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77 - 가장 오래된 돌다리 기록, 강진 작천 석교 신창비, 1650년

향토학인 2019. 4. 15. 01:12

인지의 즐거움177

 

가장 오래된 돌다리 기록, 강진 작천 석교 신창비, 1650년

 

김희태

 

돌다리[石橋]에 대한 기록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전남 지역 23종 확인. 사찰과 연관이 많아 남도불교문화연구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몇 번을 보아 왔는데도 빠진 기록이 있었다. 강진 병영의 전라병영성 동문 곁에 모아진 비군. 그 가운데 있는 작천 석교 신창비(鵲川石橋新創碑). 오래전에 조사된 내용이 있지만, 이제 다시 살펴 보니 1650년(인조 27, 경인)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돌다리 기록으로는 가장 앞선다.

 

이 비는 작천 석교를 새로 만들고 세운 비이다. 석비의 우측면(향우)에 ‘鵲川石橋新創碑’라 내려 쓰고 시위(시주) 인명을 기록하였다. 맨 위에 횡서로 “兵使李 縣監韓”이라 새기고 그 아래로는 종서 3단으로 새겨 있다.

 

첫 번째 단에는 원교대시주와 제1칸~제5칸의 시주 인명 5인, 두번째 단에는 제6칸에서 제11칸의 시주 인명 6인, 세 번째 단에는 철물 대시주와 포시 대시주 등 인명 5인이다. 왼쪽 끝줄에 연대와 화주, 말목시주가 종서로 새겨 있다.

 

연대는 경인(庚寅)년 5월이다. 이 경인년이 어느 해인지는 윗 부분의 전라병사 “이(李)”, 강진현감 “한(韓)”을 통해서 조사해 보았다. 다행인지, 강진현감으로 한(韓)씨 성인 사람으로 한진(韓縝)이 있다. 한진은 문과출신으로 1649년(기축, 인조 27) 6월에 도임하여 1650년(경인) 10월에 체직되어 돌아갔다. <금릉읍지>(1793) 기록이다.

 

"경인년 10월"까지 재임했기 때문에 작천 석교 신창비를 세운 “경인년 5월”과는 시기가 맞는다. 강진 현감 한진 재임 때에 작천 석교비를 세웠고 시주인명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작천”은 현재 강진군 작천면(鵲川面)의 행정지명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작천면은 1914년에 생겨난 합성지명이다. 이지면(梨旨面), 열수면(列樹面), 초곡면(草谷面)의 세 개 면이 이 합해져서 작천면이라 한 것. 이 비가 1650년이니 “작천” 땅이름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자연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강진현과 장흥도호부 산천조 기록을 보자.

 

작천(鵲川) : [강진]현의 북쪽 15리, 옛 도강현 땅에 있다. 자세한 것은 장흥부에 적혀 있다.(강진 산천조)


작천(鵲川) :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北內廂) 서남쪽을 지나 [장흥]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령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九十浦)로 들어간다.”(장흥 산천조)


송계(松溪) : 송계부곡에 있다. 근원은 월출산에서 나와 고현(古縣)을 지나는데, 곧 작천(鵲川)의 상류이다.(강진 산천조)

 

정리하자면, 월출산에서 발원하여 옛 도강현 북내상의 서남쪽을 지나 장흥에서 흘러온 수령천과 만나 구십포를 들어가는 하천이라는 것. 작천의 상류를 송계라고도 했다. 이 작천이 전라병영성 남문 앞으로 흐르는데 이를 건너서 강진현으로 통하는 길의 다리가 작천교이다.


작천교에 대한 기록도 확인된다. <대동지지>와 1872년 강진지도에 있다. 배전각의 홍교와는 다른 위치이다. 작천교는 강진현에서 20리, 홍교는 30리 거리이다.

 

작천교(鵲川橋) : [강진현] 북쪽으로 20리 병영 아래에 있다.(<대동지지> 교량조)


배전각홍교(拜箋閣虹橋) : [강진현] 북쪽으로 30리에 있다.(<대동지지> 교량조)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지금까지 확인된 전라도 석교 교량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서는 기록이다.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하여 23종 기록을 확인한바 있는데, 1650년 기록이 영암 침향교 신창비와 나주 사마교비 2종이 있었다. 그런데 연대 기록만 확인될 뿐 내용은 알 수가 없어 작천 석교 신창비가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둘째, 11칸에 이르는 상당한 규모가 있는 석교 교량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1674년(현종 15)에 세운 보성 마천석교비는 7칸, 1686년(숙종 42)에 세운 보성 동원석량비는 9칸이다.


