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즐거움

인지의 즐거움053 - 광주에 그런 비석이 있었나? 새우젓장수 제사비

향토학인 2016. 6. 5. 03:00

인지의 즐거움053

 

광주에 그런 비석이 있었나? 새우젓장수 모자 제사비

-지응현(池應鉉)과 새우장수 모자 제사비(祭鰕商母子碑)

 

김희태

 

 

광주에 그런 비석이 있었나?

 

“아야. 거. 새우장수 제사 비석 가 봤는가. 금호동 병천사 앞에 가면 비석이 있는데. 글씨 좀 봐주게. 충주지씨들 사당. 인자 눈도 잘 안 보이네. 글 한편 쓰고 있네”

 

‘새우장수 비석? 그런게 광주에 있었나?’

 

바로 뛰어 갔다. 2014년 2월 2일이다. 일요일 오전 10시께. 여전한 필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향토사학자 학고 김정호(鶴皐 金井昊)원장님 전화. 팔순이 눈 앞이지만, 현장을 다니고 원고지 앞에서는 아직도 열혈 청년.

 

비문 내용 확인과 관련 자료 여부를 문의하여 현지 방문해 촬영, 판독, 정리하고 문집 등을 찾아 개략적으로 정리했다. 또 공부를 시키신게다. 그날 저녁 정리 자료를 드리면서 저녁식사 겸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양림동 풍성한 식당. 김경수 향토지리연구소장 동석. 뒤에 “새우젓 장사 제사비” (2014.03.06 무등일보, 김정호 역사문화산책 32)로 소개되었다. 이 연재물은 뒤에 책으로 간행되었다. 김정호, <광주산책> 상, 광주문화재단, 2014. 246~250쪽

 

비석은 병천사(秉天祠) 삼문 앞에 있다. 장방형의 좌대 가운데 홈을 만들어 일반 호패형의 비몸을 세웠다. 크기는 높이 140cm, 너비 46cm, 두께 27cm이다. 앞면에 1행으로 ‘祭鰕商母子碑’라 내려쓰기로 새겼고, 3면에 글이 있다. 뒷면은 내력이며 향좌면은 연대(기미, 1919), 비문 지은이(鄭鳳鉉), 글씨 쓴 사람(金敎珍), 비를 세운 유사(李純範), 향우면은 담양 대전면 중옥리의 전답 면적이다. 병천사는 광주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458) 소재.

 

비문을 지은 정봉현(鄭鳳鉉, 1852~1918) 자는 언국(彦國), 호는 운람(雲籃), 하동인(河東人). 후조당(後凋堂) 정대방(大防) 10세손, 호계(浩溪) 정재화(在華) 아들. 곡성 옥과 포평리(蒲坪里) 출신으로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학식이 높아 많은 제자를 두었다. 문집으로 <운람집(雲籃集)>(10권 5책)이 전한다.

 

현지의 비석을 판독하고 지응현의 문집인 <붕남실기(鵬南實記)> 부록에 실린 비문을 대교 하였다. 새우젓 장사와 지응현, 담양 중옥리 전답에 얽힌 사연은 비석의 국역문과 당시 사연을 소개한 <매일신보(每日申報)>(1918.6.26일자) 기사에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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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談같은 事實-백하장수의 제위답, 그를 기념한 비석.(<每日申報>)

 

전남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지응현(全南 光州郡 光州面 須奇屋町 池應鉉)씨는 십구년전 경자(*1900년) 시월달에 백하장사 모녀가 그 집에 와서 몇칠동안 유련(留連 : 객지에서 머무름)하다가 쌀 빌러 나간다 칭하고 가져온 짐을 맡기고 나간 뒤에 십여일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집에서는 무엇인지 썩는 냄새가 나는 고로 열어 본 즉 백하 팔두와 백미 닷되와 목화 오근이 있는 고로 이것을 잘 말려 두었으나 한 달이 지내도록 소식이 없는 고로 그것을 방매한 즉 그 가격이 이십 이원 오전*이라.

