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101 - 1786년 고총(古塚) 개착(開鑿), 발굴인가? 훼손인가? - 옥과현감 祭古塚文

향토학인 2017. 3. 22. 14:37

인지의 즐거움101

 

1786년 고총(古塚) 개착(開鑿), 발굴인가? 훼손인가?

옥과현감 수산 이종휘의 제고총문(祭古塚文)-

 

김희태

 

1786년 병오년 3월 그믐날

봄빛이 남아 있는 전라도 옥과 들녘

마전리 북쪽 언덕에 오른 사람들

 

아하 어쩌나 봄비에 씻겨 드러난 고총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안에 있는 것 함께

잘 모셔 주는 것도 도리 아닌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영역(塋域)을 살핀다

허수룩하지만 제법 규모 있는 세 고총

이윽고 유광(幽壙) 개착(開鑿) 조심 또 조심

 

두 무덤은 회석(灰石), 관구(棺柩)가 보인다

세 곳 모두 황동(黃銅) 밥그릇과 수저 한 벌씩

한 무덤은 석곽 속에 질그릇 항아리 한 벌만

 

밥그릇은 덮개가 편편하고 굽이 없고

수저는 잎이 크고 자루는 짧고 연꽃송이 모양

전도(剪刀) 한 자루 나온 곳은 부인의 묘인듯

 

두곳의 관구는 그리 심히 썩지는 않았고

비어 있는 묘는 속에 물이 차 괴어 있지만

식기나 수저를 보니 근고의 것은 아니라

 

 

항아리와 석관 속 먼지와 흙을 옮겨서

새로 마련한 관()속에 넣어 자리를 잡아

동쪽 유좌(酉坐) 묘향(卯向)에 전과 같이

 

옥관현감 수산 이종휘(修山 李種徽, 1731~1797)가 1786년(정조 10)에 지은 고총의 제문(古塚文) 내용을 토대로 서사로 풀어 본 것이다.

 

고총(古塚)’개착(開鑿)’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문화재 발굴’, ‘고고학 발굴이 아닌가. 그러면 무단 발굴인가. 아니다 지금의 문화재 관련 규정에도 문화재 관계자가 조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니(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성실한 공무수행이다. 당시 지방 사무를 총괄했던 원님 참관하에 조사를 했으니

 

봄비로 인해 씻겨 내려 이미 드러난 고총의 발견 소식을 듣고 직접 현장을 살피고 조사. 그리고  바로 곁에 전과 동일하게 한 줄로 모셔 이장하고 다음날 4월 초하루 제사까지 지낸다. 근래에도 발굴조사하면서 개토제를 올리긴 하지만, 당시 옥과에서 지방관 일행이 한 의례와 비교가 될까 싶다.

 

제문을 보면 발견과 발굴, 유물 확인과 기록, 이장 등에 대한 경과가 나온다. 보통의 제문이 흠향하시라 하는데 그치는데 반해, 이 고유문은 일지 형식으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짧지만 여러 가지를 읽어 낼 수 있다.

 

조사 사유는 마전리의 고총 발견에 따른 확인. 많이 내린 봄비 탓에 봉분 일부가 쓸려 내려 드러난 무덤. 자연재해에 따른 긴급 조사. 그렇다고 구제발굴은 아니다.

 

유적 입지와 현상은 세 곳의 고총과 마전리 북쪽 언덕배기. 마전리는 현재 곡성군 겸면에 속한다. 당시 전라도 옥과현 지좌곡면(只佐谷面) 마전리. 지좌곡면 명칭은 뒤에 지면(只面)으로 이름이 바뀌고 1914년에 겸면과 합해지면서 겸면 마전리가 된다.

 

조사 과정은 외형 현상 확인에 이어 봉분의 개착. 봉분 내부(석회)와 관구()의 상태를 기록.

 

유물은 각 고총의 출토 현황과 종류(황동 식기[飯器], 수저[匙], 항아리[陶缸]), 수량(식기와 수저는 세곳 각 1벌씩).

 

유물을 보고 성별과 편년도 해 본다. 한 곳에서 나온 가위유물[剪刀]로 보아 그곳은 부인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수저자루(匙柄)가 연꽃송이(蓮朶) 모양으로 되어 있어 근고(近古)의 유물이 아니라 오래된 것으로 편년도 하고 있다.

 

유물의 처리는 항아리와 석관 속에 있는 먼지와 흙을 옮겨서 새로 마련한 관()속에 함께 넣고 새로 마련한 무덤에 모신다. 정토(淨土, 깨끗한 세상)로 옮겨 안장시켰다고 표현하고 있다. 출토유물의 현장 보존 원칙, 문화재의 원형 보존에 충실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어서 제문 예에 따라 기원하면서 고유문을 맺는다.

 

당신들의 묘()

한 줄로 천자(川字) 모양 같이 하였고

크고 작은 모양도 균등하게 하였으니

혹시라도 그 친척이나 존속 중에

가까운 분이 나타나게 된다면

신구(新舊, 새 자리와 옛 자리)에 서로 의()해서

영구히 편안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 지역을 위태롭게 함이 없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尙饗).

 

*2007년 곡성군 옥과면 소재 만취정을 조사하면서 옥과현감(1783~1786 재임)을 지낸 이종휘의 <수산집>(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247)에서 玉果涵碧堂重修, 涵碧亭重修記, 六游堂記, 三樂門記, <祭古塚文>을 확인하다. <제고총문> 국역은 박경래선생(록양고문연구원장, 광주)의 도움을 받았다.