셋째, 전라병사와 강진현감이 지원하였고 양인도 시주인으로 참여한 점도 주목된다. 그리고 각 칸별로 시주인을 기록하였다. 제6칸을 시주한 최주원은 양주로 참여하였고, 제11칸을 시주한 고김청경(故金天慶)은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이 비는 병영면사무소에 있었다. 2004년에 남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를 하였다. 면사무소가 옮겨가고 전라병영성이 정비되면서 동문 입구에 비군을 옮겼는데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전라병사를 지냈다는 김중현(金中鉉, 1891년(고종 28) 7월 29일 전라병사 임명)선생의 관련 자료, 선정비 같은게 현장에는 있을까 뒤지다가 작천 석교 신창비를 다시 보게 되었다. 글자도 몇 자 더 보이고 연대도 확인하게 된 것. 작천에 건립된 열한칸의 돌다리, 이제 그 현장으로 나서야 겠다.

 

* 작천 석교 신창비 글자는 모두 184자이다. 2004년 남도문화재연구원 조사 때의 판독 내용에 필자가 10자를 새로 확인하여 정리하여 올린게 2019년 4월 15일. 4월 19일 황호균 학형과 현지 확인을 하였다. 북문안에 옮겨져 있었다. 송광사성보박물관장 고경 큰스님께서도 이날 현지 조사를 하고 추가 판독 내용을 보내 오셨다. 5글자를 새로 확인 판독하신 내용이다. 施主→施爲, 願福→願橋, 白仠己金→白件己金, 崔春甫→崔春浦, 盧作貴→盧貴. 그리고 끝줄의 施主와 盧貴 사이에는 글자가 없는 것으로 확인한 내용이다. “선생님께서 올린 자료를 보고 중요한 자료라 사료되어 스님께서 19일날 조사하여 작성한 비문 자료를 보냅니다.”라는 신은영선생의 글과 함께 비문 형태대로 종서로 정리한 자료이다. 거듭 감사드린다.


강진 병영  鵲川 石橋 新創碑  

· 소재지 : 강진군 병영면 병영면 사무소내(2004년 조사시), 2016년, 2017년 전라병영성 동문 입구, 2019년 4월 19일 북문안

· 크기 : 높이 125cm, 너비 52cm, 두께 20cm

 

鵲川石橋新創碑

兵使李 縣監韓

施爲目錄

願橋大施主良女應化

第一間大施主金億祿

第二間 施主金彦馨

第三間 施主羅義達

第四間 施主李萬守

第五間 施主金成龍

第六間 施主崔柱元[兩主]

第七間 施主白日龍

第八間 施主李嗣先

第九間 施主崔得一

第十間 施主李得厚

第十一間 施主故金天慶

鐵物大施主金武進

布施大施主白件己金

布施崔春浦

布施吳厚男

布施女人秋陽

庚寅五月 日

化主金彦守


抹木施主 盧

  

*남도문화재연구원·강진군, <강진 전라병영 금석문>, 2004

*인지의 즐거움161 - 돌다리(石橋)를 만들자 - 흙으로 만들면 무너지고 판자는 썩어버리니(2018.09.12.)

작천 석교 신창비(2016.03.18일 촬영)

고경큰스님(송광 성보박물관장)께서 현지 조사를 하여 판독한 내용. 4월 15일 올린 글을 보시고 중요한 자료라 여기시고 4월 19일 직접 현지 조사를 하셨다. 학은에 거듭 감사드린다. 4월 19일은 필자도 전라병영 현장에 있었고 비군 답사를 했는데 현지에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해 아쉽다.

전라병영 축제로 열린 초대 전라병사 마천목장군의 숭모제(동점문)에서 좌명공신녹권(보물 1004호) 해설차 참석했다.

2004년 사진, 당시 병영면사무소 앞(남도문화재연구원 자료 인용)


탁영문(2004년 남도문화재연구원 조사)

조선후기 작천교 기록(1872년 강진지도, 규장각소장) 전라병영성 남문 앞을 가로 질러 흐르는 작천을 건너 강진현과 통하는 길목의 다리임을 알 수 있다.

전라병영성 동문 곁의 비군(2017.11.17 발굴 조사 자문회의 때)

전라병영성 북문 안의 비군(2019.04.19. 전라병영 축제 마천목 초대 병사 숭모재 좌명공신녹권 해설 때)

전라병영성 북문 안 비군 중 작천석교 신창비(2019.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