또 수삭을 기다렸으나 종시 형음이 없는지라 지응현씨가 이것은 타인의 재물인 즉 심상이 할 바 아니라 하여 달 서푼 이자로 육년 동안을 기르니 본전과 이자가 도합 십원 구십 칠전 육리가 되어 이 돈을 가지고 광주군 대치면 중옥산리 전평에다 논 한말 닷 되락을 사서 매년 흉풍을 물론하고 한섬씩을 받기로 완정하여 중옥산리 동중에다 그 논을 맡겨 두고 필경 그 백하장사는 죽었기가 쉬우니 살아서 그집에 나간 말 시월 십오일로 제사를 연년이 지내 오던 바 금년까지 영 무소식인 고로 금년에는 그 동중 전에다 석비를 세우고 동중 인민은 이것을 어느때까지던지 잊지 못할 증거를 세워 두어야 지응현의 덕의도 없어지지 않고 백하장사 모자의 고혼도 위로되겠다하여 방금 공사이라더라.(<每日申報> 1918.6.26일자 3면 4단)

 

백하장수 모자 제사비(비문 국역문)

 

백하장수 모자는 모두 성명을 알 수 없는데, 그 모자가 새우 8말, 쌀 5되, 면화 5근을 갖고 참봉 지응현댁에 머물렀다. 밖으로 나간지 오래 되었지만 돌아 오지 않아 지참봉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를 팔아서 논을 사서 옥산리 마을에 의탁하였다. (그 모자가) 나간 날이 경자년(1900년) 10월 15일이어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지참봉의 덕의가 이처럼 큰데 그들 모자의 외로운 혼을 슬퍼하여 마을에서 해가 오래되어도 혹시라도 거르지 말고 제를 지내도록 했다.

기미(1919년) 시월 일 하동 정봉현 짓다. 경주 김교진 쓰다. 유사인 함평 이순범

담양군 대전면 중옥리 상자답 1마지기 5되지기 85답 441평

 

 

호남 17곳에 시혜비가 세워진 지응현

 

지응현(池應鉉, 1869~1959)의 자는 형숙(亨淑), 호는 붕남(鵬南)이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항일의거 때 군량을 조달하였고, 병천사(秉天祠)를 세웠다. 1934년 응세농도학원을 설립하여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다. 응세농민독본(應世農民讀本)을 간행하였다. 1950년에는 원효사를 중창하였고 호남 각지에 시혜비가 세워졌다.

 

문집인 <붕남실기>는 3권 1책의 석인본으로 1939년 간행했다. 서문은 민병승, 고광렬, 정인찬, 발문은 양효묵이 지었다. 권1은 충주지씨세계 소개와 지응현이 개인 및 단체와 주고 받은 시, 서, 문이다. 권2는 일본 강점기 지응현이 설립한 금석농장(金石農場), 응세농도학원(應世農道學園) 설립과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권3은 유림들이 지응현에 대한 소회와 공덕을 기리는 각 지역 시혜비(施惠碑) 내용이다. 국립중앙도서관[BA2511-75-5], 전남대학교 도서관[2H2-붕211ㅈ],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B9I-360]) 등에 소장되어 있다.

 

<붕남실기>에는 지응현 자신이 지은 ‘제하상단기(祭鰕商壇記)’와 ‘제하상축문(祭鰕商祝文)’, 부록에는 운람 정봉현의 ‘제하상모자비문(祭鰕商母子碑文)’, 송사 기우만의 ‘하상단기(鰕商壇記)’(무신, 1908)와 하상(鰕商)에 관한 여러 문사들의 글이 실려 있다. 송사 기우만의 기문은 ‘書安浮海蝦婆壇記後’라는 제목으로 문집에도 실려 있다. (玉山池君里社爲壇. 俾祭蝦婆. 雖謂之絶世奇事可也. 浮海安君記錄詳矣. 揄揚盡矣. 吾無容更喙. 而池君去赤猴年閒. 國步艱難. 死生相隨. 吾知秉執有素. 志事得伸. 則其事業綽有次第. 蝦婆爲祭. 雖惻隱之本心. 而在君亦疏節. 若其大節則幽而未闡. 吾不言. 後人安得以知之.(<松沙先生文集>권22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a345집 551d면)

 