*참고

김희태, 조선시대 옥과현 읍치의 공간구성 1, <향토문화> 28,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8

 

*원문

고총에게 고유 드리는 제문 (祭古塚文)

 

지금 주상 즉위 십년 병오(丙午, 1786, 정조 10) 사월 초 하룻날 갑술(甲戌, 일진) 지현(知縣, 현감)은 기관(記官) 최계(崔啓)을 보내어 술과 과일 등의 제물을 갖추고 마전리(馬田里) 북쪽 언덕 세 무덤의 ()에게 고합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당요(唐堯)가 민중을 구제하시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하고 주()나라 문왕(文王)이 죽은 자의 뼈를 덮어 주게 하던 정책을 거행한 것은 은혜가 이미 백성[黎首]들에게 깊으시고 혜택이 또한 마른 해골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무릇 지역을 지키는 신하(수령)들의 입장에 있어서 성심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성스러운 뜻을 받들어 오직 혹시라도 남보다 뒤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본관도 이 지역에 부임하였으므로 한 지역의 내에 있어서는 멀고 가까운데 가없이 끝까지 수색하고 널리 찾아내어 흙을 쌓아 무덤이 만들어진 곳이라면 빠뜨림이 없도록 하여 임금의 뜻에 만분의 일이라도 맞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당신들 세 무덤도 마침 무너진 언덕에 임하여 앞머리 쪽이 빗물에 씻겨서 사태가 나고 떨어져 나갈 우려가 있습니다.

 

이치적으로 말하자면 사물이 생장하였다가 죽고 다시 무()로 돌아가며, 백년이 지난 후에는 해골과 머리털 손톱 등 모든 것이 찬바람에 나부끼고 흩어져 먼지로 날리게 되니 다시 또 무엇이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임금님께서 이런 일을 거행하는 것은 곧 주나라 문왕(文王)이후로 처음 있는 일로 황폐한 산록에 무너져간 무덤을 보수하게 된 것이며 천고(千古)의 유혼(幽魂, 죽은 사람의 혼)을 위로하여 지역 내에 주인 없는 귀신들로 하여금 모두가 다 그 위치에서 편안히 잠들게 한 것이니 그것은 곧 또 문왕(文王)이후로 없었던 일입니다.

 

이로서 이 지역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도 능히 마음을 다하여 해체를 우러러 보호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반드시 허물어진 묘들을 모두 다 덮어주고 난 후에 말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당신들의 세 무덤은 단지 목전(目前)의 일시적으로 안장할 계산을 하였고 천세(千世)후의 일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었으니 그러고 보면 어찌 임금님의 고심(苦心)을 외롭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제 본관은 몸소 영역(塋域)을 살펴보고 유광(幽壙, 묘구덩이)을 파헤치고 본즉 세 무덤이 모두 다 황동(黃銅)으로 된 밥그릇 한 벌과 수저 한 벌이 들어 있었습니다.

 

남쪽(맨 앞쪽)묘에는 또 전도(剪刀, 가위)한 자루가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거기는 부인(婦人)의 묘라고 여겨졌습니다. 밥그릇은 덮개가 편편하고 굽이 없었으며, 수저도 잎이 크고 자루가 짧았습니다.

 

남쪽(앞쪽)에 무덤은 수저자루가 연꽃송이 모양으로 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니 근고(近古, 가까운 옛날)의 제품의 모양은 아니었습니다.

 

(中南)에 있는 두 무덤은 회석(灰石, 백회)으로 된 가운데에서 모두 관구(棺柩, )가 남아있었고 심히 썩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북쪽 묘(맨 뒤에 있는 묘)에만 비어 있었고 아무 물건도 없었으며 석곽 속에 질그릇 항아리 한 벌만 있을 뿐이었으며 물이 속에 차서 많이 괴어 있는 듯 했었습니다.

 

항아리와 석관 속에 있는 먼지와 흙을 옮겨서 새로 마련한 관()속에 넣고 그 산등성이의 동쪽 유좌(酉坐) 묘향(卯向, 서에서 동쪽으로 향한 자리)에 새롭게 자리를 잡아서 세 무덤을 나란히 한 줄로 전과 같이 모셨습니다.

 

! 당신들은 생전에 선왕(先王, 전 임금)의 백성으로 그때 세상에도 잘 보양을 받았었고 죽은 뒤에 또 이 땅에 안장되어 몇 겁()의 세월이 지난 후까지 남아 있게 되었으니 비록 자손(子孫)들이 있고 없음은 알 수 없지만 잔해(殘骸)만은 남아있게 되었고 또 성스러운 임금님의 혜택을 입게 된 것이며 거의 노출되어 있는 관()의 앞머리[前和]로 하여금 다시 정토(淨土, 깨끗한 세상)로 옮겨 안장시켜 주었으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당신들의 묘()는 한 줄로 천자(川字) 모양 같이 하였고 크고 작은 모양도 균등하게 하였으니 혹시라도 그 친척이나 존속 중에 가까운 분이 나타나게 된다면 신구(新舊, 새 자리와 옛 자리)에 서로 의()해서 영구히 편안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 지역을 위태롭게 함이 없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尙饗).


 

 

 

 

* 이종휘(1731∼1797)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이다.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고 실학적 사회의식을 보여주었다. 공주판관과 옥과현감을 지냈다. 역사 저술인 <동사(東史)>, 문집으로 <수산집(修山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