소위 함락이니 점령이니 하는 것은 눈앞에 것을 보지 못하고 신문상에서 본 것인 즉 중화의 기운이 쇠하고 세력이 약해짐이 과연 이 같은가.(1938. 9.6)

○ 생질 백민교가 지난달 그믐께 징용을 당해 갔는데 부산에서 탈출하여 와서 여암(餘巖) 딸집에서 유숙하고 정오경에 돌아왔다.(1945. 5. 26)

○ 풍문인 즉 부산항에서 (해남)우수영까지 연해 수천리 해상에 저들의 군함이 병기와 군량미를 싣고 운행하니 영국과 미국[英米] 비행기와 잠행정이 폭격하니 침몰된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다고 했다.(1945. 5. 27)

○ 변한희(邊漢禧)가 일본 東京 공장(저들에게 징용당했다.)에서 탈출해 돌아와 하는 말이 ‘東京은 영국과 미국의 폭격으로 인해 멸망할 지경이라니 기분은 좋은데 조선인이 왜보다 많이 죽었으니 비통한 처지이고 조카 창흠(昌欽)과 병흠(炳欽)은 소식이 두절되었으니 매우 울적합니다’ 하였다.(1945. 5.28)

○ 서남해상에 저들의 군함과 병기가 폭격하여 날이 갈 수록 침몰자가 무수하나 도선 연안의 어업민들이 죽은 자 또한 많다는 소식을 들으니 측은하다(1945. 6.4)

 

장흥 유생 김주현의 『정강일기』1938년 5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10년 7개월의 기록이다. 이 시기는 일본 강점기 말기에서 광복 직후로서 급격한 사회변동기라 할 수 있다. 이 일기를 통하여 실제 촌락에서 주민들의 생활상, 유생들의 향촌활동과 교류, 정치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인식, 중앙이나 지방관서에서 추진했던 제반 제도의 시행과정, 외부 정세 등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인명과 지명, 용어와 제도, 관련 자료 수집과 비교 연구 등이 함께 된다면 생활사나 지역사는 물론 시대사의 이해와 복원에도 소중한 기록유산이 될 것이다.

   

김주현선생의 정강일기. 1938년~1948년 사이 10년 7개월 기록, 모두 10책이다.

일기 1책 표지

일기 9책 표지 - 고갑자, 기성 동도 기원, 공부자 기원년을 함께 쓰고 있다.

49세 생일날 일기를 쓰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1945년 7월 10일~11일(음) 기록. 해방 소식 내용이다.

 

전남 장흥군 용산면 관지리 전경. 김주현선생은 마을 뒤에 주곡정사를 개설하고 강학을 했다. 마을 앞에 제자들이 1998년 4월에 강학비를 세웠다.(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960년대의 관지리 전경. 사진 중간쯤 오른쪽으로 난 길이 『정강일기』1938년 6월 8일조에 기록된 ‘양복입은 두세명의 측량원이 깃대를 가지고 측량’했던 남포선이다. 용산면 소재에서 관지리-상금리-풍길리를 거쳐 남포항에 이르는 길로 ‘지방 신작로’인 셈이다. 사진 : 1969년 김흥연님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정강일기』 1책 1938년 6월 7일~11일조

소모님이 이질로 누우셨다 해 동생 편에 가감작약탕을 보내고 오후에는 일곡(백형택)과 함께 월정의 야은어른(백형일)댁에 가서 이광사공의 유묵을 열람하다.(6.7) 소모님께 가감양영탕 두첩을 드리고 마을 앞에 나가니 홍백 무늬가 있는 긴 장대를 든 양복쟁이 몇이 오가다. 남포선 측량원이라 하다. 남호 강대웅군이 와서 그간의 이야기를 하다.(6.8) 남호가 가려하나 항상 문의(文義)를 깨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논어를 읽다.(6.9) 면직원이 와서 매호당 생초(生草) 한짐를 한시간 안에 낼 것을 독촉하다. 저들의 소위 일지개전기념일이다.(6.10) 동봉(東鳳)에게 죽천시장에 가서 아버님 제수용 어육과포(魚肉果脯)를 사오도록 하다. 어떤 이가 아들의 빚 때문에 집달리가 집행한다는 말을 듣다.(6.11)

 

마흔일곱 시절의 정강 김주현선생(왼쪽). 가운데 일곡 백형택선생(59세), 오른쪽 잠계 백형기성생(56세). 관지, 상금 등 ‘칠리안속’이라 부르는 이웃한 마을의 훈장들이다. 사진 : 1936.3.29 촬영. 일곡후손가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 국가기록원, <기록인(IN)> 26호/2014년 3월호 특집 ; 근현대 일기를 통해 본 시대풍경

기고201403 기록인26 근대일기풍경 정강일기1.pdf

 

기고201403 기록인26 근대일기풍경 정강일기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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