글이 실린 문사들은 모두 29명에 이른다. <매일신보>를 통해 알려지고 비석을 세운(1919년) 뒤에도 계속 글이 이어지고 있다. 석음 박노술(石陰 朴魯述, 무신, 1908), 부행 안택승(浮海 安宅承, 정미, 1907), 운람 정봉현(雲籃 鄭鳳鉉, 정미, 1907), 풍남 노응현(豊南 盧應鉉, 경술, 1910), 죽파 최기룡(竹坡 崔基龍, 무진, 1928), 송해 노문규(松海 盧汶奎, 무오, 1918), 석하 심의종(石下 沈宜鍾, 정미, 1907), 육봉 이종택(六峯 李鍾宅, 을해, 1935), 삼삼 정우원(三三 鄭友源, 정축, 1937), 우정 고광익(愚汀 高光益, 무오, 1918), 난실 정만식(蘭室 金晩植, 신유, 1921), 석실 이학수(石室 李鶴洙, 정사, 1917), 산은 이노경(汕隱 奇老康, 임술, 1922), 동명 노종필(東溟 盧鍾弼, 白馬[경오], 1930), 노암 양노묵(老菴 梁老默, 기묘, 1939), 지헌 김종민(芝軒 李鍾民, 黑猪[계해], 1923), 성석 이희범((醒石 李喜凡, 갑술, 1934), 광산 정철주(光山 鄭哲周, 신미, 1931), 소송 김지일(小松 金志一, 정축, 1937), 운농 지명호(沄農 池命鎬, 정축, 1937), 울산 김극중(蔚山 金極中, 계해, 1923), 박사 이광수(博士 李光秀, 을해, 1935), 석초 이가호(石樵 李起澔, 임오?, 1942) 등이다.

 

<붕남실기>에 시혜불망비 17기가 기록되어 있다. 무오[1918.03] 광산군 지한면 팔구역/4월 서방면 두암/서방면 각화/기미[1919.2] 석곡면 화암리/석곡면 덕의리/8월 효천면/11월 우치면/12월 극락면/경신년[1920.01] 장성군 진원면/운봉 비전[경남 함양군 마천리 강청리 池載湘/경신 2월 대전면/3월 광주부 누문정/3월 원갑마보면/4월 광산군 지한면/12월 곡성군 옥과면 이문리/10월 대촌면 니장리/무진[1928] 2월 순창군 따위이다. 병천사 입구에는 12기가 있는데 사우 정비 때 옮겨온 것이라 한다.

 

병천사는 고려말의 충신인 정몽주를 비롯하여 지용기·정충신·지계최·지여해 등을 모시는 사우이다. 지응현이 주도 해 1924년에 지었다. 사당·영당·동재·서재·강당·전사실·내삼문·원직사 따위가 있다. 이 가운데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를 두었고 앙쪽은 방을 들였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이다.

 

* 자료 1 : 비문 대교

祭鰕商母子碑

[뒷면]

鰕商母子 俱不知姓名 其母子留 鰕八斗米五升綿(*棉, 이하 *는 <鵬南實記)五斤(*)于」

池叅奉應鉉宅 出外久不還 叅奉悲其(*其必)死 賣此物買田托玉」

山里中 以出行日庚子十月十五日 使之歲祭 叅奉之(*之 표기 없음)德義」

大矣 其母子孤魂悲矣 凡此里中雖歲遠毋或廢祭

[향좌]

己未十月(*戊午四月) 日 河東(*雲籃)鳳鉉誌(*이하 표기 없음) 慶州金敎珍書 有事人 咸平李純範

[향우]

潭陽郡大田面中玉里裳字畓一斗五升 八五畓四百四十一坪

 

 

* 자료 2 : <皇城新聞> 양력 1910.04.24. 01면 05단(음력 1910.03.15.) 기사

 

死者無恨 全南光州郡大峙面中玉里居 前叅奉池應鉉氏家에 無子無家히 賣鰕老姿가 有야 幾年往來間宿食다가 金幾許圜을 池氏에게 任置고 一去以後로 永永不歸 故로 池氏가 死兦의 患이 有을 認定고 該姿의 情境을 矜憐야 其任置金으로 里中에 出付야 殖利貿土케 後該土의 所収로 壇을 築고 里人으로야곰 每年一祭야 該婆의 靈을 慰安케으로 池氏의 高義를 舉皆穪歎다더라

    

 

                                                                                                                   

 

祭鰕商母子碑(병천사 소재)       

 

 

 

祭鰕商母子碑와 叅奉池應鉉施惠碑        

 

 

 

祭鰕商母子碑文, <붕남실기> 

 

병천사 원경과 제사비, 시혜비군

 

每日申報 1918.6.26일자 3면 4단

 

 

 

<皇城新聞> 양력 1910.04.24.(大韓隆熙四年四月廿四日日曜) 01면 05단